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드러나는 전모
“비밀리에 몇 명을 먼저 보내 불을 지르고 사람을 빼돌린 뒤에 와서 태연하게 범행 현장을 수습했다라. 참으로 대담하기 짝이 없군.”
“물증은 빈약하나 틀림없습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실라스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경계를 소홀히 한 시오넬 영주도 일이 수습되면 책임을 져야겠지. 같은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예우도 하지 않고 영주관 안에 틀어박힌 채 나 몰라라 하다니! 그들이 화재 현장에 가 보기만 했어도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게 아닌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영주가 없는 로지아 국경지대에 있을 때도 내부 사정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도트리샤의 가족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카셀은 시오넬 영주를 딱히 비호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잘한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 잘못이 있어도 긍휼하게 덮어 줄 거 아닌가.
그들이 화적을 잡아 넘겼을 때도, 영주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기사들만 시켜 일을 마무리했다.
황태자는 서랍에서 다른 것을 꺼내어 보고서 위에 탁 놓았다.
“카피아 성녀가 그 일과 관련되었을 확률은 얼마라고 보지?”
“매우 높습니다.”
여동생, 페이와 나눈 대화를 그의 앞에서 모조리 다 말할 수 없는 게 유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매우 높음이 아니라 백 퍼센트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셀은 진실을 숨기는 행위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모시는 실라스라면, 도량이 크고 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는 황태자라면. 훗날 그가 말하지 않은 영역의 비밀을 다 알더라도 왜 그랬냐며 과거의 일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물론이고 페이도 비롯하여 많이 힘들었겠다고 다독여 주겠지.
절대적인 믿음을 주는 주군.
그 대신. 단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었다.
황태자를 사모하는 가짜 공녀와 이어질 일은 절대 없도록 막겠노라고.
“성녀가 황궁으로 곧 오겠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은 탁발을 하면서 제도 주변 곳곳을 돌고 있다고 한다.”
“저도 며칠 전에 들었습니다.”
“그대는 성녀의 방문을 막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나?”
카셀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네. 황궁으로 와서 꼬리를 드러내게 놔두십시오. 그리고… 황태자 전하. 그간 맡기셨던 조사가 약간의 결실을 보였습니다.”
“말해 보게.”
실라스의 말투는 처음과 변함없이 일정했다. 그 누구보다 이유를 빠르게 알고 싶을 텐데도.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랏셀 공녀를 압박해 파혼을 종용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과거, 랏셀 왕국이 건재할 당시 간신배들과 결탁하여 왕국의 힘을 약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고를 듣는 황태자는 평온하지 못했다.
옅은 금안 안에 치솟는 분노를, 카셀은 인지할 수 있었다.
“…고작 그게 이유인가?”
첩자는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존재하며, 끝을 자르기가 쉽지 않다. 여럿의 이해관계가 얽혔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에 다른 나라의 첩자들이, 그 나라의 세력가들과 이득을 위해 손을 잡는 일도 평범하달 수밖에.
“그 이후로 랏셀 왕국은 거의 파산 위기에 내몰려 왕가의 힘으로도 해결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왕국 말기에 제국으로 완전히 흡수된 후, 랏셀 공녀께서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고 나자 그들은 다급해진 겁니다.”
카셀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실라스에게는 환멸의 대상이었다.
“하아.”
“랏셀 공녀께서 평소 고요한 성품이라 하시나 정비가 되고, 차후 황후가 되시면. 제가 조사하여 결과를 얻어 냈듯이 모든 일을 언젠간 아셨겠지요. 그때 오를레앙 공작가를 향해 보복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리하여….”
“미쳤군, 정말.”
실라스의 고개가 깍지를 낀 손 위로 푹 떨어졌다.
보고를 하는 카셀로서도 분노를 금하기 어려웠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남의 나라를 흔들어 놓고, 망국의 왕녀가 시집올 눈치가 보이자 협박을 통해 그것을 막다니.
이번에는 무려 모국의 황태자 혼사와 관련이 있는데!
“이 일에 그들의 책임을 물으려면 과거의 일도 모두 드러내야 합니다.”
카셀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탑에 있을 페이를 떠올렸다.
가엾은 티아나가, 그의 동생이 어떠한 길을 선택하든 그는 믿고 지지하고 기다려 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녀가 클라인 공녀임을 몰라도 그는 알고 있으니까.
나의 하나뿐인 여동생.
내가 너의 행복을 끝까지 책임지마.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들이 먼저 첩자 노릇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해 놓고, 공녀를 종용해 파혼하게 만들어?”
카셀은 실라스의 거센 분노를 십분 이해했다.
그 일들을 조사하며 제도에 없었던 동안 황태자의 평판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느닷없는 파혼 이후로 황실의 권위를 은근히 깎아내리려는 세력이 생겼다는 것만도 기막혔다.
오를레앙 공작가가, 일을 쳐 놓으면 차후 그렇게 되리라는 점을 몰랐을 리도 없다.
감히 황계의 직계손, 황태자의 일까지 건드려?
황실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실라스는 단호하게 물었다.
“이 일에 라파엘 경이 전혀 관계없는 것은 맞나?”
“네. 그는 가문의 동향을 꾸준히 보고 있으며 저와도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만약 가문이 반역에 달하는 죄를 짓는다면 성을 버리고 한 명의 기사 라파엘로 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그 정도인가?”
“제가 보고하는 내용은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라파엘은 눈을 찡긋하며, 마구간의 모리스와 더 친하게 지내 둬야겠다는 농담을 했다. 갈 데가 없으면 마구간 자리라도 빌려야 하니 어쩔 수 없다면서.
“그나마 다행이군.”
카셀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라파엘 오를레앙이 아무리 가볍게 굴어도 그를 진정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카셀도 음, 올리브나무 가지를 꺾어서 살랑살랑 들고 올 때는 못마땅하지만.
“성녀 카피아의 이번 황궁 출타는 오를레앙 공작가 측에서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전에 연락을 주고받은 흔적이 있습니다.”
“심계가 깊어. 나는 이제껏 나의 파혼이 가장 큰 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주신전에서 손수 나서 한 가문을 몰살하고 유골을 바꿔 파묻는 중죄라니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 목적을 버젓이 드러내기 위해 오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 딴에 씨앗을 잔뜩 뿌려 뒀으니 수확의 계절이 왔다고 여겼겠지요.”
카셀은, 성녀가 흉수를 드러내면 그 대가로 자기 목을 스스로 도려내게 만들 심산이었다.
용서할 수 없다. 그동안 저지른 일을 무시하지도, 가만히 살게 놔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군.”
“어찌하시겠습니까?”
실라스는 고개를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가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그들이 공신 가문으로 자리매김한 이래 제국의 오른편 심장이라고는 하나 그 영광을 빛바래게 할 죄를 저질렀다면 응당 책임을 져야지. 그리고 휘안테 후작가와 다툰 이유가 무언지는 알아냈나?”
“네. 그 일도 단서가 잡혔습니다.”
“뭐지?”
“광산입니다.”
“광산…?”
아칸 제국은 금, 은, 동, 철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쓸모 있는 광물과 소금, 꿀 등 주요한 물질에 대해 황실이 모든 권리를 가졌다. 고위 마법을 시전할 때 필요한 마정석도 포함하여.
이제는 사양 산업으로 접어든 주석이나 생활에 꼭 필요치 않은 보석 등에 한해서만 채굴과 후보고가 가능했다.
제국에서도 돈 되는 걸 다 막는 게 아니라, 보석은 고가품이어도 주요한 생활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셀의 입에서 나오는 광산의 채굴 목록에 전자가 나와선 안 되었다.
차라리 희귀한 보석의 채굴권을 갖고 싸웠다고 하면 정상참작이 될 터.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두 가문의 지방 영지는 좁은 부분만 경계가 딱 맞닿아 있습니다.”
“드리아나 산맥의 작은 줄기지.”
“…거기서 금광맥의 흔적이 나왔다고 합니다.”
“하아.”
그리고 나온, 나와서는 안 되는 광석의 이름에 실라스의 고개가 깍지 낀 손 위로 또다시 떨어졌다.
휘안테 후작가도 잘못했지만, 오를레앙 공작가는 공신 가문으로서 제정신이란 말인가?
실라스는 더 화낼 기운도 없는지 나지막이 말했다.
“황실의 권리로, 제국 내 모든 영토의 유효 광물과 마정석과 소금과 꿀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한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확률이 있나?”
“없습니다.”
“카셀, 앉아서 보고하라. 그대도 많이 힘들었겠군.”
실라스의 배려에 가까이 앉은 카셀은 더 기막힌 일을 알려 왔다.
“자신들의 영역 경계에서 금광맥이 나왔다는 사실은, 불행하게도 두 가문이 거의 동시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욕심에 들떠서 보고 의무를 저버리고 광맥을 찾아 경쟁적으로 파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폭탄이 잘못 터져 안에서 일하던 두 가문의 광부들이 큰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실라스의 옅은 금안에 분노가 넘실거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진 않았으나, 화가 안 난 게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두 가문을 역겹게 여기는 눈빛이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카셀은, 황태자가 당장에라도 부절을 집어 두 가문의 수장과 기사들을 잡아들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제야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두 가문은 폭탄 사용은 자제했으나 채굴은 그만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알겠군. 내가 수확제 때 쓴 그 조그마한 폭발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가 뭔지 알겠어. 나는 두 가문이 서로를 반목해 틈을 드러내게 하려 들었는데, 그들은 상대방 측이 다른 것도 아니고 폭탄으로 도발하려 들었다고 생각해 노발대발한 거였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격이었으나, 황태자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영지에선 무력 충돌을 우려하여 겁에 질린 광부들만 독려하고, 제도에서 오히려 싸움을 벌여 엉망진창으로 만든 자들입니다.”
그 순간, 카셀은 실라스의 금안이 폭발하는 줄 알았다.
그래도 그는 황태자가 두렵지 않았다.
“전하….”
실라스는 서늘하게 타오르는 안광을 조금 억누르고 물었다.
“그들이 금광맥을 찾아서 채굴한 금을 어디론가 빼돌렸나? 물건의 시세 등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면 금을 찾지 못한다 한들 피해를 본 주민들에게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역시, 나의 주군.
당장 황군을 풀라는 감정 섞인 명령보다 이성을 우선하시는 분.
“아닙니다. 광산의 폭발 사건 이후로 워낙 살벌하게 대치 중이라 실제로 캐낸 금의 양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아래쪽으로 더 채굴하면 큰 광맥이 나온다는 보고까지 받았는데 폭탄을 사용할 수 없기에 다들 끙끙대고 있다고 합니다.”
실라스는 보고를 받는 이래로 처음, 비웃음을 날렸다.
“제 꾀에 자기들이 넘어간 셈이로군.”
“그동안 캐낸 금은 영지 중앙으로 이동하지 않고 근처에서 엄격하게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