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잔꾀를 부린 결과
랏셀 공녀 쪽이 존재감으로는 훨씬 더 위험하지….
클라인 공작 부인은 부채를 들어 입을 가리려다 그만두고 앉은 채로 들어온 이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보인다.
레이디 모르가나, 마법사 페이의 모습이.
‘흠.’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연핑크빛의 머리칼이었다.
티아나가 그녀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나 사용인들에겐 싫다고 완강하게 말한 핑크 계열의 유치한 색.
그러나, 그 아래에 반짝이는 연둣빛 눈은 제법 어여쁘다.
장신구 하나 없이 깔끔하게 챙겨 입은 하얀색의 밋밋한 드레스도 잘 어울리고.
‘황태자 전하의 수족이니 돈이 없지야 않을 텐데, 여기 자리가 자리인지라 화려하게 안 입은 건가? 눈치가 없진 않군.’
클라인 공작 부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볼 기회가 있었긴 한데, 티아나와 같은 수도원 출신이고 딸이 꺼리는지라 마주칠 만하면 안 갔었지.
일전의 두 가문의 모임에도 저 마법사가 오는지의 여부를 물어서 안 온다길래 갔던 참이었다.
아마 오늘도… 이 자리에 페이가 온다는 소문이 났으면 안 왔을 것이다.
‘독서회하고 이 모임을 골라서 온 건 잘한 일이긴 하네.’
그사이, 살롱의 안내인에게 뭔가를 받아 든 페이는 그것을 가져온 책 사이에 끼워 두고 몸을 돌렸다.
저게 오늘 준다는 그 봄꽃갈피인가?
“클라인 공작 부인, 오늘 오신 손님 모두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어떤 것으로 고르시겠습니까?”
안내인이 다가오자 공작 부인은 물었다.
“저 마법사 손님은 무엇을 받았지?”
“네…? 아, 레이디 모르가나 말씀입니까. 이것입니다.”
안내인이 내민 쟁반 위에는 봄꽃을 생생하게 말려 만든 꽃갈피가 놓여 있었다. 페이는 그중에서도 샛노란, 유채꽃을 고른 모양이었다.
벚꽃이나 모란, 히아신스 따위가 더 예쁜데 어째서 이걸 집었지?
클라인 공작 부인은 눈으로 잠시 갈등하다가, 그냥 똑같은 걸 골랐다.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은 그날의 모임 내내, 거의 몇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체 높은 공작 부인이 왔다고 해서 힐끔거리는 이는 많았으나, 그녀가 썩 나서지 않자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살롱에 모인 이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한 해에 바다를 몇 번씩 건너 동방 대륙과 무역하는 선장도 있고, 지방 영지에서 큰 세력을 얻은 대상인에 명판결을 내린 판사와 유명한 역사책을 쓴 작가.
놀라운 패턴으로 새로운 유행 드레스를 만든 디자이너, 용병 생활을 하다가 마정석을 품은 마수를 잡아 큰 부자가 된 자 등등.
‘지루하군.’
공작 부인에게 있어 그들의 업적이란, 돈과 예의로 충분히 사고도 남는 것들이었다. 제도는 모든 것이 모이는 중심지이니 당연한 이치였다.
당장 처음 듣는 말도, 반년 이내로 어느 모임이나 무도회에서 돌고 돌면 곧 식상해지고도 남겠지?
연이은 모임과 연회로 지친 공작 부인의 눈꺼풀이 나른해지려 할 무렵이었다.
“자, 이곳에 모인 손님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세요. 제 선물입니다.”
톤이 높진 않으나 낭랑하고 맑은 음성을 들은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레이디 모르가나…?’
“이게 뭐죠? 어머나! 하트 모양이네요?”
“이름은 하트올이라고 해요. 옛날엔 다수 지역에 자생했지만 고대 이후로 생육 환경이 달라져서, 현재는 소환 마법으로 만들어 먹기만 가능하죠.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베어 물면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어요.”
페이는 설명을 끝마치고 바구니 안에 든 열매를 하나 집어 먼저 시식했다. 잘 익은 복숭아와 거의 비슷한 색감이 입술 안에 깨물렸다.
그 모습을 본 클라인 공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다.
그래, 많이 먹으렴.
‘뭐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낸 걸까?
그녀로선 기분이 영 이상했다.
하트올 바구니는 돌고 돌아서 그녀에게도 하나 쥐어졌다. 이것을 챙겨 두라고 곁에 막 건네려 할 때였다.
“참으로 훈훈한 공기입니다.”
“누구…? 헛!”
클라인 공작 부인은 자신의 옆에 와 조심스럽게 앉는 이의 음성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실라스 황태자 전하!
“쉿.”
“어… 어찌 오셨습니까.”
변장 중인가?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티아나를 깨워서라도 데려올 것을!
공작 부인은 속으로 가슴을 치며 내내 접어 뒀던 부채를 꺼내 입을 가리고 옆을 슬쩍 훑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황태자는 갈색의 가발을 쓴 채였다. 변장을 위해 소매 끝이 약간 닳은 외투를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 놀라, 서 있었다면 휘청였을 것이다.
“여기선 그저 방랑 기사 글라디스에 불과합니다, 공작 부인.”
“…….”
“맛이 괜찮군요.”
황태자는 페이에게 받은 하트올을 한입 와삭, 깨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소탈하기 그지없어 공작 부인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게 처음이 아닐 거야! 태자 전하께서 변장을 하고 제도 곳곳을 누비셨다니!’
그래도 떨리는 입술은 잘만 열렸다.
“어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대가 제국의 일을 두루 살피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온 제국을 다 유랑하고 다닐 수는 없어도 남의 말을 듣는 거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방랑 기사를 대하는 말투와 편한 생각 그대로를 원할 뿐이지요.”
“아….”
역시, 티아나를 깨워서 데려올 것을.
독서회까지는 넘겼어도 이 자리에 데려왔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날, 달리아 호텔 살롱에 몰래 온 황태자는 자기 부하인 마법사 페이와 인사말조차 섞지 않고, 남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돌아가는 눈치였다.
페이가 황태자의 방문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공작 부인에겐 그게 중요치 않았다.
자신의 딸이 놓쳐 버린 기회가 너무 아쉬웠다.
황태자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한 공녀를 데려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번 에스코트도 중요하지만, 사적으로는 이게 훨씬 더 좋은 조건이었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지. 전하께서도 오를레앙 공작가와 퀘이사 백작가의 모임은 넘기셨는데 내가 무슨 수로 이 자리에 나오심을 알았겠어?’
달리아 호텔 살롱을 나설 때 내리던 봄비는 어느새 그쳤고, 페이의 우산 마법도 회수되어 맑아진 하늘이 보였다.
이왕이면 그 신기한 마법,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진한 아쉬움은, 공작저로 귀환했을 때 늦잠을 자던 공녀가 시가지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언짢음으로 바뀌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기다렸다가 데리고 같이 올걸. 중간에 데려오기라도 했으면 황태자 전하와 최소한 인사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사용인들은 데리고 나갔겠지?”
“네, 마님.”
며칠째 피곤해하더니 내가 나가자마자 외출을 하다니?
뭔가가 자꾸 어긋나는 느낌이다.
“어디로 갔지?”
그녀는 유채꽃을 담은 봄꽃갈피를 테이블 위에 놔두고, 먹지 않고 가져온 마법의 열매를 과일 바구니 위에 얹었다.
“바른 일꾼의 길드에 가셨을 겁니다.”
“또?”
공녀의 행선지가 영 마땅찮았다.
다른 괜찮은 곳, 오늘 같은 날 달리아 호텔 살롱에 혼자 다녀왔대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런데 공녀는 왜 갈 만한 장소를 놔두고 귀족들의 ‘요긴한 심부름’을 해 주는 길드를 다닌단 말인가.
‘더군다나 거기는 암흑 길드와 연결되었다고 소문이 자자한 곳 아닌가.’
티아나가 원하는 의뢰란 별것 아니었다.
제도에 잘 안 풀리는 희귀한 과일이나 제철이 아닌 그러한 것들, 또는 자잘한 장식과 희귀한 문양의 레이스 구하기. 처음의 의뢰와 지금의 수준도 거의 똑같단다.
처음에야 재미 삼아서 그래, 해 보렴. 얼마든지 허락을 해 주었으나 오늘은 심기가 영 불편했다.
크게 나서지 않으면서도 좌중의 주목을 받았던 그 마법사 때문인가?
아니면, 황태자 전하께서 몰래 참석하셨는데 티아나를 데려가지 못해서?
내 가슴이 왜 이렇게 답답할까.
“…가서 모셔 올까요?”
“되었다, 티아나가 돌아오면 바로 목욕할 수 있게 물이나 준비해 두도록 해. 비는 그쳤어도 공기는 차가우니 말이다.”
“네, 마님.”
슬슬 전속 가정교사를 한 명 들여서 일과의 버릇을 좀 잡히게 할까.
공녀로 사는 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때가 되었지?
티아나의 교육을 깊이 생각하던 공작 부인은, 오늘 만난 학자 포셰트가 공녀의 안부는 전혀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교육 부탁을 철회했는데도 기분 나쁜 티도 안 냈었는데. 생각만 하면 그저 한숨뿐인 일들이었다.
남에게 나쁜 말을 듣지 않고, 대화의 소재거리도 못 된다는 게 언제나 좋은 일만은 아니거늘.
메이드를 내보낸 공작 부인은 테이블에 놔둔 봄꽃갈피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깟 것, 귀한 것도 아닌데.
“…….”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으나 쓰레기통으로 선뜻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그것을 집어, 가끔 메모를 정리하는 수첩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과일 바구니 위에 두었던 마법의 열매도 다시 가져왔다.
이름이 뭐라더라, 하트올이었나.
황태자 전하께서도 맛있게 드셨었지.
‘…흥.’
그녀는 신경도 날카로워진 김에 손에 든 과일을 조심히 깨물었다. 한입 먹자마자 달고 시원한 기운이 몰려와 흐려졌던 정신을 맑게 했다.
맛있네.
‘실력이 없는 건 아니로군.’
남들이 무수히 오가는 자리에 갔으면, 드라칸 라이더라고 잔뜩 뽐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지?
이상한 마법 두 가지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하고.
클라인 공작 부인은 하트올을 오래오래 음미하며 남편의 눈이 썩 잘못되지는 않았다고, 자신의 평가를 은근슬쩍 수정했다.
가까워질 마음은 없지만 구태여 미워할 필요는 없는 존재인가 하고 말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속 부하로 들일 정도면 뭐…. 사실, 그런 쪽에서야 보장된 거잖아.’
이성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입안에 남은 하트올의 달고 상큼한 맛이, 오래오래 맴돌았다.
피곤은 어느새 싹 달아나 있었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레이디 모르가나를 떠올리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긴 밤중.
카셀은 황태자 실라스와 독대하고 있었다.
“전하.”
황태자의 얼굴빛은 늘 그렇듯이 온화했다. 잘생겼어도 특유의 적안 때문인지 ‘무섭다’는 평가를 종종 받는 카셀이 닿기 힘든 경지였다.
“카셀, 나는 너를 믿는다.”
“…전하.”
“네가 이 보고서를 올려놓고 추가적인 설명을 하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실라스는 시오넬 영지에 다녀온 후 올렸던 그것을 들어 보였다.
카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옅은 금안에 미약한 분노가 서렸다.
“나는 여태 카리스 자작가라는 가문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변방의 군소 귀족이라 할지라도 무참한 일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어.”
“예, 전하.”
“방화로 추정되는 일에, 유골을 바꿔치기 당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들이 죽었든 납치를 당했든 반드시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깊이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것이 곧 정의입니다.”
보고서 위에 놓인 황태자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대는, 죽은 이들을 묘지에 매장한 수행 사제 일행이 범인과 최소 공모했다고 판단했지?”
“주신전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저희가 머무른 여관 주인의 증언으로는, 평소 수행 사제가 그곳까지 오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