소설리스트

69화 고백과 용서 (69/148)

69화 고백과 용서

“자기네들 주머니로 빼돌릴 생각이 농후하니 그러겠지.”

“전하.”

실라스는 어느새 조소도 지우고는 평온한 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정도는 해야지 제국의 황태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이다.

“카셀, 그간의 전모를 알아낸 건 모두 그대의 공로다. 그러나 금광맥의 일을 그대가 직접 조사하여 발표하게 된다면 두 가문이 대놓고 보복하려 들까 우려되는군.”

두 가문 중, 오를레앙 공작가는 완전히 중죄고 휘안테 후작가는 그나마 정상을 참작하여 벌금과 근신 정도로 끝날 것이다.

설령 오를레앙 공작가가 중벌을 받고 후작가로 격하된다고 해도 후에 가만히 있진 않겠지.

그때가 되면 제국의 왼편 심장이란 칭호로도 2:1의 싸움이 버거워질 수 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카셀은 블루 로즈 기사단의 문양에 손을 대고 각오를 다졌으나, 실라스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면으로 충돌하려 하지 말고, 페이 양을 불러 같이 의논해 보게. 그녀는 내가 봄의 무도회에서 고민할 때 랏셀 공녀를 초대하라는 파격적인 계책을 내놨지 않나? 이번에도 틀림없이 좋은 복안을 내줄 걸세.”

그렇지, 우리 티아나가 있었지.

카셀은 총명한 여동생의 생각에 감탄하다가 살짝 당황했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페이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있는 건 아니겠지?’

봄의 무도회에서 이복동생인 아스테인을 붙여 주긴 했다지만, 그건 정치적인 실리주의고. 개인적인 호감을 표명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곤란한 일일 테다.

페이는 누가 뭐래도 자기 뜻대로 살아야 해.

페이가 자신의 여동생임을 알고 난 이후로, 세상 모든 남자를 공연히 의심하게 된 카셀의 눈빛에 떨떠름한 기색이 담겼다.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실라스는 당연히 의아해했다.

“…카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닙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조만간 의논하겠습니다.”

“알겠네. 카셀 경, 나는 그대의 노고와 헌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카셀은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서기 전에 희미한 미소를 남겼다.

“저 또한 황태자 전하를 섬길 수 있어 영광입니다.”

홀로 집무실에 남은 실라스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겹겹이 싸였던 비밀이 단번에 툭- 풀려 나간 순간이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두 가문의 반목이 왜 일어났는지는 마침내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러나 성녀는 왜?

덜 풀린 비밀의 실마리를 잡게 되면, 또 무엇이 나올지.

그로선 아직 알 수 없었다.

* * *

마탑의 마법사, 모건 르 페이는 태어난 이래 가장 신중한 표정으로 마법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 위에서 타닥거리던 노란 빛이 일순간 붉게 타올랐다.

“플레어… 버스트!”

펑!

작지만 붉고 둥그런 구체가 휙 날아가더니, 멈춘 자리에서 한 가닥의 연기도 없이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불꽃의 깔끔한 소멸을 확인한 페이는 폴짝 뛰었다.

“됐어! 성공했다!”

“뿌삐삐삐!”

그녀의 마법 구현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모모도 날개를 파닥거리며 축하해 줬다.

“…잘했어.”

구석에서 구경하고 있던 루키우스도 피식 웃으면서 축하해 주었다.

조그마한 불 마법을 성공하고 잔뜩 고무된 페이는 워터 스페셜리스트의 길을 섣불리 선택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3서클의 불 마법, 그래도 내가 못하던 걸 드디어 해내서 정말 기쁜걸.

그녀는 방금 플레어 버스트를 폭발시킨 지점을 스윽 보며 말했다.

“잘하는 걸 잘해야 하는데 못하는 거를 포기한다는 게 은근히 어려웠어요.”

루키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포기도 용기라지만 오기로 성공하는 것도 능력이지. 노력은 잔뜩 해 놓고 시간만 날린다면 더 화나겠지만 말이야.”

“그런가요?”

손에 감도는 마나를 없앤 페이는 마탑의 창 너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곳에는, 새싹이 제법 자라나 무성해진 기원의 숲이 보였다. 내내 마음에 걸리던 성취를 이뤘으니, 이제는 미뤄 둔 일을 해결해야 할 차례였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루키우스, 같이 약초 캐러 가지 않을래요? 모모는 혼자 자게 놔두고요.”

“뿌삐잇!”

루키우스 없는 휴식 시간이 생긴다는 말에 신난 모모. 그와는 반대로, 루키우스의 흑안에는 깊은 빛이 감돌았다.

“…기원의 숲인가?”

“네.”

“그래. 가자.”

그들은 일어서서 조용히 마탑을 빠져나왔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거의 나란히 걸었는데, 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페이의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나오면, 한참 후에 루키우스의 눈빛이 깊어지는 정도였다.

봄날에 내리쬐는 태양의 따사로움도 지금의 그들에겐 느껴지지 않았다.

기원의 숲 입구에 도착하니, 이전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하얀 꽃이 생생하게 피어나 있었다. 페이는 나무 덩굴에 걸린 꽃잎을 하나 거둬 바구니 안에 넣었다.

“예쁘네….”

무심결에 중얼거린 말에도, 루키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냥 감탄사에 불과한데도 그럴 수밖에 없다.

뒤로 미뤄 뒀을 뿐 언제든지 다가올 수 있는 페이와 작별의 순간. 그게 눈앞으로 바짝 다가오지 않았는가….

루키우스는 페이와의 만남에 있어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그 노력이 앞으로 그가 살아갈 시간 동안 유효할지는 모르지만.

나를 놔두고 돌아서는 그녀의 등을… 날 증오하게 될 아름다운 연둣빛 눈동자를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지금껏 해 온 모든 일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들어가요.”

“그래.”

새싹이 덜 돋은 나뭇가지 위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겨우살이들이 보였다.

기원의 숲에 자생하는 겨우살이는 품질도 약효도 좋아, 둘은 그 근처를 떠나지 않고 채취에 몰두했다.

한동안 손을 놀리던 루키우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괴롭고 힘들어도, 그 스스로 밝혀야만 하는 일이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 가증스럽게 일관할 수는 없지.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페이는 연한 뿌리를 헤집던 나이프를 접고 대꾸했다.

“당신은 바로아 님이죠.”

“…그래, 맞아.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네?”

등을 돌린 채 있던 페이의 눈빛이 의아함을 머금고 이쪽을 쳐다본다.

그를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과거와 앞으로의 나날을 통틀어 그의 심장에 유일하게 새겨질 존재가 빤히 쳐다보고 있지. 그러니 왜 동요되지 않을까? 하지만….

루키우스는 울컥거림을 참은 채로, 어려운 말을 이어 갔다.

“바로아의 존재 자체가 내게 비롯된 건 맞아. 하지만 모든 일이 재구성되기 전까지 내가 일의 전모를 전혀 몰랐다는 맹점이 하나 있어.”

“그게… 무슨 뜻이죠?”

페이는 바구니 위에 나이프를 놓고 일어섰다.

그녀와 함께해서 즐거웠던 시간이여, 안녕히.

루키우스는 페이의 새끼손가락에서 빛나는 흑요석 반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긴 고백을 시작했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이 무사히 보존되고 있는 모든 이유.

페이는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가만히 있었으나,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그런고로 지금 그녀의 바구니 맨 위에는 새로 채취한 흰독말풀이 하얀 수건에 듬뿍 감싸여 있었다.

루키우스의 이야기는, 고백은 마침내 끝이 났다.

이제 페이가 원하는 것을 말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내 앞이라 무심하게 굴려고 있는 힘껏 노력했겠지, 하지만 힘들 거야. 그녀를 고통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나니까.

그냥… 경멸의 눈초리를 한 번만 보내면 돼. 그러면 네가 원하는 뭐든지 다 할게, 페이. 나의 소중한 레이디.

‘흰독말풀을 다 먹는다고 내가 죽진 않겠지만 죽는 시늉이라도 할까. 그걸 먹고 쓰러진 척하고는 페이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거야…. 후우, 모모를 통해 차후에 내 심장을 뽑아서 가져다주라고 할까.’

루키우스의 암울한 생각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내 드래곤 하트를 보면 울어 줄까? 아니면, 보기 싫다고 서랍에 넣어 두고 나가 버릴까. 더럽다면서 길바닥에 버릴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라도 네 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어.

…안 되겠지? 역시, 허무맹랑한 소리겠지.

이젠, 정말로 다 끝났다.

파괴 본능에 취해 이성을 잃고 세상을 멸망시킬 드래곤은 여기에 없지. 그녀가 원하는 즉시 눈앞에서 조용히 사라져 줘야 할 텐데….

페이는 여전히,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내가 그녀였어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끔찍하고 힘든 과거를 견디며 살아오게 한 모든 이유가 눈앞에 있는데.

실질적인, 정말로 못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그만인 녀석이 저놈인데.

‘이게 벌인가? 죽으라고, 사라지라고도 하지 않고 이름조차 불러 주기 싫은 존재로 전락하는 게, 내가 당하는 벌인가? 끔찍하군.’

그도 안다.

페이의 눈앞에서 죽으면, 무심한 척해도 마음 약한 그녀는 루키우스를 평생 잊지 못하겠지.

루키우스는 차라리 그렇게라도 그녀의 심중에 들어서 잊히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바스락-

“……!!”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바닥에 놓인 바구니를 집었다. 야무진 손길로 약초와 독초를 갈무리하고, 그의 앞에서 곧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마지막 인사도 없는 작…별?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루키우스는 끝도 없는 공허함에 시달렸다.

그냥, 이 숲에서 죽어 조용히 묻힐까. 그러면… 그녀는 이 안으로 영영 발걸음조차 하지 않으려나? 못난 내가 마법 연구에 방해하면 안 되는데…!

“루키우스?”

“으, 응?”

그는 자신의 음성이 볼썽사납게 떨림을 알면서도 급하게 되물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야.

손가락 끝까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버려지기 싫어서, 외면당하기 싫어서, 증오보다 더한 무관심 뒤편으로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워서.

나를 봐 줘, 페이.

날 버리지 말아 줘.

“돌아가요.”

돌아가? 어디로? 내가 잠들었던 드리아나 산맥의 레어로? 그곳은…. 거기는….

“어…디로….”

그는 되물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지불식간에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였다.

페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마탑으로요. 빨리 돌아가요, 시간이 늦었어요.”

맙소사! 용서받은 건가? 쓰레기 같은 내가, 오만함 따위에 매몰되어 널 잔인하게 훼손한 나 같은 존재가?

루키우스의 사고 회로는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두 팔은 페이를 힘차게 껴안고 있었고 그 바람에 그녀가 열심히 캔 약초 바구니는 완전히 뒤집혀 풀 위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러나 페이도 루키우스도 그런 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마법이나 약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페이도 루키우스를 꼭 껴안아 주고 있었다.

“…….”

“…….”

부둥켜안은 팔이 떨어진 건 한참 후였고, 그동안 둘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눈시울을 붉힌 채 따스한 체온을 나누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가, 감았다가, 서로의 몸에 이마와 뺨 등을 스스럼없이 기대곤 했다.

숨결이 퍽 더웠다. 누구의 것이라고 구별할 필요도 없이.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전, 그들은 노을이 져 가는 숲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손은 사이좋게 맞잡은 채였다.

그들이 기원의 숲 입구에 도달했을 때, 저녁을 맞은 하얀 꽃 한 송이가 위태롭게 흔들거리더니 꽃잎을 토옥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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