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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라파엘 오를레앙의 활약 (1) (64/148)

64화 라파엘 오를레앙의 활약 (1)

“오라버니….”

그의 담백한 소회가 페이의 심금을 울렸다.

카셀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자. 편하게 쉬자꾸나. 내가 갓난아기인 너를 재워 준 적이 없는데 오늘 하게 되어서 기쁘다.”

“…알겠어요.”

카셀의 손에 이끌린 페이는 조용한 침실로 들어와 겉옷만 벗고 누웠다.

편안하다…. 정말.

이런 기분은 오래간만이야.

그가 말했던 하얀 뭉게구름이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긋하고 포근한 기분. 한적한 야외로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흐응….”

페이는 거의 5분도 되지 않아 가벼운 숨소리와 함께 잠들었다.

잠든 여동생의 이마를 쓸어 주는 카셀의 얼굴엔 감격과 안쓰러움, 약간의 기쁨이 맴돌고 있었다.

드디어 너를 되찾았다. 티아나야, 나의 티아나야…. 내 다시는 너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꼭 지켜 주마.

클라인 대공자의 체면? 권위? 부귀영화? 그딴 것 다 필요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의 복수를 반드시 이루어 주마.

그들을 불구덩이 속에 던지지 않고는 나는 절대로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그는 페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뺨을 시트에 기댄 채 한없이 바라보았다.

가엾고 사랑스러운 내 여동생.

그러다가 그도 잠이 살포시 들었다.

가슴속에 잔뜩 서렸던 분노는 어느새, 꿈결 속에서 스러졌다.

꿈에서 어린 티아나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둘은 봄의 들판에서, 덜 자란 소녀와 기사단 입부를 앞둔 소년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뛰어노는 꿈을 꾸었다.

“카셀 오라버니!”

“티아나. 기사가 되어서 빨리 돌아올게. 너는 블루 로즈 기사단하고 크로우 기사단 중 어디가 좋으니?”

어린 티아나는 방방 뛰었다.

“오라버니가 들어가는 기사단이요!”

“하하, 그렇구나.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어. 어디에 들어가든 네 손수건을 꼭 받고 서임을 하겠다.”

“네에!”

무척 행복했다.

그 꿈에서 도저히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 * *

페이를 마탑까지 배웅한 후, 카셀은 그다지 다급하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휘안테 후작에게 포트얀 우린 물을 어떻게 먹인다?’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현재, 휘안테 후작가와 클라인 공작가의 사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휘안테 측과 오를레앙 측의 다툼이 일어난 후에 약간 소원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휘안테 후작과의 면담을 못 할 정도로 악화되지는 않았다.

시험 삼아 몇 모금 먹어 보았는데, 맛이 역하진 않으나 입맛 까다로운 귀족이 즐겨 마실 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한 컵쯤 다 마시고도 남았지만.

‘후작이… 단것을 좋아하던가?’

그에 대한 정보를 헤집던 카셀의 귀에 반가운 말이 들려왔다.

“…단장님. 크로우 기사단의 라파엘 오를레앙 경이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들어오게 하게.”

라파엘은 그의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클라인 단장, 웬일로 나를 1초 만에 들어오게 해 준 거요? 해가 남쪽에서 떴나?”

“내키지 않는다면 배웅을 해 드리지.”

그는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우정이… 어, 아니오.”

라파엘은 또 나가라고 할까 싶어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면서도 카셀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자 외투에서 예의 그 올리브나무 가지를 꺼내는 시늉을 했다. 철이 일러서 그런지 덜 여문 나뭇잎이 팔랑거리는 꼴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라파엘은 일 년이 지나도 여전히 라파엘이다.

그게 그다운 행태긴 한데…. 왜 이렇게 한숨이 나올까.

“휴우.”

“카셀 경, 그대가 우거지상을 하면 제도의 영애들이 울상을 지을 거요.”

“농담 따위를 하라고 들어오란 것이 아니었소.”

라파엘은 손가락으로 올리브나무 가지를 몇 번 돌려 보다가 슬그머니 테이블에 올려놓고 물음을 던졌다.

“마탑의 페이 양은 잘 있는지 궁금하군. 레이디 모르가나도 되었는데 사교 활동을 언제 본격적으로 할 건지 궁금해서 편지를 한번 보내 볼까 하오.”

카셀은 갑자기, 라파엘이 그의 여동생을 노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했다.

라파엘 오를레앙.

귀족 남성의 혼기는 여자보다 조절이 좀 더 자유로운 편이라곤 하나, 라파엘의 상황은 다르다.

그에겐 형제자매도 없고 가까운 친척 가운데도 남자가 드물지. 그러니 조만간 약혼이든 결혼이든 일을 매듭지어야 할 텐데.

유서 깊은 오를레앙 공작가에는 연애결혼이 심심치 않다는 신기한 유전이 있다.

혹시 라파엘이 자기가 원하는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시기를 늦추고 있는 게 아닌가?

‘라파엘의 부모님도 집안의 끈질긴 반대를 물리치고 연애결혼을 했지. 그 탓인지 공작 부인의 입김이 지금도 강하고…. 흐음, 대놓고 물어볼까.’

카셀은 마음먹고 라파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때는 황실의 가계임을 입증하듯 실라스의 것과 흡사한 금발, 거기에 미남미녀의 정석이라는 푸르고 깊은 눈동자.

허우대도 멀쩡하고 기사로서의 실력도 나쁘진 않으나 그가 여동생 페이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주먹이 꽉 쥐어진다.

라파엘이 딱히 잘못한 건 없는데 그냥 괘씸한 카셀이었다.

“…카셀 경? 눈에 왜 그리 힘이 들어가는 거요?”

“아니오. 내가 페이 양을 자꾸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잘 안 들렸나 보군.”

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으나, 이미 쥐어진 주먹에 힘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만은 막지 못했다.

그의 눈에 연약한, 혈육을 지키려는 본능이었다.

“처음의 친분이 그대와 있었다고 너무 막아 세우는 것 아니오?”

라파엘은 소심하게 투덜대고는 소파에 몸을 멀찍이 기댔다. 정자세로 있지 않은 사람에게 설마 주먹을 날릴까 싶어서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카셀은 지금쯤 말하면 좋겠다 싶어서 운을 뗐다.

“그나저나 라파엘 경.”

“음?”

“그대의 가문이 겉으로는 휘안테 측과 화해했으나, 실제로는 지금도 으르렁대고 있지 않소. 이젠 좀 제대로 풀 때가 된 것 같은데.”

“그게 쉬우려나.”

‘당연히 어렵겠지.’

카셀은 곤란해하는 라파엘의 심리를 뻔히 이해할 수 있었다.

클라인 대공자인 그조차도 부모님과 그의, 또 부모님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노력이야 한다지만 그게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가 아무리 귀한 독자, 아들이라도 가문의 방침을 바꾸는 게 말 한마디로 이뤄진다는 가망은 없는 것이다.

“두 가문의 반목을 중단하라는 건 황명이오. 언제까지 모른 척 일관할 속셈이지? 물밑에서 계속 싸움을 벌이다가 황명을 어긴 일이 발각되면 그때는 처벌을 감수해야 할 터이니, 시간을 더는 끌지 말라는 뜻이오.”

“경에게 다른 묘안이라도 있소?”

“이것이오.”

라파엘이 왔을 때 부관을 불러서 차나 물 따위를 권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카셀은 멀쩡한 얼굴로 포트얀을 우린, 약간 노르스름한 물을 컵에 따라서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헛웃음을 쳤다.

“하하, 블루 로즈 기사단장이 손수 끓인 차를 대접받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우웁!”

즐겁게 컵 안의 내용물을 받아 마시던 라파엘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순간, 카셀은 엄포를 놓았다.

“한 방울도 흘리지 마시오.”

“도… 독이오? 너무 맛이 없는데! 대놓고 독을 타다니 너무하는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컵 안에서 울리는 라파엘의 음성이 상당히 처절했다. 그 정도 맛은 아닌데 엄살이 심하다고 생각한 카셀은 잘 설명했다.

“우리가 요정의 호수에 갔을 때 캤던 그 약초를 우린 물이오.”

“으윽! 어쩐지, 생약초를 씹었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익숙하고 구릿한 향이 난다 싶었어….”

카셀은 피식피식 웃었다.

“유능한 약초꾼 마법사 아가씨의 말로는, 이 물은 꿀이나 설탕을 타지 않고 미지근하게 마셔야 약효가 제대로라더군. 알아들었으면 버리지 말고 다 마시는 편이 건강에 좋지 않겠소?”

라파엘은 컵 안에서 우는소리를 쳐 댔다.

“으… 으으…. 할 수 없지. 페이 양이 정성스럽게 말리고 우려낸 약초 물을 버리면 벌을 받을 터이니…. 으읍…. 꿀꺼억….”

포트얀을 말리는 것도 끓이는 것도 내가 했는데.

카셀은 라파엘이 하는 착각이 마뜩잖았으나, 괜히 말했다가 그가 물을 다 토해 내면 치우기 성가시므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 정도 융통성은 충분한 남자였다.

다 마신 컵을 간신히 내려놓은 라파엘의 얼굴은 우울했다.

“일부러 식사를 안 하고 왔는데 입맛이 뚝 떨어졌소. 식전에 마시면 안 될 끔찍한 물이로군….”

“그대가 다 마실 정도면 휘안테 후작도 먹을 만하겠어.”

“후작이라니?”

카셀은 낮은 음성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포트얀 우린 물을 마시면 휘안테 후작의 병이 나을 것이란 말을 들은 라파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호라, 그런 거였소?”

“음. 혹시 휘안테 후작이 발병하길 원하오?”

그는 무척 활기차게 말했다.

“오를레앙 공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또 황제 폐하와 제국 황실을 받드는 신하된 입장에서 휘안테 후작가와의 화해에 찬성해야 옳은 일이지! 당연히 책임지고 이 엄청난 맛의 약초 물을 후작에게 친절히 먹여 드리겠소.”

아까의 태도와는 그야말로 달랐다.

후작을 위한 약을 받아 든 라파엘은 정말 기뻐 보였다. 그가 눈웃음을 치지 않고 카셀과 진지하게 대화하는 자체가 증거였다.

“라파엘 경.”

“한 컵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으니 한 세 컵 정도, 이틀에 걸쳐서 먹이면 딱 좋겠군.”

눈앞의 기사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카셀은 노파심에 타일렀다.

“휘안테 후작을 묶어 놓고 강제로 먹인다거나 하면 곤란하오. 어디까지나 두 가문이 화해를 한다는 전제조건에서 약도 주는 것이지 독으로 오해하게 만들면 없던 병도 덧날 것이오. 아프기 전에 대뜸 약이라고 줘 봤자 그가 안 먹을 것이 뻔한데, 이해가 다 된 게 맞소?”

“에이, 설마 그러겠소? 내 굉장히 좋은 방법을 떠올렸으니 믿어 주시구려. 그럼, 휘안테 후작의 쾌유를 빌며! 치어스!”

라파엘은 카셀이 챙겨 둔 포트얀 종이봉투를 챙겨 들고는 인사말도 없이 냉큼 나가 버렸다.

카셀은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관에게 말했다.

“들어와서 이 올리브나무 가지를 내다 버리도록.”

“옛.”

“태워도 좋다.”

“…알겠습니다.”

공은 공, 사는 사였다.

며칠 후. 최근 골이 띵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휘안테 후작이 마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친 그의 안색은 퍽 좋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오를레앙 공자.”

“아니….”

라파엘이 후작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고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자,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봄도 오고 날씨가 무척 좋은데 이렇게 보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그럼 어디, 서둘러 자웅을 가려 보지요. 몸풀기는 자택에서 끝내고 온 길입니다.”

“아무래도 승부는 며칠 더 미루는 편이 낫겠습니다.”

라파엘은 그의 인생 최대의 연기를 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후작이 더욱 열을 올렸다.

“무슨! 오를레앙 공자, 내가 그토록 기운이 없어 보이오? 잔말 말고 어서 활과 화살을 가져오게 하시오. 곧 있을 뇌조 사냥의 보좌는 내가 하겠소!”

아칸 황실에선 제도 근처의 늦가을부터 겨울까지의 사냥은 막고, 봄이 되면 금제를 차근차근 풀어 주는 추세였다.

그중에서도 맛 좋고 황실의 사냥터에 주로 출몰하는 뇌조 사냥은 인기가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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