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나의 친구들 (59/148)

59화 나의 친구들

“…….”

“자작 내외가 워낙 자식들에게 지극정성인데 원, 귀족가인데 집안에 무슨 마가 끼었는지…. 쯧, 딸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화재까지 당해 한날한시에 다 죽었다니 정말 안되었지요. 만약 딸이 나중에 돌아온다고 해도 집까지 다 타 버리고 어쩐답니까.”

페이는 조용히 물었다.

“그곳은 지금도 방치되었나요?”

“아닙니다. 그 불이 나고 며칠 안 되어서 우리 여관에 거의 십수 명에 이르는 수행 사제 일행이 머물렀습니다.”

느낌이 이상하다.

여관 주인은 계속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분들은 이 근처에 도울 이가 없는지 물어서 환자들도 살뜰히 돌봐 주고, 영주관에도 들렀다가 카리스 자작가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지요.”

“그래서요?”

여관 주인이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불이 난 현장으로 가서 유골을 수습해 돈을 내고 묘지에 매장도 하고, 탄 집의 잔해도 정리해 주었답니다.”

“원래 주기적으로 오시는 분들인가요?”

“아닙니다. 여기가 완전히 변방이라 주신전의 수행 사제들이 여간해선 잘 오지도 않는데 참 대단한 분들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덕분에… 나 같은 일개 장사꾼도 마음의 위로를 받았답니다. 허허.”

“…….”

페이는 무서운 직감에 시달렸다.

갑자기 일어난 불과, 평소엔 잘 오지도 않았다면서 며칠 후 와서 후하게 뒷일을 마무리해 준 수행 사제 일행?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의 돈을 내서 그들의 유골을 묘지에 매장해?

또 주신전이다.

시간의 흐름대로 정리해 볼까?

도트가 시오넬 영지의 일을 알아봐 달라고 의뢰를 넣고, 얼마 후 카리스 자작가가 불에 탔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평상시엔 오지도 않는 수행 사제 일행들이 와서 매장까지 도맡았지, 이곳의 영주가 게을러서 안 하는 일들을 말이야.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모든 정황이 딱딱 들어맞아.

설마….

이번에도 ‘그림자 술사’의 짓일까?

“가 보자.”

책을 덮고 일어난 루키우스의 말에, 페이는 말없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라파엘과 아스테인도 여관에 머무르지 않고 따라왔다.

저벅저벅. 

제법 깔끔하게 단장된 공동묘지에서, 카리스 자작가 사람들이 잠든 무덤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만든 날짜가 최근이라 풀이 거의 없고 흙만 무성한 구역이 네 개. 나머지 하녀의 무덤은 입구 근처에서 미리 보고 온 터였다.

역시 그 수밖에 없나?

의심만으로, 남의 무덤을 삽을 들고 파헤치는 것은 너무한 일이기에 페이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루키우스, 노움이나 다른 땅의 정령을 시켜서 무덤의 관 속에 있는 물체가 어떤 성질인지 알아봐 줄 수 있어요?”

그녀의 이상한 주문에도, 카셀을 비롯한 두 남자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뭔가 사연이 있으리라 익히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래.”

루키우스의 손에서 황토색의 무언가가 슉- 하고 땅 안으로 스미듯이 빨려 들어갔다. 결과는 거의 즉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금방 나왔다.

그의 흑안에는 어느새 절제한 싸늘함이 떠올라 있었다.

“있어야 마땅한 것 대신에 다른 것이 있어.”

페이는 잔뜩 각오하고 들었다.

“…….”

“저 앞에, 하녀의 무덤만 정상이고 여긴 아니야. 불에 탄 사체라면 시커멓거나 그을린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안에 든 건 오래된 백골이다. 뼈도 살갗도 붙어 있지 않은. 관 안을 통째로 비워 두는 것보다는 바꿔치기가 낫다고 생각한 눈치인데?”

페이는 루키우스의 분석을 듣고는 잠시 비틀거릴 뻔했다.

예측이야 어렴풋이 했으나 계획이 생각보다 너무 치밀하다.

도트라면, 가족을 죽여 영원히 입을 막는 길을 택했겠지.

그편이 훨씬 유리하니까.

공인된 클라인 공녀가 가짜이며 자기들의 핏줄임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들.

그들을 죽은 것처럼 꾸미고 구태여 유골을 바꿔 넣어 둘 이유가 있는 사람? 그건…!

‘틀림없어, 성녀 카피아의 짓이야!’

성녀는 황궁에 곧 온댔지.

공녀가 된 도트와 만나게 되면, 언제고 그 일을 약점 삼아 구석으로 몰아세울 거다.

‘그럼, 도트가 용병단에 의뢰를 했을 때 내용을 가로채 한발 앞서 왔다는 추론이 맞구나. 정말…. 용의주도하다고 해야 할지.’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시오넬 영지를 조사해 달라는 내용만 보고, 트리샤 카리스가 도트임을 알아내서 일을 저지른 거야!’

영리하고, 교활하고, 토악질 나오는 음모들.

배후를 짐작한 페이는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제가 확인하고 싶었던 일, 끝났어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쉬고 내일 일찍 돌아가도록 해요. 그리고 시오넬 영지에서 있었던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우리가 이곳으로 왔다는 점도요.”

“알았습니다, 페이 양.”

그 까불기 좋아하는 라파엘도 말을 보태지 않고 가만히 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말을 덧붙였다.

“언젠가는 제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몰라요. 그땐… 여러분께 숨김없이 다 말씀드릴게요.”

아스테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나는 페이 양의 여정에 따라오게 해 주어 무척 기뻤고, 비밀은 꼭 지키겠습니다.”

“하늘에 별이 많이 떴으니 어서 들어가도록 하지요. 여기 계속 있으면 달이 페이 양의 눈동자를 보고, 땅에 떨어진 별인 줄 알고 잡아갈 겁니다.”

라파엘은 분위기를 풀어 주기 위해 어디선가 주워들은 음유시인의 시를 따라 읊었다.

“…고마워요.”

한 귀족 가문의 몰살. 그리고, 당연히 있어야 할 유골의 바꿔치기.

웬만큼 험한 일에 익숙한 자라 할지라도, 아는 순간 놀라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당면한 참상 앞에서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건 물론, 그녀의 울렁이는 속내까지 고려해 주고 있다.

어디 가서 이런 사람들을 또 만나지?

루키우스의 등을 따라 천천히 걷는데 괜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나는, 정말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 내 손에서 놓은 것들이, 잃어버린 게 많은데도 정말 행복해….’

그날, 방으로 하나둘씩 들어가고 페이도 쉬려 할 때 아스테인이 안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아스? 왜 그래요?”

“잠깐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둘은 복도 끝에 있는 좁은 창을 향해 얼굴을 나란히 내밀었다.

아스테인은 꽤 담백하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페이 양. 사실… 나도 알아요. 나는 혼자 할 줄 아는 게 도통 없는 사람이고, 같이 온 이들 중 가장 짐 덩어리란 것 압니다.”

“그렇지 않아요.”

귀족 가운데 쓸데없이 거들먹거리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스테인은 장식용이 아닌, 그 단순한 무늬 하나 없는 실용적인 소검을 차고 왔다.

화적을 잡으러 갈 때 라파엘과 함께 여관에 남으라는 말이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같이 가자며 떼를 쓰지도 않았고.

그의 사고는 황자답지 않게 실용적이었다.

이번 여정이 끝나면 그를 아스라고 부를 날은 좀처럼 없겠지. 만약에 또… 이런 식으로 남들 눈을 완전히 피할 외유가 생긴다면 모를까.

“라파엘이 틈나는 대로 챙겨 주고, 형님이 너그러이 봐준다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겠지요. 난 페이 양이란 존재를 알게 되고 겪은 모든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할 것 같습니다.”

“여정을 너무 제 뜻대로 했는데도 나쁘지 않았나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내게 허락되지 않을 가슴 뛰는 경험, 모험이란 것을 당신은 선뜻 가져다주었거든요. 처음의 만남부터 오늘까지요.”

“아스….”

황자로 태어났는데 꿈이 방랑자, 모험가라니.

“뭔가 어려운 일을 조사하러 온 것 같은데, 사정이 복잡한데도 동행을 기꺼이 허락해 줘 고맙습니다.”

그와 그녀는 서로 고개를 조금씩만 돌리면 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시선은 약속한 것처럼 창밖의 까만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페이는 나직이 말했다.

“아스와 같이 올 수 있어서 좋았어요.”

왜냐하면…. 아스테인 황자님,

당신은 내 우울했던 과거 중에 몇 없었던 좋은 사람이거든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어도, 당신은 변치 않았어요.

라냐 황비님처럼, 라파엘 경처럼, 이전엔 만난 적 없었지만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믿는 카셀 오라버니처럼요….

아스테인, 아스. 저는 당신의 영원한 행운을 빌어요.

당신이 가는 길마다 생생한 네 잎 클로버가 어디든 피어 있기를.

“잘 자요.”

“네.”

짧은 대화를 끝마친 아스테인은 먼저 일어서서 라파엘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페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척하다가 발뒤꿈치를 가볍게 들고 계단 아래로 총총 내려갔다.

주인 내외도 자러 방으로 들어간 늦은 시간.

1층 테이블 구석에, 먼저 내려온 루키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엿듣는 이도 없건만 숨을 죽여 대화했다.

“트리샤는 역시 도트리샤가 맞는 것 같아요. 모든 정황이 시간 순서대로 아귀가 들어맞는 게 수상쩍어요.”

“으음.”

“제도의 용병들이 도트의 의뢰를 받고 시오넬 영지로 진입하기 전, 그들이 선수를 쳐 여기까지 와서 불을 지르고 가족들을 납치한 게 틀림없어요. 수행 사제 일행을 대놓고 보내서 뒷일을 수습한 것까지도요.”

“넌 어떻게 하고 싶어?”

페이는 눈을 들어 루키우스의 시선을 보았다.

여기서, 그에게 모든 걸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는 정말로 해 줄 것이다. 성녀 카피아고 뭐고 단박에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도트의 운명도….

잃어버린 공녀의 자리도 어렵지 않게 되찾아 주겠지. 난 그걸 원하는 걸까?

몇 번을 생각해도 썩 내키지 않는다.

가장 쉬운, 워터 스페셜리스트의 길을 지금도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좀 더 지켜보고 싶어요. 목적이 있어서 당사자 모르게 조력을 했으면, 언젠가는 그 수확을 거둬들이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지.”

“우습죠? 두 사람 다 저를 괴롭게 만든 주범인데 한 사람이 나머지 한 명의- 지금껏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한 공범이 되어 다른 쪽의 목을 조이려 다가오고 있다니요.”

“네 말대로 지금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한쪽에 대한 벌이 되겠네.”

페이는 손을 뻗어 차가워지는 팔꿈치를 각각 감싸 쥐었다.

도트의 고향에 오고 나니 새삼 기막혀졌다.

멀고 먼 길. 약값과 집안의 돈을 탈취했다고는 쳐도 제도 근처까지, 도트는 대체 어떻게 온 걸까?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도 한참이 걸리는 길을 대체….

새삼 도트의 집념이 대단하다 싶었다.

그리고 세상엔 그보다 더 기막힌 사람이 있었다.

“도트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고 치고, 그분은 왜 그랬을까요. 신성의 약화가 그토록… 마음을 비뚤어지게 만든 걸까요? 모르겠어요. 그분은 수세에 몰려 끝을 보더라도 제게 용서를 구하기나 할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요.”

루키우스는 그녀와 같이 일어서기 전에 한마디를 남겼다.

“그전부터 올곧은 마음이 무너지고 있어서 신성도 답하지 않은 걸 거야.”

고작 나흘 정도의 여정이나, 볼일은 다 끝이 났다. 긴가민가했던 일의 경과를 턱밑까지 추격한 지금, 페이는 옅어졌다고 믿은 복수심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여관에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지도를 펴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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