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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소피아 클라인 공작 부인 (66/148)

66화 소피아 클라인 공작 부인

휘안테 후작가가 뭔가를 열지 않는다면 당연히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여는 다과회에 가야 하는 것이고, 퀘이사 백작가의 방문도 나쁘지 않다.

앞의 두 가문보다는 격이 떨어지나 늦여름의 그 사건 정황을 보러 가려면 미리 안면을 익혀 둬야 하니까.

‘내 데뷔탕트 때 인사를 하긴 했는데 하필 모르가나하고 삼남하고 인사를 시켜 주네 마네 해서…. 괘씸한 것들. 구해 주지 말까? 고것들 영지 사정이 망해도 사실 나하고는 상관없잖아.’

“…티아나?”

“아, 네. 혹시 퀘이사 백작가와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여는 모임의 날짜가 서로 겹치나요?”

도트는 눈을 갸륵하게 뜨며 얼른 물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단다. 두 날짜 간에 약간의 간격이 있고 퀘이사 쪽이 먼저란다. 둘 다 가겠니?”

“네.”

클라인 공작 부인은 짧게 답하고 방긋거리는 공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방금, 내가 잘못 보았을까. 어딜 갈지 생각하면서 뭔가 좋지 않은 기억이 났는지, 눈빛이 너무 스산하게 변했는데.

솔직히 너무 싸늘하다 못해 적을 대하는 눈빛이었다.

‘착각이겠지? 으음…. 그레이스 수도원에서 겪은 일 때문에 우리 딸이 사람을 좀 가릴 수도 있잖아. 그게 다 내 잘못인데 누굴 탓하겠어.’

공작 부인의 생각으로는, 공녀가 고른 두 가문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당연히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목가적인 듀란 자작가의 독서회에 가서 교양을 쌓는 방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작위와 영지 규모가 남들보다는 못하나 꾸준히 존경받고, 황궁의 초대장을 계속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또 달리아 호텔 살롱에서 특별히 여는 각계각층의 모임. 그게 당해 연도의 특별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는 귀족이 아닌 유력한 상인을 비롯하여, 공부를 많이 한 평민들도 자격을 갖추어 올 수 있다.

신분이 다르다고 해서 만남을 꺼리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들을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클라인 공작은 늘 공작 부인에게 주지시키곤 했다.

그녀 역시 거기에 대해선 남편의 말에 동조하는 바였다.

다른 가문도 아닌 공작 가문이니까 남의 목소리에 귀를 더 기울여야지. 그런 의미에서 내심 공녀인 딸이 참석했으면 했다.

‘갔으면 좋겠지만, 안 고른 쪽을 억지로 가랄 수는 없겠지. 그럼 나 혼자라도 가 봐야겠네.’

이번 달 말인 27일에 퀘이사 백작가의 다과회가 있고 내달 1일에 오를레앙 공작가의 다과회가 있다.

듀란 자작가의 독서회는 이틀 후인 24일이라 일정이 좀 빠듯하지만 화려한 드레스를 꼭 입지 않아도 되기에 참석해도 괜찮은데.

달리아 호텔 살롱의 모임은 내달 5일.

공작 부인은 일정을 머릿속에 꼼꼼히 담아 두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하면 어떤가, 내 소중한 딸인데.

어떤 대가를 치르든 곱게 키우고 지켜야지.

“우리 딸, 한번 안아 봐도 될까?”

“그럼요.”

공녀의 몸은 무척 따뜻했다.

그 순간,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고 잠시 떤 공작 부인은 손을 들어 공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딜 만져도 튀어나오거나 움푹 들어간 흔적 따위 없고, 매끄럽고 고운 머리. 마차에서 달아나다 부딪혀 기억을 잃은 아픔은 영원히 떠올리지 않기를.

다시는 공녀의 몸 어디서도 억울한 피가 흐르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닷새 후에 같이 외출하자꾸나. 드레스와 리본은 내가 새것으로 준비해 둘 터이니 푹 쉬렴.”

“네, 어머니. 어머니의 안목을 믿어요.”

“알았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요즈음,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을 위해 돈과 시간을 공들여 쓸 때가 가장 행복했다.

내 딸, 내 너를 위해 뭐든지 하마.

* * *

“마님, 비가 옵니다.”

“봄비구나.”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유리창을 연신 두들겼다.

구름도 하늘에 제법 낀지라, 아침 같지 않고 흐릿한 물안개가 잔뜩 고인 공기.

레이디스 메이드는 잠시 망설였다가 말을 붙였다.

“오늘 외출은 취소하시지요. 쉬이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은데 감기에 걸리실까 걱정됩니다.”

“안 돼. 가겠다고 확답을 해 놓고 고작 비에 발길을 돌린단 말이냐?”

클라인 공작 부인은 반문은 했으나 실은 그녀도 몸이 좀 뻐근했다.

듀란 자작가의 독서회만 안 갔을 뿐, 공녀를 대동하고 나머지 두 가문의 모임에 전부 갔다.

그리고 오늘은 5일. 달리아 호텔 살롱의 모임이 열리는 날인데 혼자라도 가야 했다. 귀염둥이 공녀는 푹 쉬게 놔두고 얼른 다녀와야지.

“마님….”

“내가 가겠다고 해서 비가 와도 꼭 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실망시켜서야 되겠나? 우박이 떨어져도 기사의 방패를 머리 위에 지고 약속을 지키러 가는 게 귀족의 법도야. 잔말 말고 마차를 어서 준비하여라.”

그녀는 꽤 위엄 있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티아나는 늦잠을 자게 깨우지 말고 그냥 두고.”

클라인 공작 부인은 마차를 타고 달리아 호텔로 가는 내내 상념에 잠겼다.

그의 남편인 공작은 늘 그렇듯이 무심하고 일에 치중하는 남자다. 티아나를 되찾은 기쁨은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지고, 전과 같은 바쁜 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그나마 티아나에게 쓰는 돈은 아끼지 않는다지만 서운하긴 서운하지.

‘후우, 봄 무도회에서 황태자 전하의 에스코트를 받게 해 준 것도 감사한 일이긴 하지. 한데 그 이후로 쭉 조용하니 마음에 걸리네.’

랏셀 공녀 역시 사교계에 재입성을 하고도 그 뒤로 퍽 조용했다.

그녀가 공녀를 데리고 다닌 두 가지의 모임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고. 그 뒤로 나서지 않을 거면 뭐하러 무리하게 황궁의 무도회에 왔지?

남편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두 아들들도 문제였다.

‘카셀.’

요즘 카셀의 얼굴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녀의 큰아들은 공작저에 전혀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물론, 황궁에 직접 가도 일이 바쁘고 평기사들과 대련 중이라며 만날 일정을 잡기가 어려웠다.

이유가 단지 그뿐일까?

‘왜 저택에 돌아오지 않는 거니, 카셀. 하루도 못 올 정도로 바쁘진 않을 거잖니.’

티아나의 데뷔탕트를 앞두고 막아 세우는 바람에 언성을 너무 높여서 그랬나?

하지만 그것만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었다. 아들의 제안을 꺾으며 흐느꼈던 그날 이후로 카셀과 거리가 부쩍 멀어졌음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부득불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얼굴을 보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녀는 여전히 카셀의 어미고, 카셀 역시 어머니를 문 밖에 세워 둘 만큼 냉정하진 않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만나도, 전처럼 기쁘지가 않았다.

내 아들이 내게 거리를 두다니? 내 딸 때문에….

엄청난 답답함이 그녀를 감쌌다.

마지막으로 본 카셀의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었지. 그리고, 조금 이상한 말을 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라던가?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이라도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라는 둥, 말이 희한했다.

‘지금 네가 내게 그러고 있단다. 왜 모르고 있니?’

카셀의 얼굴을 어렵사리 지운 그녀는 나머지의 소중함을 떠올렸다.

‘모리스.’

둘째 아들은 크로우 기사단의 종자가 되어, 남의 수군거림도 감수하고 일과 단련에 여념이 없다지. 모리스가 살아 나갈 길이 기사가 되는 것뿐이란 건 그녀도 안다.

“차라리 나가라! 나가서 네 뜻대로 살아! 언제까지 가문이 너를 감싸 줄 줄 아느냐!”

‘아아.’

클라인 공작 부인은 마차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 마지막으로 모리스에게 했던 말이 고작 그거였나.

당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연신 짓이겨졌다. 모리스가 잘 되는 게 부모로서 기쁜 일이라고는 해도, 너무 혹독하게 말한 것이 아닌가….

얄궂게도 모리스의 가출 역시 티아나의 귀환과 관련이 있다.

티아나를 되찾으면, 사람은 많아도 어딘가 쓸쓸했던 공작저가 늘 웃음과 활기로 가득할 줄 알았다.

때마침 카셀도 변방에서 돌아오고, 모리스도 형이 있어 전보다 덜 엇나가고 있었는데. 그 좋은 기회를 그녀가 너무 성급하게 날려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조금 더 신중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애써 아픈 기억을 접어 뒀다.

‘후우, 이번 모임에 가면 예의범절에 밝지 않은 평민들도 있겠지. 그들이 거슬리게 행동해도 함부로 지적하지 말고 다 받아 줘야겠어.’

마차의 창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치면 무지개가 뜰까.

피곤에 겨우 잠깐 잠들었던 공작 부인이 눈을 떴을 때는, 달리아 호텔의 문 앞이었다.

“마님, 내리셔요.”

마차 문이 열리고 무심코 발을 내디딘 공작 부인은 살짝 놀랐다.

마부는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빗소리는 여전했다.

‘무슨 짓이지? 이 내가 비에 홀딱 젖게 두려는 속셈인가?’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조금도 젖지 않았다.

하늘에서 쉬지 않고 떨어지는 봄비는 호텔 문이 아닌, 한참 옆으로 굴러서 떨어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클라인 공작 부인. 오늘 초청받은 손님 중 한 분이 비가 심하다며, 마법으로 큰 파라솔을 만들어서 우산 없이도 곧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바깥에 나와 있던 호텔 지배인이 정중하게 설명했다.

“오, 그랬나?”

슬쩍 눈을 들어 보니,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우중충한 천막 같은 색감 대신, 투명한 유리와도 같은 마법 막에 꽃과 새와 사슴과 어린 나무 등의 수채화 그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봄비가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데, 비가 그림을 맞출 때마다 흐릿한 색감이 더욱 선명하게 톡, 톡 바뀌었다.

신기하군. 이런 마법도 있었나? 역시 오길 잘했어.

“드시지요, 마님.”

“그래.”

모임이 열리기로 한 살롱 내부의 공기는 훈훈했다. 안으로 들어간 공작 부인은 익숙한 얼굴을 조우했다.

“포셰트 학자 아닙니까, 오랜만이로군요.”

“오, 공작 부인. 반갑습니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학자는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그대도 여기에 오는 줄은 몰랐군요.”

“하하, 실은 얼마 전 듀란 자작가의 독서회에 갔었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레이디 모르가나를 만났지 뭡니까? 말도 잘하고 책도 제법 읽었더군요.”

레이디 모르가나?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그녀가 이 모임에도 온다길래 부리나케 초청장을 추가로 달라고 해서 온 길이지요.”

익숙지 않은 이름을 겨우 떠올린 공작 부인은, 그게 티아나의 수도원 동기인 마법사 페이란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평소 같으면 발끈했겠으나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도 그렇고, 마차 안에서 마음을 가다듬어 화는 나지 않았다.

“그러셨습니까.”

“호텔 앞에 우산 마법을 펼친 것도 그녀였답니다. 원, 마법을 배운지 일 년도 안 되었다는데 독서회에서 흥미로운 말을 자꾸 하길래 놀랐지요. 하하.”

공작 부인은 포셰트와 가까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학자님의 흥미를 돋울 정도면 제법이겠군요.”

티아나가 그레이스 수도원에서 슬프게 살았다고 해서 발끈했을 뿐, 그 레이디 모르가나에게 실질적인 악감정은 없었다.

황태자의 부하라고 해서 초반에 부각받기야 했으나 그 뒤로 황궁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기미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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