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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찾았다, 나의 바로아 님 (58/148)

58화 찾았다, 나의 바로아 님

“원래 악당들은 이렇게 처리하는 거야.”

그녀를 돌아본 루키우스가 씩 웃었다.

“진짜 나오는데요? 아이스 윈드!”

루키우스와 카셀의 뒤를 따라가며 영창을 끝내 놓은 페이가, 벌컥 열리는 문을 향해 5서클의 냉기 마법을 날렸다.

루키우스의 맑은 미성에, 적들은 방심하고 문으로 줄줄이 튀어나오다가 행동이 일시에 느려졌다. 심지어 활을 든 자도 버벅대는 꼴을 보며 카셀이 앞으로 달려갔다.

“조심해요!”

등 뒤로 날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페이가 걱정할 일도 생겨나지 않았다.

셋의 적절한 합작으로 줄줄이 튀어나오던 일곱 명의 적은 전원 생포되었고, 버려졌던 둘을 합하여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다.

물론 화적을 상대하는 셋 모두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페이의 첫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흠. 죄다 묶여서 제 발로 안 걸어가는 걸 감사하게 여겨라.”

밧줄로 꽁꽁 묶인 놈들은 루키우스가 소환한 나무판자 위에 줄줄이 사탕으로 몸이 접힌 채, 영주관 근처까지 마법으로 빠르게 이송되었다.

이대로 장원에 딸린 감옥까지 끌고 가게 될 터인데, 불쌍하진 않았다.

맨 뒤편에 있던 자가 몸을 꿈틀댔다.

“흐으….”

“이보시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영감은 나이가 오래되어 삭신이 쑤시는 자요. 조금만 더 편한 자세로 가게 해 주시오.”

누군가의 어림없는 탄원에 루키우스가 눈을 부라렸다.

“어디서 우는 소리야? 그 나이 먹을 때까지 남 등쳐먹고 살았으면 끝을 받아들여야지.”

“끝….”

화적떼를 이송하는 나무판자를 멀거니 보던 페이의 시선이, 아프게 신음하던 늙은 화적과 마주쳤다.

두근, 두근.

그자의 눈빛에선 회한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적을 탐색하는 표범과도 같은 섬뜩함만이 느껴졌다.

‘뭐지? 기분이 이상해.’

이자는 이런 상황에 놓이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걸 눈치챈 카셀이 낮게 호통쳤다.

“감히 어딜 노려보는 거지?”

“…….”

“나….”

“음? 왜 그래?”

페이는 자기 입술로 내뱉는 숨결이 무척 뜨거움을 알았다. 평소와 다르게 심장이 미쳐 날뛰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우연인가? 하지만…. 왠지 알 것 같아.

난 저자와 구면이야. 비록, 저자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틀림없어. 나는….

페이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일의 실마리가 무언지 기억하려 애썼다.

유모가 내 눈앞에서 끔찍하게 죽었어. 나는 달아나려다가 넘어져 바닥에 미끄러졌고, 돌에 머리를 거세게 찧었어.

때마침 부서진 마차의 나무 잔해가 날아와 내 몸에 쓸리기도 했지. 머리와 팔꿈치에서 피가 났지만….

어렸던 나는 겁에 질려서 어떻게든 그들과 피 냄새에서 멀어지려고 발버둥을 쳤어.

주인이 사라진 마차를 양껏 뒤지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던 저… 저… 저자!

카셀의 호통에 그자는 턱의 위치를 바꾸어 다른 곳을 보고 있었으나, 그 아래에 자라난 수염은 버젓이 보였다.

그때는, 수염을 더 길게 길렀었어. 벌벌 떨면서 땅을 기어가는 나를 향해 저자가 성큼성큼 다가왔어.

나는 울면서… 울면서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흙을 헤집고 기어갔는데, 그때 누군가가 와서…!

화적과는 다른, 완전히 색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 페이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아.’

“…왜 그래. 괜찮아? 좀 쉬었다가 갈까?”

어지간해선 닿지 않는 손길. 루키우스의 손이, 가늘게 떨던 페이의 어깨에 가볍게 얹혔다.

그녀가 아프거나 무거움을 느끼지 않도록 힘을 뺀 채 닿은 손길.

그것은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치유 마법과도 같았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페이는 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왔었어요….”

“뭐?”

“그때 왔던 사람.”

정말이지, 놀라운 상황이다.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두 번째 범인을 마주한 순간 그를 비로소 떠올리게 되다니.

“페이?”

앞서 걷던 카셀도 그녀의 이상한 중얼거림에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일단 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도로 평온을 되찾은 상태였다.

기억났다, 드디어. 당신이었어.

무서운 일이 닥쳐 너무나도 두려워했던 나를, 공작저에서 보낸 실크 로브를 입은 채 흙과 피로 물들었던 나를 번쩍 안아 올리고 화적떼를 멀리 쫓아 줬던 사람.

“이젠 괜찮아. 안심하렴.”

기력을 잃은 내 귀에 들려왔던 다정하고 온유한 목소리.

난 당신이 수만 명의 사람들 속에 섞였다고 해도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는 내 목에 휘감긴 루비 펜던트를 벗기고, 더러워진 실크 로브까지 벗기고 자기가 입었던 하얀 로브로 공포에 질린 나를 고이 덮어 주었다.

나를 그레이스 수도원까지 데려가는 내내 상냥하게 토닥여 줬던 손길이, 훌쩍거리던 나를 고요히 잠들게 했어.

나는… 그래서, 수도원에 맡겨진 후 당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었어도 끔찍한 악몽에 붙들리지 않았던 거야. 당신의 상냥한 손길이 나의 슬픔을 덮어 주었으니까.

그가 입었던 하얀 로브보다 더 싱그러웠던 얼굴.

그리고… 내가 아는 세상의 그 어떤 빛깔보다 가장 환하고, 시린 달을 품은 듯한 은발.

날 구하러 달려온 당신의 모습은 그랬지. 내가 아는 누군가와 완전히 똑같아.

페이의 목이 꽉 메었다.

바로아 님….

당신이, 루키우스였군요. 내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나의 혼란을 배려하여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주겠다고 한 그 사람이었어.

페이는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루키우스의 생김새를 구태여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선명하게 그려 낼 수 있다.

이젠, 나의 생의 끝이 올 때까지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 축제의 끝에 다가와 모모의 주인이라고 말했던 당신.

때로는 친구처럼, 가장 좋은 책처럼 뭐든 물어보면 대답해 줬던 너.

너무 친해지지 않도록… 선을 그으려고 하다가도 내가 위기에 빠질 것 같으면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너.

루키우스, 바로아 님, 그리고 또…. 당신이 말하지 않은 정체는 무엇일까요.

왜? 왜, 나를 구해 주면서도 그때의 표정은 서글프기 짝이 없었죠? 당신은 내겐 훌륭한 사람이자 스승이었잖아요. 내 앞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기원의 숲 앞에서 말하려 했던 걸까?’

“다 왔군.”

카셀은 작은 주둔지를 둘러싼 돌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끌려온 화적떼들은 눈앞에 죽음 또는 무기징역의 길이 닥쳐오자 끙끙댔다.

“으… 흐어….”

“조용히들 안 해?”

루키우스가 차갑게 호통쳤다.

뭔가 수상쩍은 일이 일어남을 감지한 병사 두엇이 이쪽으로 급히 뛰어왔다. 선두에 있던 카셀이 뭔가를 보여 주자 나머지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이렇게나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걸 오래도록 하지 않았다니.

주둔지 안까지 들어갔다가 온 카셀의 말로는, 그들의 여죄가 충분하고 전원 현상금이 걸려 있다고 했다.

대부분 처형될 거고, 최소한 살아서 햇빛을 볼 일은 없다니까 이 일도 마무리가 된 셈이었다.

페이는 그 화적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어, 마음에 켜켜이 쌓인 응어리를 조금 풀어낼 수 있었다.

그자는 틀림없는 사형이라고 했다.

실은, 숲에서 여기까지 오는 내내 고민했다.

철천지원수인 그를 빼돌려 살려 둬야 하나? 일단 어딘가에 숨겨 뒀다가, 과거의 일을 제 입으로 증명하도록 놔둬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마음은 쉴 새 없이 소용돌이쳤으나, 결론은 시오넬 영지의 법에 완전히 맡기는 쪽으로 기울었다.

마차를 습격한 자들을 성녀가 사주한 것 같진 않다는 추측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다른 건 몰라도 루비 펜던트는 회수했겠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라면 약속을 해 놓고도 슬쩍 훔칠 게 뻔하잖아. 나중에 공작저에 따로 보내 준단 식으로 유모를 구슬리지 않았을까?’

멀고 먼 과거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다.

페이는, 그중 하나를 영구히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당신이 저지른 끔찍한 죄를 오롯이 갚도록 해, 당신의 목숨으로.

이름도 모르는 살인마.

그녀의 인생에 드리웠던 큰 응어리 중 하나가 곧 멀리멀리 떠나가겠지.

페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여관 주인이 제대로 된 말을 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말자. 이 고생을 시켜 놓고 시시한 말이나 내뱉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페이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요.”

그날 저녁, 주둔지까지 가서 일의 경과를 확인하고 온 여관 주인 내외가 그들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모모는 주인아저씨가 서비스로 내준 고기 스프 접시에 코를 박고 있었다.

챱챱챱!

한 일이 없는 모모가 먹는 데는 제일 열심이다.

“이야, 손님들 제 생각대로 역시 대단한 분들이셨군요.”

“사탕발림은 됐고 페이가 궁금해하는 것이 있으면 아는 대로 다 말해.”

긴 의자에 누워 가져온 책을 읽던 루키우스가 투덜댔다.

“알겠습니다. 아직 소문이 덜 퍼졌지만 손님들이 그들을 끝장내 주었으니, 주민들이 무척 고마워할 겁니다. 한 몇 달 뒤에 다시 와 보시지요. 그때는 다들 손에 꽃을 들고 반갑게 환영 인사를 해 줄 겁니다.”

“기회가 되면 그래 볼게요.”

페이는 말로 대충 무마했다.

멀고 먼 시오넬 영지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장담하기는 어려우니 그냥 하는 소리지만.

곧이어 주인아저씨가 지나간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은 바람도 세게 안 불던 날이었습니다. 손님들은 외부인이라 잘 모르겠지만, 우리 시오넬 영지에서는 핏줄로 오래 이어진 귀족 가문은 좀 적은 편입니다.”

“서로가 다 알겠군.”

“예. 카리스 자작가라고 하면 근처에선 다 알지요. 그런데 화마로 인해 그 집안사람들이 하루 안에 싹 다 죽어 버렸다는 겁니다. 같이 살던 하녀 한 명도 죽어 버린 터라 생존자도 없고요.”

“바람도 없었는데 안의 사람들이 일어난 불을 감지하지 못하고 죽은 건가.”

카셀의 어조는 평범했다.

사람의 감각이란, 방심하고 있을 때는 형편없이 나빠진다. 만약 불이 난 시점이 밤이고 모두가 깊게 잠들었다면, 불이 집에 다 옮겨붙기도 전에 질식해 죽는 일은 흔했다.

“예. 아휴…. 그 집이 귀족가여도 전부터 우환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재산은 좀 적어도 아들 둘에 딸 하나인데, 둘째 아들은 다리가 불편해서 늘 절었고 딸은 트리샤라고 꽤 예뻤답니다. 그런데….”

“트리샤요?”

“트리샤…?”

“…….”

카셀과 페이가 동시에 소리쳤다.

트리샤.

도트리샤….

이름이 비슷하잖아?

아직 속단하긴 일러. 하지만 도트가 일부러 조사하라고 한,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시오넬 영지에 있던 자작 딸의 이름과 너무 흡사한 건 수상쩍다.

페이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자, 같이 소리를 지른 카셀의 적안이 그녀를 잠깐 보았다.

말이 끊겼던 여관 주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 뭐. 아무튼 몇 년 전 남매 둘이서 정기적으로 찾는 의사에게 가다가 딸은 실종되고, 둘째는 절벽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가 사흘 만에 겨우 발견되었답니다. 안 그래도 둘째가 다리가 불편했던지라 구조를 요청하기도 힘들었겠지요.”

“주… 죽었나요?”

만약 그 ‘트리샤’가 도트리샤라면.

너, 너, 너…. 도트. 너는 집에서 뛰쳐나오기 전에도 네 가족을 손수 죽이려고 했었던 거야? 진짜로?

“아니요. 숨이야 간신히 붙어 있었는데 그 후로는 건강이 더 나빠져서 거의 자리보전만 했답니다. 여동생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기억을 전혀 못 한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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