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라파엘 오를레앙의 활약 (2)
보통 뇌조 사냥은 봄이 오면 황실에서 첫 번째로 여는데, 이때 황족들의 보좌는 두 공작가에서 매년 번갈아 가며 했다.
그 특권을, 라파엘은 오를레앙 공자의 이름으로 슬그머니 가져와 휘안테 후작에게 딜을 걸어 본 것이다.
겨우내 손발이 굳었으니, 활쏘기로 실력을 가려서 이긴 쪽이 황제 및 황태자의 보좌 격으로 가자는 게 어떻냐면서.
두 공작가에서 보좌를 차례로 해먹는 게 관례라, 백 년을 기다려도 가망이 없는 휘안테 측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흥분한 휘안테 후작은 아들들도 제쳐 두고는 자기가 냅다 튀어나와 젊은 기사인 라파엘과 겨뤄 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잘도 걸려드는군.
라파엘은 일부러 쩔쩔매는 시늉을 했다.
“후작께서 너무 흥분하신 것 같아 그럽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셨는데 휴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남자 대 남자로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룬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 나도 소싯적에 기사로서 책무를 다했소! 자, 무르기란 없으니 어서 시작합시다.”
“그렇다면 할 수 없겠습니다….”
이곳은 황실 사냥터 입구의 공터.
간단하게, 과녁을 두고 화살 열 대를 쏘아 이기는 자가 올해 뇌조 사냥의 보좌를 도맡기로 했다.
승부에 이견이 없도록 입회인은 에솔트 백작가의 사람과 황실 사냥터 관리인, 블루 로즈 기사단의 은퇴한 단원까지 총 세 명이었다.
‘흥, 멀쩡한 이권을 가져와 승부를 걸다니 봄바람이라도 잘못 맞았나? 뭐, 오를레앙 공작가도 끝났군. 후계가 저렇게 도박을 좋아해서야….’
휘안테 후작은 속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됐어. 내 쪽에선 져도 이겨도 손해를 볼 게 없으니까 당연히 해야지!!’
그가 이기면 뇌조 사냥의 보좌는 물론, 라파엘의 궁술이 형편없다는 소문을 낼 수 있다.
지면? 지는 게 뭐 어때서. 현역 기사인 오를레앙 공자에게 졌다고, 휘안테 후작이 얼굴을 깎일 일은 없었다. 후작은 꽤 실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젊고 혈기 왕성한 아들들을 내보내 지면 손해겠지만 그가 지면 타격이 전혀 없지.
‘좋아…! 아이고, 흥분하니 또 머리가 띵하군. 화살 열 대…. 화살 열 대…. 금방 끝낸다.’
휘안테 후작은 기사 시절에 썩 뛰어난 명성을 얻진 못했다.
그저 의장 잘하고, 활쏘기는 제법이긴 한데 기사가 궁수 역할을 맡는 일이 거의 없기에 두각을 드러낼 기회도 똑같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은퇴도 미련 없이 일찍 했다.
저 멍청이 대공자가 내 뛰어난 궁술 실력을 알 리는 없겠지? 암.
그때, 라파엘이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가져와라.”
“예!”
“이것은…?”
활과 화살을 대령하기도 전에, 그는 테이블을 차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와 잔을 가져오게 했다.
안에 든 내용물을 조금 따라서 마신 라파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으으, 뜨거우니 맛이 전보다 더 올라오는군.”
“이게 무어요?”
후작은 바짝 긴장한 채 물었다.
색깔을 보아하니 포션 종류는 아닌 것 같지만, 혹 집중력을 높여 준다든지 하는 약물을 탔을 수도 있지 않은가.
“엣퉤퉤, 그냥 겨루기만 하면 서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진 쪽이 이 주전자에 든 맛없는 물을 전부 마시는 걸로 합시다.”
진짜로 맛이 없는지, 라파엘은 마셔 놓고도 몇 번을 쿨럭거리며 말했다.
‘독인가? 으음, 아니야. 마시는 시늉을 한 게 아니라 정말로 마셨다. 그렇다면 잔에 칠을 해 두는 것으로 장난질을 했을 수도 있겠군.’
휘안테 후작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저 샌님 대공자가 먼저 마신 걸 보면 맛이 나쁘다는 것도 호들갑에 불과할 거다. 좋아! 그쯤이야 하고 말지.’
“흠, 알겠습니다. 다만 나는 익숙한 잔에 따라 마시는 것을 좋아하니 잔은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지요.”
독이 아니야?
라파엘이 다른 잔 사용을 선뜻 수락하는 모습을 보며, 휘안테 후작은 주전자 안의 물이 끔찍하게 맛이 없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피융-
라파엘이 겨눈 활시위에서 마지막 화살이 날아갔다.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큭….”
휘안테 후작은 활을 내려놓은 채로 ‘살짝’ 볼록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보았다.
마음은 팔팔했던 이십 대의 청년 그대로인데 어느새 늙었나…. 아니! 나는 안 늙었어. 오래도록 활을 잡지 않았기에 과녁에 빗맞힌 것이지 노력만 하면 금세 돌아올 것이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부터 단련을 좀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후작이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패배를 인지하고 꽤 우울한 말투로 결과에 승복했다.
“내가 요즘 두통이 좀 있어서 그런지 실력이 떨어졌군. 오를레앙 공자, 그대의 승리요.”
“그 무슨 말씀입니까, 휘안테 후작. 서로 겨룰 기회를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처음 세 발은 완벽하게 중앙에 맞추고, 이후 집중력이 좀 떨어졌는지 점수를 낮게 맞춘 라파엘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오를레앙 공작가.
위엣 놈들, 아랫놈들 할 것 없이 다 썩은 놈들이지만 과연 고귀하기로 소문난 오를레앙 공자라는 건가.
하지만 이놈도 공작이 되고 나면 제 아버지와 똑같아지겠지? 이놈만 예외라면 참 좋겠지만, 핏줄의 공식이 어디 가겠나.
어차피 다 똑같은 놈들이다.
후작은 쓰라린 패배에도 불구하고 귀족답게 손을 맞잡으며 겸허히 답했다.
“고맙소.”
“그럼 이제 벌칙… 흠흠, 마음을 가다듬는 좋은 풀차를 마실 시간이로군요.”
“풀차…?”
세상에 꽃차, 고급 차, 커피, 황금 차, 꿀차, 핫초코렛 등등 좋은 말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뭐? 풀차라고?
길가에 있는 쓰디쓴 잡초를 일부러 캐다가 물을 우렸다는 소린가?! 어쩐지 아까 마실 때 맛없다고 투덜대더니….
역시 오를레앙 놈들이란! 독 아닌 독을 타 와서 나를 농락하려 들었어!
라파엘은 그새 상당히 식은 차(?)를 컵에 따라 또 마셔 보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나마 식어서 아까보다는 좀 낫군. 떫은맛은 여전하지만…. 으윽.”
“…그걸 다 마시는 게 조건이었지. 후우.”
“후작 각하!”
휘안테 후작을 따라온 기사가 급히 다가와 말리려고 했으나, 그는 하인이 든 컵을 쟁반에서 받아 들었다.
남자는 갈 때 가야 멋진 법이다.
패배를 깨끗이 승복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남자의 책무!
“사나이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꿀꺽…. 으읍! 웩! 크윽!”
후작이 끔찍한 맛에 쿨럭이면서도 잔 안의 미지근한 물을 마시자, 라파엘의 선한 눈동자가 일렁였다.
“과연 명망 높은 휘안테 후작입니다. 그럼, 저도 한 잔 마셔서 양을 줄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웁! 윽! 크… 우욱, 안 돼, 뱉지 말고 다 마셔야 해…!”
“읍! 우욱!”
입덧을 방불케 하는 차인지, 풀 우린 물인지를 마시는 묘한 ‘번외 겨루기’는 한 시간 남짓이 걸렸다.
어쩐지 사냥터로 올 때보다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휘안테 후작이 마지막 잔을 내려놓고는 중얼거렸다.
“허억…. 이게 활쏘기보다 더 어렵군…. 이토록 쓴맛은 최근 십 년 이내로 맛본 적이 없어….”
“고… 고생하셨습니다. 괜찮다면 내후년에 같은 조건으로 또 겨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휘안테 후작은 맛없는 차를 다 마신 기념으로 분개하며 소리쳤다.
“좋소! 당연히, 당연히 해야지. 내 그때도 친히 나올 것이니 라파엘 경, 그때 약속을 어기지 말고 또 나오도록 하시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우리의 승부는 반드시 재개될 거요!”
“허억…. 좋습니다.”
라파엘은 포트얀 우린 물을 잔뜩 욱여넣은 배 속이 울렁이는 통에, 명치를 부여잡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하여, 라파엘의 희생 아닌 희생으로 휘안테 후작은 일단 건강을 되찾았다.
그간 은근히 느꼈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는데도 후작은 달라진 상황을 얼른 인지하지 못했다.
무려 오를레앙 공작가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데다가 맛없는 풀차 한 주전자 다 마시기를 당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분노가 거셌다.
그는 내년 것도 아닌 내후년 달력을 당장 만들라고 해서 벽에 걸어 뒀다.
“728일…? 얼마 안 남았군. 내 그때까지 예전의 실력을 반드시 되찾고 말 것이다! 뇌조 사냥 보좌의 영광은 우리 가문에! 그 맛탱아리 없는 풀차 마시기는 오를레앙 공자에게!”
그러고는 달력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넘겨 날짜를 세어 보며 분개했다.
“여봐라, 내일 안으로 저택 뒤편에 땅을 고르고 과녁을 가져다 놓아라. 비가 오고 눈이 와도 내 궁술 실력을 되찾고 말 것이다!”
휘안테 후작이 며칠 후, 자신을 괴롭혔던 두통이 사라졌음을 가까스로 인지했을 무렵.
한편, 클라인 공작저의 도트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이때쯤인데…. 후작이 늘 머리가 아프다 아프다 중얼거리다가 귀가 도중 픽 쓰러지는 날 아니었나? 아휴…. 일이 왜 자꾸 꼬이는 거람.”
그녀는 입술을 쭉 내밀고 달력을 손톱으로 두들기다가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휘안테 후작이 길을 가다가 머리에 돌이라도 맞아야 아프려나? 뭐든지 전하고 통 다르게 돌아가니 답답하기 짝이 없네.’
의사가 추천해서, 후작이 늘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약초 주머니의 향을 맡아 보고 이름만 탁 짚어 주면 끝나는 일인데.
도트는 그 상황이 닥치면 ‘이렇게 해야지’라고 머릿속으로 늘 생각해 뒀기에 몸이 달았다. 준비는 다 끝났는데 환자가 발병하지 않다니 이게 말이 되나.
‘왜 그가 쓰러졌다는 말이 안 들리는 거야? 모르가나 고것도 마탑에 콕 박혀서 안 나오는 걸 보면 기억이 없는 게 분명한데.’
다른 건도 아니고 휘안테 후작 일에 조용하니, 그쪽에 대한 의심은 상당 부분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티아나, 자고 있니?”
“아니요!”
때마침 클라인 공작 부인이 공녀의 침실을 찾아왔다.
도트는 어깨를 쭉 펴고 웃음을 지으며 공작 부인을 맞았다.
봄을 맞아, 한층 화사해진 공녀의 침실이 그녀의 눈에 기꺼웠다. 드디어 새 마호가니 가구를 들여놓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하기까지 했다.
“어머니.”
“그래, 요즘은 좀 어떠니? 너만 괜찮다고 하면 슬슬 다음 일정을 잡아 볼까 한단다.”
“당연히 좋죠. 어머니 뜻대로 정해 주셔요.”
공작 부인은 순종적인 공녀의 모습에 흐뭇해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다른 영애들이 유독 좋아하는 핑크색을 영 싫어하는 것조차도 고상하게 보였다.
내 딸이니까 특별한 거지.
“무슨 소리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최근에 퀘이사 백작가에서 다과회와 향수 시향을 곁들인 모임 초대장을 보냈고, 듀란 자작가에서는 독서회를 연다는구나. 휘안테 후작가는 뭣 때문인지 요즘 조용하고 오를레앙 측에선 간단한 다과회 일정만 있단다.”
“네, 어머니.”
“마지막으로 달리아 호텔 살롱에서 봄꽃갈피를 선사하는 각계각층의 모임 초대장을 보냈단다. 어디를 우선으로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겠니?”
“으응…. 네.”
도트는 생각하는 척했지만, 말을 듣자마자 정해 두었다.
‘휘안테 후작이 아파서 뭔가를 못 여는 건가? 그럼 때가 되었다는 징조가 맞네. 그 사람은 아파도 황궁에 꾸역꾸역 나올 테니까 눈치 봐서 얼른 끼어들어야겠어. 그럼 그동안 갈 만한 데를 추려 볼까?’
그것도 사실 굳이 따져 볼 필요는 없었다.
이 모임 중에 갈 곳이란 기껏해야 두 군데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