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가짜라고?
그가 화를 내거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일은, 역시 페이 양 앞에서뿐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카셀은 뭐가 어떻게 되었든 그 건에 있어서만큼은 목숨을 걸 작정이라, 다시 한번 엄포를 놓았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진심이오.”
“그나마 네 쪽이 조금 닮았군.”
“뭐가…?”
거의 노려보듯 하던 루키우스의 눈빛에 약간의 경탄이 들어찼다.
“네놈 가문의 윗대 핏줄에 샤르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론의 자손이 섞여 있단 말이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별 볼 일 없게 피가 희석된 줄 알았더니 너도 예외로 괜찮군.”
갑자기 하대하는 말투에도 카셀은 노하기는커녕 덤덤했다.
“카론 황제? 음…. 선조들의 초상화를 보면 고대인과 약간 닮은 이들이 나오긴 하지만. 나는 딱히 그런 사항에 대해 궁금하진 않소.”
“그런가?”
루키우스의 눈에 약간의 흥미가 들어찼다.
쓸데없는 전설이나 설화 따위에 관심 갖고 족보까지 사 대는 귀족들과는 역시 다르군, 이놈.
“내 윗대의 핏줄이 황손이든 노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소.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은 나는 아칸 제국의 신하와 공작이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나의 신념도 버리지 않겠다는 뜻이지.”
“욕심이 과하군.”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오. 나는 아주 중요한 물음을 하기 위해 루키우스, 그대와의 만남을 청했소.”
“그럼 뭐가 네 용건이지?”
카셀은 루키우스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서운 의문을 던졌다.
“우리가 시오넬 영지에 가서 풍문으로 들었던 트리샤 카리스 자작 영애의 정체를 물으러 왔소. 그녀가 나의 여동생으로 입적된 클라인 공녀와 동일 인물인가? 그레이스 수도원에서 도트리샤라고 불렸고, 우리 가문으로 올 적에 도로테아란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한 이유도 관련이 있겠지?”
“…….”
“당신은 진실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을 것 같소만.”
루키우스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고고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감탄했다.
‘구제할 수 없을 만큼의 멍청이는 아니로군.’
정답을 놔두고 길을 굽이굽이 돌아오긴 했으나 그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카셀은 그 자신이 티아나의 친오라버니 아닌가. 어렵게 찾은 여동생을, 주신전의 검증까지 마쳤다는 아이의 정체를 덜컥 의심하는 발언을 하기가 쉽지 않지. 인간이라면 응당 그러하다.
루키우스가 입을 꾹 다물고 있대도, 눈빛엔 무언의 긍정이 들어 있었다.
부정하지 않는다. 나의 말도 안 되는 이 추론을. 맙소사…!
자신의 의문이 진짜임을 간파한 카셀은 다급하게 물었다.
“페이 양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 그녀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혹시…!”
“그만.”
루키우스의 ‘그만’에는 인간이 저항하기 힘든 억제력이 다분했다.
본체로 돌아가지 않아도 다분히 쓸 수 있는 용언.
카셀은 어지간한 기사답게 약간의 저항을 하려 했으나, 인간의 무력한 본능은 그를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굳게 다물게 했다.
루키우스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 모습은 오래도록 웅크린 드래곤이 발톱으로 땅을 확 치는 것처럼 광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
“…….”
“그리고…. 카셀. 너는 그 우중충한 공작가 사람들 중 그나마 머리가 있는 놈이니 잘 생각해 보도록 하라. 만약 너희가 데리고 있는 공녀가 가짜라고 치자. 한데, 그녀가 이 모든 일을 혼자서 꾸밀 수 있나?”
정말 충격적인 말인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이 말인즉슨 혼자서 벌일 일이 아니라는 뜻인데, 감히 누가!’
“누구에게 의심도 받지 않고, 모든 과정에서 걸림돌 하나 없이 남의 가문 공녀로 자리매김한다는 게 쉽게 되겠냔 말이다.”
실핏줄이 터져 더욱 붉어진 카셀의 적안에 크나큰 혼돈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루키우스의 말이 옳았다.
도트리샤 카리스.
제국의 변방에 살던 평범한 자작 영애.
그녀가 머릿속에 얼마나 세밀한 계획을 짜고 시행하든, 조력자도 없이 이 모든 음모를 성공한다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이 일에 조력자가 한 명이 아닐 가능성도 무척 크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던 카셀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검지 하나가 용언의 억제력을 뚫고 꿈틀거렸다.
이에 감탄한 루키우스는 하나의 힌트를 더 내주었다.
“누군가가 ‘옳기에 시행한다’고 생각한 일이 선인지 악인지 절대적으로 판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체가 바라는 바가 똑같지 않기 때문이지.”
“…….”
“그러니, 과거에는 누군가의 조력자였다가 한순간에 등을 돌리고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남의 뒤꽁무니나 쫓는 삶을 살겠지.”
“나…는….”
“생각하라. 어떠한 행동을 저지르기 전에 무엇이 중요한지, 뭐가 필요한지 철저하게 분석해 봐. 무턱대고 원칙과 정의만 들이미는 자는 성공하기 힘들다. 지금껏 그런 식으로 살았어도 뜻을 다 이뤘던 건 네가 가진 대공자의 신분 때문이겠지.”
루키우스는 눈빛마저도 멍해져 버린 카셀을 놔두고 자리를 완전히 떴다.
그는 그제야, 무형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털썩. 앉았던 소파에서 거의 꿇듯이 주저앉은 카셀은 비밀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역시 함부로 밝혀서는 안 된다는 뜻이로군. 가짜 공녀를 둘러싼 배경과 힘의 관계를 완벽하게 파악하기 전까지….”
말 한마디로, 저 아이가 가짜 공녀라고 폭로해 매듭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조차도 실크 로브를 발견해 가져온 사용인이 첩자라고 의심하는데, 바깥에 엮인 이들은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몇 명이 되었든 전부 용서할 수 없다.
감히…!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클라인 공작가를 노린 음모가 자행된 거지?
엄청난 비탄에 휩싸인 카셀은 이를 악물었다.
“티아나…! 하…. 나는 이제껏, 내가 그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에도 죄악을 가져왔다. 가여운 너를 두고 어떻게 신분을 의심할 수 있지? 이러고도 내가 혈육인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단 말이다!”
카셀은 어렵게 찾은 여동생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늘 탓했다.
그게, 단순한 거부감이 아니었다니.
“내가 떠올린, 너에 대한 모든 의심이 나에겐 끔찍한 죄책감이었어! 너는, 너는… 너무나도 힘들게, 우연의 우연을 거쳐서 간신히 돌아왔으니까.”
어머니께서 널 되찾고 얼마나 기뻐하셨는데.
아버지께서, 내가 존경하는 공작 각하께서 네 데뷔탕트를 위해 얼마나 힘쓰셨는데!
황태자 전하께도 송구하기 그지없었는데!
콰앙.
그는 엎드린 채, 바닥을 주먹으로 거세게 내리쳤다.
“네 정체를 의심하는 것만큼 내게 큰 죄는 없었다. 만약 네가 진짜라면, 나는 평생토록 이 부채감을 안고 너를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고 다짐했지. 그런데…. 네까짓 게 감히 내 동생의 신분을 훔쳐서 들어앉아?! 트리샤란 그 여아는 도대체 어디서 우리 티아나의 실크 로브를…!”
두 주먹을 꽉 쥔 카셀의 머리에 벼락이 쳤다.
‘여기는 마탑이다. 그리고 실크 로브는 어머니의 수중에 있지. 그렇다면…. 그것을 가져와 과거에 가졌던 사람의 현재 이름을 알아봐 달라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실크 로브의 주인은 실크가 옷이 되기 전에도 티아나였으니까!’
이번에는 꼭 찾아낼 것이다.
트리샤, 그보다 더 흔한 이름이든, 너무나도 희귀해서 누구도 모를 이름이든 절대로 놓치지 않겠어.
‘우리 티아나가 죽었든 살았든 반드시 찾아낸다. 그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이야!’
카셀의 헐떡이는 숨결이 견고한 문을 뚫고 바깥의 복도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어떡할래. 진실에 거의 근접한 눈친데?”
루키우스는, 그의 실피드를 몸에 휘감아 기척을 완전히 숨긴 페이에게 물었다. 그녀는 이 대화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권유로.
그녀는 침착하게 물었다.
“루키우스의 생각은 어때요?”
“너와 그 여자, 나 다음으로 회귀 마법의 틈을 뚫고 과거의 기억을 가졌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게 저자야. 조금 더 충격을 주면 슬슬 돌아올 것 같은데.”
페이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역시 남들과 달랐네요. 그렇지만 하필이면, 과거의 제게 아무런 짐도 얹어 주지 않은 사람이 기억을 가질 수 있다니요.”
‘가슴이 아파요.’
그런 말은, 루키우스에게 할 수 없었다.
루키우스가 속내에 품은 말. 그녀에게 할 고백이 무언지 듣기 전에는 말하지 않으리라.
애정을 표현하는 일에 서툰 페이도 조금씩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는 가끔, 페이의 등 돌린 뒷모습과 시선을 거둔 옆얼굴 따위를 조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지.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느냐고 물은 적은 없다.
루키우스의 진심을 다 듣기 전까지, 그런 시시콜콜한 물음은 던지지 않을 거야.
대신 페이는 문을 사이에 둔 카셀의 마음을 안타까이 되짚었다.
카셀, 나의 오라버니. 나는 죽음에서 돌아오고 당신을 만나게 되어 아픔을 구원받았어요. 내게 최초로 손을 내민 사람은 당신인 걸요.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옛 기억은 다 돌아오지 않았어도, 과거와 다르게 행동해서 우연으로 나를 만나 마탑에 데려다주셨잖아요.
나는 지금도 클라인 공작가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역시 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저 혼자 외로움에 몸부림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젠 괜찮아요.
“막을까?”
“…아뇨. 흘러가는 대로 하게 놔두세요. 어차피 이번 외유를 황태자 전하께 낱낱이 고해도 좋다고 했으니 곧 다 알게 될 거예요.”
“그래.”
페이는 그녀의 몸에 휘감긴 실피드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며칠 전, 시오넬 영지에 있을 때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실피드. 루키우스는 바람의 정령과는 친화력이 없는 페이가 실피드와 교감할 수 있게 약간의 마력을 나눠 주었다.
“실피드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 네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질 거야.”
“또, 또요? 루키우스는 왜 자꾸 저한테 과분한 선물을…!”
“난 네가 훌륭한 마법사가 되길 바랄 뿐… 바라고 있어.”
루키우스가 건넨 것은 바람의 마력이 담긴 특별한 반지였다.
그녀의 마법 재능을 가로막았던 루비도, 카셀의 가슴팍에 매달린 사파이어도 아니었다.
루키우스의 흑안보다 약간 연한, 흑요석 반지가 새끼손가락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냥 놔둬도 되는데.”
실피드가 페이의 요청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오자, 루키우스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운디네는 괜찮은데 실피드는 좀. 파인 에코들이 너무 질투해요.”
지금은 넷 중 셋이 수도원 근처로 몰려가서 덜하지. 나중에 일이 다 해결되고 나서 합류하게 되면 더 난리를 피울 것이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만 많아서는.”
“후후, 다음에 또 빌려주면 되잖아요. 전 루키우스의 예감대로 실피드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해요.”
“그래.”
페이가 먼저 자리를 뜨고, 루키우스는 진득하게 기다렸다.
한참 후에, 문이 열렸다.
달칵-
“…아.”
내내 기다린 루키우스를 발견한 카셀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네 여동생은 자신의 일을 밝히는 걸 꺼린다. 네가 진실에 다가가는 일을 막을 생각은 없다지만.”
휙.
필요한 말만을 남기고 돌아서는 루키우스의 등을 보며, 카셀이 떠올린 사람은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