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단서를 찾아서
멀찍이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여관 주인이 스윽 다가와선 무거운 자루를 냅다 들어 보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것 많이들 가져오셨구려.”
“아저씨가 적당히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집집마다 돌면서 주면 안 그래도 경계심이 심한데 다들 문 닫고 도망갈 것 같아요. 옥수수야 재배법은 아실 거고 이건 타로 토란이란 거예요.”
“알겠소. 둘 중에 뭐가 됐든 수확량이 많이 나오는 거라면야 좋지. 나도 똑같은 식재료만 가져다가 만들기 지겹소.”
라파엘은 어제와는 달리 잔잔하게 끓는 솥을 보며 물었다.
“주인장. 저것, 어젯밤엔 불을 꺼 둔 게 맞겠지? 안의 내용물도 바꾸고 솥도 씻고?”
“…….”
여관 주인은 수염 밑에 난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는 자루를 가져다가 말없이 옮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부창부수라고, 주인의 아내가 향신료 통을 가져다가 솥 안에 뭔가를 뿌리는 시늉을 했다.
라파엘은 홀로 울부짖었다.
“어… 어째서 내 말엔 다들 대답을 해 주지 않는 거냐고!”
그를 제외한 이들은 배를 잡고 크고 작게 웃어 댔다.
이튿날. 벌써 이곳에 오고 사흘째 아침인데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최소 일주일 정도의 예정을 통보하고 오긴 했으나, 루키우스를 제외하고 나머지 셋은 제도권에서도 귀하신 몸.
‘특히나 황자님의 귀환을 라냐 황비님이 많이 기다리실 텐데.’
카셀과 라파엘이야 신분은 귀해도, 직위가 기사라서 일정이 좀 늦어져도 괜찮다. 그렇지만 아스테인만 바라보는 라냐 황비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일찍 돌아가는 게 아무래도 좋다.
‘무슨 좋은 방법이… 앗.’
시선을 들자, 눈앞에 모래알같이 반짝이는 눈동자가 가득히 들어와 있었다.
아스테인이었다.
“어….”
“페이 양, 뭘 고민해요?”
방금까지 황자님 귀환 걱정을 했거든요, 라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칼 쓰는 법도 열심히 배워서 소검까지 차고 온 사람한테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환상을 와장창 깨트릴 수야 없지.
페이는 아기 취급 혹은 무시당하는 기분을 알기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스.”
아스테인의 이름이 특수한지라 앞의 두 글자만 따서 부르기로 약속했기에, 페이는 망설이다가 한번 불러 봤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배시시 웃다가 용건을 꺼냈다.
“주인아저씨가 종자를 나눠 줬다고 해서 이곳 주민들이 우리에게 당장 마음을 열기는 힘들겠다고 하셨죠?”
“그야… 그렇죠.”
출발할 때 잔뜩 들떴던 철없는 황자님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는 사뭇 진지했다.
“그들에게 뭔가를 들어 보려면 좀 더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겠는데요.”
“아스는 혹시 무슨 생각을 해 뒀나요?”
아스테인의 눈이 싱긋거리더니, 곧 엄청난 말을 뱉었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꽤 오래된 화적 몇몇이 도사리는 소굴이 있다고 합니다.”
“…네?”
루키우스는 수상쩍은 대화가 이어짐을 감지하고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가 페이의 뒤편에 앉아서 노려보거나 말거나, 아스테인은 자기가 알아 온 정보를 열심히 토해 냈다.
“이쯤에 자리를 잡고 산 지 무려 삼십 년 이상이 되었답니다. 현역으로 뛰던 화적이 늙어서 힘에 부칠 만하면 이쪽에 새로 유입된 칼잡이 등을 무리로 보충해서 계속 세력을 유지했다는데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어디서 들었나요?”
여기는 길드도 없고 주민들은 그들을 피해 다니기 바쁜데 누가 말해 줬을까.
“여관 주인아저씨가요!”
아이고, 머리야.
페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화적 어쩌고 하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눈초리가 곱지 않아진 루키우스가 한마디 했다.
“그런 일은 이쪽 영주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 어렵다면 외부 용병이라도 고용해서 처리해야지.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오지도 않았는데 괜히 건드렸다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딱 좋아.”
“루키우스 말이 옳아요, 아스. 해결되길 바라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에 덜컥 개입했다가 뒤처리만 뒤집어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궂은일에 먼저 나서고, 친절한 이웃이 되렴. 남을 돕고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단다.
어른들은 아이를 잘 다루기 위해 이런 말을 교훈이라고 가르치지만, 그 말에 그대로 따르면…. 페이는 쓸쓸하게 웃었다.
옳다고 배웠던 믿음이 부정당한 기분이 어떤 건지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게 낫지 않아?
“…페이 양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겁니까.”
저편에서 나직하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카셀 님…. 주변에 있었나.
페이는 목이 콱 메어 입을 꼭 다물었다.
우울한 과거를 곱씹는대도 이제는 매번 눈물이 핑 돌거나 하진 않지만, 입으로 소리를 내서 말했을 때 안 울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카셀 앞에서라면 감정이 더 요동칠 것 같은데.
그녀의 감정 변화를 눈치챈 루키우스가 일어서서 시야를 가려 주었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나름대로 부드러운 말로 질책했다.
“왜 분위기 축 처지게 그런 걸 묻고 그래.”
“…….”
“화적이라니, 영주 측에서 응당 처리해야 할 일인데 그냥 놔뒀다면 태만이 맞긴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놔둬서 세를 불리고 보충하고까지 마음대로 했다니 믿기 힘든 일이군요.”
페이가 대답을 꺼리자 카셀은 화제를 금세 돌려주긴 했다. 눈에는 그녀에 대한 걱정을 가득 담은 채로.
멀찍이서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장본인, 여관 주인이 다가와 실토했다.
“법으로야 보면 그렇지만 쉽지 않은 일이외다, 손님들. 우리 영지가 제국 변방에 위치한 데다 외인들이 들락거리는 일이 많아 완전 소탕이 어렵소. 그쪽엔 기사가 못해도 두 명은 있지 않소?”
“기사라면 영주관에도 있겠지.”
여관 주인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손님이라고는 그들뿐인데도 진실을 말하는 음성은 더욱 낮아졌다.
“그들은 그야말로 영주관 근처와 국경 주변의, 최소한의 경계에만 골몰하오. 정작 안에 들어온 자들이 뭘 하는지는 관심도 없어! 여럿이서 영지 바깥으로 벗어나 무슨 일을 저지르고, 수상쩍은 짐마차를 가지고 들어와도 나서지 않는단 말이오.”
“영지 바깥을 임의로 나가는데 제제도 안 해요?”
“맞소. 그러니 적당히 상납금이나 뒤에서 받고 입을 다물어 준다는 소문이 돈 것도 이상치 않지.”
짐마차? 그럼, 내륙 안으로 더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고 다닌다는 소리야?
“없애려면 지금이 적기요. 전엔 세력이 훨씬 컸는데 요즘은 어린 친구들을 못 받은 지 오래됐지. 그리고 그놈들이 최근에 일을 또 친 것 같은 눈치란 말이오.”
“어디서 뭘 했는데?”
카셀의 물음에, 주인은 의자를 하나 찾아와 아예 주저앉았다.
“여기서 좀 더 서편으로 가면 카리스 자작가가 있었소. 그리고 얼마 전에 그쪽이 밤사이에 불에 다 탔지. 원, 때마침 여기에 묵었던 수행 사제 일행이 아니었더라면 유골을 수습해 묻어 주는 일도 아무도 안 했을 거라오. 다들 자기 일하기 바빠서 나 몰라라 하니까.”
“…카리스 자작가요?”
귀족 가문이 불 때문에 하루아침에 몰락해?
“음. 듣고 싶소?”
여관 주인은 살아온 세월답게 노련한 자였다.
페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아까 말한 그 화적떼, 끽해 봐야 열 명 안팎이라오. 예전보다 세력이 엄청나게 줄었어! 그들을 소탕하고 오면 내가 아는 것은 숨기지 않고 다 말해 주리다. 뭣보다 그 수행 사제 손님들이 우리 여관에 머물렀으니 나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소.”
“됐어, 그냥 우리끼리 거기에 가 보자.”
루키우스가 서늘한 미소를 입가에 띠자 여관 주인의 손짓이 급해졌다.
“에헤이! 거참, 성격도 급하게. 손님들 딱 봐도 한가락씩 하는 실력자들 같은데 온 김에 그놈들도 같이 처리해 주면 좋지 않습니까.”
여관 주인은 숫제 생떼 아닌 생떼를 부리는 것처럼 말했다.
“오래전이긴 한데 손님들 말마따나 영주관에서 그들에게 현상금도 걸어 놨소. 돈도 벌고 선행도 하고 정보도 얻고 이 얼마나 좋은 일이오?”
“설마 여기에 묵었다던 수행 사제들한테도 이런 식으로 미끼를 던졌다가 실패했나?”
루키우스의 물음에, 여관 주인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 물어는 봤는데 원칙적으로 살생은 자제해야 한다나, 그랬소.”
“…….”
“어떡할래. 네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만 놓고 생각해 봐.”
루키우스가 페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열 명 남짓 혹은 그보다 적은 화적이라…. 내 실력으로 잡을 수 있을까?
페이는 속으로 고민했다.
이제껏 마법 연습은 숱하게 했다. 사람을 상대로 살상 마법을 날리거나 한 적은 없는데 눈앞에 덜컥 다가온 실전이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생포란 게 쉽지 않잖아. 그리고…. 카셀 님이나 루키우스, 라파엘 경에게 기대지 않고 나 혼자 할 마음이 있는지 그것부터 생각해 보자. 으응.’
“…….”
‘뭐지?’
카셀은, 루키우스가 고민하는 페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저자가 마탑의 동료란 사실은 잘 안다.
자세히 말해 주진 않았지만, 페이가 데리고 다니는 드라칸보다 서열에서 우위를 점한 것만은 분명하다.
마법 실력도 7서클 마스터라고 했으니 페이 곁에 있을 때 도움이 되고도 남는 자이긴 한데.
‘왜 페이 양을 저런 눈으로 보고 있지. 설마?’
여자로 보고 있는 건가?
잠잠한 척 위장한 검고 깊은 눈동자는, 페이의 연둣빛 눈동자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끈적하고 음침한 시선은 아니라지만 카셀은 은근히 화가 났다.
그리고 당황했다.
‘왜…. 내가 페이 양의 인간관계를 멋대로 재단하고 화를 내지?’
그는 자신이 페이를 소중히 여기고 있음은 인지한 지 꽤 오래되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은 연정도 아니고, 그저 잘 되기를 바라고 온갖 위험에서 지켜 주고 싶을 뿐이야. 라파엘과의 독대를 막으려 했던 것도 그런 마음의 일환이었지.
루키우스를 잠깐 드래곤으로 착각할 뻔했던 전적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 거만하다는 서술만 수십 차례가 넘는 고대 드래곤이 고작 7서클 마법사로 위장하고 다닐 리가 없다.’
카셀은 거의 진실에 근접했다가 비껴가고 말았다.
‘마력 측정기를 깬 적이 있다는 선대 마탑주라면 또 모르지만. 저 루키우스가 그 루키우스일 리는 없어.’
“음, 할래요.”
그의 상념은 페이의 결심 때문에 깨졌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자 여관 주인의 얼굴은 무척 밝아졌다.
“오오, 손님. 정말입니까?”
“만약 세어 봐서 적이 열 명이 넘으면 저 아저씨를 어떡할 건지는 생각해 봤어?”
너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한 루키우스의 물음에, 페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런 것도 생각해 둬야 하나요?”
“당연하지. 형편없는 돈으로 쉬운 의뢰라고 떠맡겨 놓고, 정작 해결하러 가면 엄청난 녀석들이 득시글대는 도적 소굴이 한둘인 줄 알아?”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루키우스는 그런 일에 당해 본 적 있는 거예요? 언제요?”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