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요정의 호수에서
“저어, 아스. 괜찮다면 제도로 향하는 요 길목에서,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한 군데 짚어 보겠어요?”
“응? 네? 어째서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후, 그냥 돌아가기는 서운하잖아요. 오래는 못 머물러도 중간에 잠깐 내려서 쉬었다가 가요.”
“그렇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이곳이죠.”
아스테인의 손가락이 대번에 한 곳을 가리켰다.
딱 중간쯤에 위치한, 파란 물로 조그맣게 칠해진 지점이었다.
“연못보다는 좀 큰 것 같고, 호수인가요?”
“네. 요정의 호수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옛날에는 엘프들도 가끔 와서 놀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기도 무척 좋고, 옛날엔 근처에 양조장도 있었다고 해요. 지금이야 그 일대에 사람이 없어 비워진 땅이라 더 적막하다고 합니다.”
‘엘프라….’
루키우스의 하이엘프 설을 미약하게 믿는 페이는 그를 힐끗거리려다 말았다.
그와는 동떨어진, 초월적인 존재임을 짐작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루키우스의 정체를 한창 상상할 때는 좀 즐거웠는데.
“모모, 잘 부탁해. 이번엔 단숨에 날아가는 게 아니라 아래에 있는 요 파란 호수에서 쉬었다가 갈 거야. 네 간식은 여관 주인아저씨가 주신 육포란다.”
구어어어-
제도에서 출발하기 전과는 달리 소심하게 울부짖은 모모가 그들을 태우고 높이 날아올랐다.
정오도 되기 전에 요정의 호수 근처에 내려앉은 페이는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여기 정말 예뻐요!”
어제는 좀 진지했던 아스테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잘 왔죠?”
“그럼요! 아스… 후우, 정말 운치를 아는 분이네요. 아스가 없었으면 이런 장소를 평생 모르고 살 뻔했어요.”
덜 걷힌 물안개가 떠도는 요정의 호수엔, 야생의 운디네도 조금 보였다.
그리고 수초와 철이 이르게 핀 꽃들이 반겨 주는 호수의 물은 무척 푸르르고 속이 쉽게 비쳐 보이지 않았다. 그게 호수의 분위기를 더 신비롭게 해 주어, 눈길을 자꾸만 끌었다.
아름다운 장소, 좋은 사람들.
욕심 같아서는 피리를 불어 유니콘까지 불러내고 싶을 정도였다.
루키우스를 제외한 나머지가 보고 경악할 게 뻔하니 어렵사리 참고 있지만.
분위기가 좋으니 어젯밤엔 사라졌던 라파엘의 농담기도 슬슬 올라왔다.
“물이 너무 아름다우면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합니다. 왜, 요정인 척하고 물 아래에 잠든 물귀신이 스윽 올라와서 사람의 발목을 낚아챈다니까요?”
“라파엘.”
“배 좀 띄워 볼까?”
루키우스의 말에, 페이는 어여쁜 연둣빛 눈을 크게 떴다. 그 바람에 루키우스는 자기가 놀이를 제안해 놓고 심장이 덜컥 멎을 뻔했다.
“배를 소환하는 마법도 있어요?”
“…있기야 있는데 여기에 더 좋은 생물이 있잖아.”
“네?”
“모모는 헤엄도 잘 쳐.”
삐이잇!
그새 작은 새로 돌아간 모모는 페이가 준 육포를 한 아름 안고 나무 위로 뽀로록 올라갔다. 그런다고 해서 못 잡을 루키우스는 아니었다.
그는 모모를 숨긴 나무를 살짝 쏘아보았다가, 호숫가에 완벽한 모양의 나룻배 하나를 소환했다. 노까지 안에 얌전히 놓인 배가 신기한 페이가 질문을 던졌다.
“정말 마법이 있네요?”
“소환 마법은 생각보다 까다로워. 그나마 무생물은 좀 낫긴 하지만. 유지 시간과 마력을 잘 조정해야만 쓸 수 있는 거니까 연구 많이 하고 시도해 봐.”
역시 하급 정령인 운디네를 불러내는 일과는 많이 다르구나 싶었다.
“어서 타 보죠. 자, 이쪽으로.”
“마법으로 만든 배라 균형이 지나치게 쏠리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타.”
배를 타고 요정의 호수 전체를 다 돌아볼 수는 없었다. 물결이 스치고 새가 기웃거리는 배의 여흥을 즐긴 그들은 곧 내렸고, 아쉬운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곧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발끝으로 폭신폭신한 풀을 연신 밟던 페이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거기엔 조그맣고 노란 꽃을 삐죽삐죽 매단 풀이 군집하여 자라나 있었다.
“왜?”
“루키우스, 약초학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이거 포트얀 아닌가요?”
“…맞아. 제철이네.”
“캐야겠어요. 이것, 기원의 숲에는 없잖아요.”
짐가방 안에 모종삽까지 야무지게 챙겨 온 그녀는 약초를 조심스럽게 채취했다. 가만히 있던 카셀이 다가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자, 새삼 그의 큰 존재감이 확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이것도 약초의 일종입니까?”
“네. 뿌리만 호숫물에 살짝 씻어서 드릴 테니까 카셀 경께서 가지고 계세요.”
“내가 말입니까?”
싱싱한 포트얀을 꽤 챙긴 페이는 빙긋이 웃었다. 시기상으로, 곧 때가 온다. 이 약초가 어느 누구에게보다 유용하게 쓰일 시기가.
“포트얀은 흔하게 쓰는 약초는 아니에요. 마취나 배탈, 상처를 낫게 하는 효능이 없다 보니 두루 유용하진 않아서요. 대신 혈관을 맑게 해 주는…. 어, 이름은 알려 드렸으니 나중에 천천히 찾아보세요. 아무튼 제철일 때 캐는 게 제일 좋거든요?”
“생으로 먹어도 됩니까?”
페이는 다가와 호기심을 보이는 라파엘에게 깨끗한 한 뿌리를 내밀었다.
“그야 되긴 하는데… 앗.”
“으읍!”
라파엘은 생포트얀을 한꺼번에 입에 욱여넣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파리를 깨무는 순간 몰려오는 시큼한 풋내와 뿌리가 깨물리며 터진 즙액의 맛이란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아스테인은 하나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가 등 뒤로 샥 숨기며 말했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페이 양.”
“으… 으으…. 황자님. 건강에 좋다고 하니 꼭 드십시오. 어찌 이런 것을 신하만 먹는단 말입니까?”
“아하하….”
그녀는 메모지를 꺼내, 포트얀의 효능에 대해 짤막하게 적고 생약초를 갈무리해 카셀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꼼꼼하게 읽은 카셀은 물건들을 소중하게 챙겼다.
“그늘에 잘 말려 두기만 하면 되는군요. 간수해 두겠습니다.”
“따로 가공은 안 한 거라 석 달 이상이 지나면 그냥 버리세요. 오래 내버려 두면 약효가 줄어들어서 큰 쓸모가 없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모모의 등에 올라, 광속의 비행을 거쳐 제도로 돌아왔다.
각기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가고 나서도 짧았던 소풍의 기억은 오래도록 뇌리에 머물렀다.
다가오는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그들이 뜬 맑은 눈이 감기지 않도록.
* * *
귀환 후. 그들의 여정은 대외적으로 드라칸 라이더가 제도 근처를 비행하여 순찰하고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일종의 능력 과시랄까.
따라서 카셀은 시오넬 영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부관의 눈에 절대로 띄지 않게 유의했다.
‘페이 양은 황태자 전하께는 그동안의 일을 빠트리지 않고 다 알려도 괜찮다고 했다. 그녀가 심중에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든 곧 터트린다는 뜻인가?’
“트리샤요?!”
그녀의 놀란 음성을 되짚던 카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페이 양은 도로테아와 같은 수도원 출신이니 내막을 깊이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녀는 일정 부분에선 나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어.’
만약 그가 어렴풋이 떠올린 가설이 진짜라면….
‘하지만…. 그날, 여관 바깥으로 빠져나가 대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루키우스였지. 카리스 자작가의 유골 바꿔치기 사건도, 묘지에 가기 전부터 뭔가를 단단히 짐작한 눈치였다. 다 탄 집이 아니라 묘지부터 덜컥 찾았다는 게 그렇잖은가.’
루키우스, 페이의 능력을 훌쩍 웃돈다는 마법사.
그와 페이는 무언가의 비밀을 은밀하게 공유하는 눈치였다.
내가 아닌 다른 이와 유대감을 나눈다는 게 서운한가?
‘나는 페이 양과 그 마법사와의 관계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다만, 나의 한계를 직감했을 뿐이다. 그래, 그녀는 나보다 루키우스를 더 믿고 있어.’
카셀은 자신과 그 마법사라는 인물의 위치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눈빛만으로도 그녀를 몇 번이고 안심시켜 주었다. 페이 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내던질 수 있노라고 말이지.’
카셀은 다소 냉정한 심장을 가졌기에, 지금껏 그 어떠한 여인에게도 마음의 곁자리를 주지 않았다.
나는 페이 양을 위해 그처럼 뭐든지 버리고 달려갈 수 있나?
덜 쓴 보고서를 놔두고 망연히 선 카셀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내젓지도 않았다.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으로 살 것인지, 기사 카셀로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 때인지 결정할 중요한 시기였다.
수 시간 후, 황태자에게 완성된 보고서를 올린 카셀은 가슴의 기사단 문양에 손을 대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 잠시 이틀, 아니 사흘 정도의 휴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음? 그러게. 멀리까지 다녀왔는데 더 푹 쉬어도 좋지. 자네가 올린 보고서는 천천히 검토해 보고 휴가가 끝났을 때 논의할 사항이 있는지 따로 묻도록 하겠네.”
기품이 흐르는, 그야말로 황족다운 얼굴에 지어지는 부드러운 미소.
실라스의 선한 호의와 신뢰가 여실히 느껴져, 카셀은 마치 그를 배반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안에 든 내용을 보면 황태자가 얼마나 경악할 것인지 아는데도 급히 돌아서는 나 자신이라니.
하지만, 지금 그가 하고픈 일을 당장 실천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카셀은 로지아 국경지대에서 제도로 오던 날 느꼈던 그 불길함이, 자신을 어디론가 마구 떠밀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은 그 예감에 따라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추후에 뵙겠습니다.”
느릿한 걸음으로 황태자궁을 빠져나온 카셀은 말을 타고 즉시 내달렸다.
그도 안다. 카셀이 나가자마자 보고서를 훑었을 황태자는 엄청난 내용을 읽고 나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를 잡아 두지 않고 그냥 보내 준다는 것을.
그게 아칸 제국이 얻은 황태자의 찬란한 위용이었다.
봄의 기운이 완연해져 그런지, 늦여름의 그날과 날씨가 약간 비슷했다.
그의 가슴속을 꽉 메우는 페이를 태우고 마탑으로 가던 그날처럼, 바람을 쐬자 답답함이 조금씩 풀려 나갔다.
그리고 그의 목적지도 마탑이었다.
오늘은 선약이 되어 있었다.
페이가 아닌, 마법사 루키우스와 단독으로 보게 된 마법사의 눈빛은 스틱스의 강물처럼 차디찼다.
“흠.”
페이 앞에서만 원래의 성질을 죽이고 사는 건가?
카셀의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고, 은발의 마법사 루키우스는 팔짱을 낀 채 그의 앞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제도를 호령하는 기사단장에다 클라인 대공자를 어려워하는 기색이란 추호도 없었다.
시오넬 영지로 여행할 때도 지금과 거의 흡사하게 느끼긴 했었지만….
그의 주변을 둘러싼 분위기 자체가 아예 다르군.
루키우스가 7서클 마법사 이상의 비범한 존재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카셀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루키우스.”
“뭐냐?”
그의 이름을 부르자, 시건방지다는 시선이 금세 쏟아졌다.
단순히 그 감정만 담겨 있는 건 아니었다. 루키우스, 저자는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이라는 존재를 노골적으로 업신여기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심한 놈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카셀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기에 마탑으로 친히 왔소. 만약 그대가 페이 양을 두고 슬픔의 눈물이 흐르게 만든다면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마법사와의 결투 경험이 많진 않으나 목숨을 걸고 꼭 완수할 작정이니 유념해 두시오.”
“하!”
다짜고짜 페이를 두고 결투를 운운하는 말에도, 루키우스는 안색을 벌겋게 물들이거나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