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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만나다 (62/148)

62화 만나다

그녀는, 내가 제도로 온 이후 내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어. 괴로울 때 그녀를 떠올리면 나는 그게 언제든 웃을 수 있었다. 페이 양, 당신이….

그는 복도에 멀거니 서서 생각을 이어 갔다.

‘페이 양이… 나의….’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아니고선 말이 안 돼.’

도트리샤 대신 원래 오기로 내정되었던 에이나 후보.

그야말로 ‘우연히’ 나와 만나 얽히게 된, 귀엽고 겁 많고 용감했던 신기한 소녀.

나는 지금도 내 감정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녀를 이성으로 사랑하지는 않아.

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고, 루키우스가 그녀를 좋아하는 눈치가 보였을 때 몹시 짜증이 났었지.

그건 라파엘 경이 페이를 만나고 싶다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늘어놨을 때와 같은 감정이었단 말이다.

그게 무슨 마음인지는 알지. 페이 양, 당신이…!

카셀은 당장 달려가고픈 마음을 억누르느라 눈을 질끈 감고, 그날은 조용히 돌아갔다.

기다림이 길었다고 해서 최초의 만남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순 없는 노릇이잖나.

그러고는 시종 폴을 통해, 페이와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정식으로 넣었다.

그는 약속 장소로 향하기 전, 페이가 정성스럽게 채취하여 나눠 준 포트얀을 손으로 살짝 쓸어 보았다.

덜 말려져서 그런지, 위에 매달린 노란 꽃도 어여쁘고 쪼글쪼글해진 이파리에도 아직 생기가 남았다. 가장 단단한 뿌리는 갓 캐낸 것처럼 색깔도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언젠가는 수분기를 잃겠지?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완전히 말라비틀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쓸모가 없어져 어디론가 버려지고 잊히겠지.

“사람도 마찬가지다.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다가 더는 울지 않는 순간이 오면….”

너무 늦었을까. 카셀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기를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 사람이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게 아니야. 지독한 아픔에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이 배어든 거겠지. 그때는 모든 게 끝난 뒤다.”

다시는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는데, 그 맹세를 또다시 어기고 말았다.

눈앞에 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시간을 생각하면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야 해. 이 나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 얼마나 위험한 일을 초래했는지 다시 한번 깨닫기 위해서라도.

* * *

‘휴우.’

페이는 하얗고 푸른 바탕의 마법사 복식을 입고 있었다.

카셀과 만남이 있을 때는 늘, 로브를 제외하고 안의 옷은 평범한 것을 입었는데. 오늘은 이것을 꼭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미쥬앙 호텔 앞에 내리면서 사람들이 힐끗거리는 시선도 괜찮았다.

“삐삣!”

“모모, 너 그새 좀 자란 것 같다.”

“삐이이?”

모모는 자기 본체가 얼마나 흉측하게 생겼는지는 안중에도 없이, 몸집이 좀 커졌다고 하자 고개를 갸웃하며 모르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더니 하얀 솜털이 돋은 머리를 흔들면서 귀여운 모습을 과시했다.

“후후.”

“페이 님, 클라인 대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바로 들여보낼까요?”

“네.”

안에 들어와 있던 호텔 직원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그의 도착을 알렸다.

모모와 놀아서 즐거웠던 상념도, 잠시 접어 둬야 할 시간. 따스한 그 아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으면 긴장도 늘 스르르 풀어졌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나의 기사 리온 님과 마법사 페이 양의 만남이 아닌….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과, 모르가나이자 페이로 살았던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이 마주하는 운명의 날.

황태자의 의뢰를 받아 황궁으로 갔을 때와는 천양지차의 심경이었다.

그가 자신을 보면서 어떤 얼굴을 할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왜 빨리 알리지 않았느냐고, 나를 앞에 두고도 끝끝내 말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추궁할지도 몰라.

그는… 어떻게 보면 가짜에게 실컷 농락당한 거잖아.

‘카셀 님이 내 앞에서 대놓고 화를 낸 적이 있던가? 그가 강인한 기사라고는 늘 생각했지만, 두려웠던 순간은 없었어. 그것도 나를 위해 늘 배려했기 때문이겠지?’

“어떡할래.”

카셀의 초대장을 본 루키우스가 어제 물어 왔었다. 그는, 그녀가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늘 선택지를 주려고 했다.

“가야죠. 만나겠어요.”

“그래.”

각오는 끝났다.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방을 지나 한 명의 남자만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이전에 만났을 때, 라파엘과 아스테인과의 즐거웠던 한때가 떠올랐다.

황자의 무거운 책무를 벗어던진 아스테인의 환한 웃음과 라파엘의 장난기, 그런 둘을 견제하면서도 페이의 엉망진창 연주를 모른 척해 주던 카셀.

그날 그들의 앞에 놓였던 찻잔 손잡이에 빚어 놓은 문양과 크림이 듬뿍 든 디저트의 맛까지 다 기억한다.

함께한 시간이 짧았으면 뭐 어때.

그 찬란한 순간이, 다시 와 줄까?

똑같지 않아도 상관없어. 비슷하기만 해도, 난 만족하는걸….

‘나는….’

드디어 그를 마주했다.

카셀은 그녀의 도착을 인지하는 순간 하나의 행동을 즉시 개시했다.

카펫이 빈틈없이 깔린 바닥에, 카셀의 무릎이 꿇렸다. 쿵 하고 세찬 소리가 날 만큼.

긴 기다림의 끝이었다.

그 누구의 명령도 없이 자신의 선택으로 꿇은 카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거기엔 비탄에 젖은, 붉은 달처럼 타오르는 적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페이는 예전처럼 입술을 급히 열어 일어서라는 둥, 구제하는 말을 선뜻 해 주지 않았다.

그가 어떤 말을 꺼낼지 짐작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열어 둔 귀로, 아프고 그리웠던 말이 들려왔다.

“티아나… 티아나니?”

언젠가는 이 순간이 오겠지.

나를 버리고, 가짜 공녀와 재미나게 산 나의 어리석은 가족들이 모든 사실을 알겠지.

그들이… 그때 가서 후회할까?

나를 몰라보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딸이자 여동생으로 끌어안고 산 시간을 지독하게 증오할까?

어쩌면 그들은 도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진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어.

진짜인 나를 도리어 밀어낼 수도 있다고.

그러면 내가 죽음에서 돌아온 뒤에 행해진 이 모든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가을의 쓸쓸한 낙엽처럼 흩어져 사라질 거야.

그것이야말로 도트의 완벽한 승리.

생각만 해도 너무 싫다.

그녀가 수도 없이 상상했던, 암울했던 앞날이 금이 간 거울처럼 쩍 깨졌다.

과거는 반복되지 않는다.

굳게 닫혔던 붉은 입술이 열리고, 작게 헐떡이는 숨결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만월이 뜬 밤처럼 사람의 가슴을 고동치게 만드는 기운이 페이의 주변을 가득히 메웠다.

이 순간 그녀는 미친 여자처럼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어디론가 내달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아….”

주르륵.

울고 있어, 나.

그녀는, 자신이 눈물을 흘릴 만큼 다 흘려 더 나올 눈물은 없다고 여겼다.

낮에는 태연하게 굴어도, 마탑의 밤에 베개를 적신 눈물을 다 합하면 하나의 호수쯤은 넉넉히 이룰 것이다.

그만큼 페이는 지독한 배신감과 환멸에 오래도록 몸부림쳤고, 이젠 과거의 일에 무심해졌다고 여겼다.

지독하게 늦었으나, 끝은 아니었던 아슬아슬한 찰나.

잔뜩 말라비틀어진 고목에, 마지막으로 남은 잎사귀를 타고 맑은 이슬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으흐흐흑….”

“티아나…. 미안하다….”

그녀는 슬픔에 겨워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건 숫제 손이 아니라 끝없는 눈물 속으로 파묻히는 것과도 같은 행위였다.

페이는 선 채로 어깨를 들썩여 흐느끼며 울었고, 무릎을 꿇은 카셀의 적안에서도 회한과 뉘우침의 눈물이 흘렀다.

가장 잘못하지 않은 자들이 아픔에 몸서리치며 울고 있었다.

가장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내게 죄를 빌고 있다.

페이는 울면서도 카셀의 올곧은 마음을 떠올렸고, 머릿속으로는 수천 번을 그를 용서해 주었다.

빨리 말해야 하는데, 나는 괜찮다고, 되었다고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는 거라고는 우는 행위 외에는 없었다.

그만큼 그녀에겐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표출할 기회가 오질 않았었다. 루키우스에게 잠깐 늘어놓은 넋두리로는 충족되지 않는 욕구였다.

페이가 홀로 끌어안고 가라앉히던 감정들이 목구멍 위로 다 튀어 오르는 느낌이다.

가족…? 나와 카셀 님이, 카셀 오라버니가 같은 핏줄이어서 이렇게 느끼는 걸까…?

한동안 울고 난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그 자리에 섰다.

여전히 무릎을 꿇었던 카셀의 눈에 눈물은 그쳤으나,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손만 뻗었다.

“…내가 너를 부축해도 되겠니?”

“…네. 네. 당연히요. 그러셔도 돼요.”

페이는 아직 울고 있었으나 목이 멘 음성으로 그를 겨우 불러낼 수 있었다.

그는 거의 달리듯이 다가와 페이를 껴안았다. 평상시와 달리 뜨거워진 손과 팔이 그녀의 몸을 받치고, 아장거리는 아기를 걸음마시키듯 소파를 향해 조심스레 데려갔다.

그에게 안기는 순간 명치를 아프게 누르는 응어리가 탁 풀려 사라졌다.

슬프다. 오늘 같은 날이 와서.

조금 기쁘다. 오늘 같은 순간을 맞이해서.

실컷 울고 나서 약간의 구원을 받은 페이는 좀 허탈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카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들면 좀 쉬게 해 줄까? 대화는 나중에 천천히 해도 괜찮아.”

태어나자마자 아프던 동생을 주신전으로 보낸 그날부터 기다렸다.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란 그에게 없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왜 안 하셨어요?”

“음?”

그가 되묻는 음성이 무척이나 가깝고 친근하게 들렸다.

“마탑의 친자 감별이요. 실은 저도 해 본 적이 없고 범인의 입으로 직접 들었을 뿐이에요. 정황은 나중에 차차 확인하게 되었고요.”

카셀은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나는 네가 티아나라고 무조건 확신한다. 그리고 네 물건인 실크 로브는 지금 어머니의 수중에 있단다. 빼내 오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저택 내외부의 첩자를 잡아내는 것이 우선이지.”

“…네.”

“너는 그 자리에 그분들을 모셔 놓고 네가 누군지를 밝히기를 원치 않니, 정말?”

울음을 완전히 그친 페이는 루키우스에게 했던 그대로를 말했다.

“저에겐 여러 가지 사정이 있고, 도트의 가면을 벗기는 데는 당연히 찬성이에요. 제 실크 로브를 가져와서 다시금 검증하기만 해도 그 애가 가짜라는 건 알려질 테니까요.”

“…….”

“하지만 제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 제가 공녀라는 사실을 되도록 알리고 싶진 않아요.”

“너에게 상처가 너무 많았구나.”

카셀, 그는 페이가 낭만적으로 생각한 것처럼 대답해 주었다.

왜 진짜 가족을 찾으려 하지 않냐고…. 어째서 진실에서 달아나려 하냐면서, 당장 공작저의 품으로, 날 믿고 안겨서 같이 가자고 노골적으로 추궁하지 않는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도우려고만 할 뿐.

세상에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는 페이의 연핑크빛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 페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왜 이런 색깔로 물들여졌는지 다 말해 버리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

카셀은 페이의 붉어진 눈가를 보며, 새로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도트리샤를 의심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최근의 일은 그 아이가 예언을 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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