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여관 투숙
시간이 상당히 흐른 후, 시오넬 영지 북부.
“신기하네요. 여기가 제도보다 훨씬 따뜻한 것 같아요.”
그동안 수고한 모모는 페이의 외투 안 주머니에 들어가 드르렁 피유- 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있었다.
말이 다섯이지, 건장한 남자 넷을 한꺼번에 태우고 ‘페이를 배려하여 최대한 부드럽게’ 날아오느라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오늘 고생했으니 깨어났을 즈음엔 맛있는 훈제 고기를 먹여 줄 셈이었다.
“근처부터는 천천히 날아왔는데 경계를 지키는 병사가 한 명도 없다니 놀랍습니다.”
라파엘의 말에, 카셀은 나직이 설명해 주었다.
“순찰을 수시로 도는 건 인근 국경지대나 제도에서 가능한 일이지, 이 넓은 지역을 빠짐없이 둘러보는 것은 어렵다네.”
“어디부터 가면 좋을까요?”
아스테인 황자의 말에, 페이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도 시오넬 영지 북부지만, 모모를 대신한 말을 빌려서 타고 한참 달려가도 시오넬 영지 북부에서 벗어나기 힘든 거리다.
돌아갈 기한이 정해져 있으니 사람 사는 지역마다 무턱대고 다 돌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페이가 나섰다.
“역시 이럴 땐….”
“이럴 땐?”
그녀는 손가락을 콕 세웠다.
“여관이죠. 모험책에서 봤어요. 거기에 투숙한 다른 숙박객들과 친해지고 주인에게도 물어봐서 정보를 취득하는 거예요.”
“방법이 괜찮긴 한데 배운 출처가 영 미덥지 못하네.”
“루키우스!”
썩 나쁜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 과해서 돌아보니, 루키우스는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진심이 아니라 그냥 한 소린가?
출발할 때만 해도 세 남자를 향해 날을 세우더니 그간 좀 부대꼈다고 성격이 너그러워졌나 보다.
“어차피 날도 거의 저물어서 여관은 찾는 게 맞아. 다른 놈들은 길바닥에서 재워도 넌 침대에서 자야지.”
루키우스가 모모를 들들 볶아서, 전속력으로 날아 하루 안에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원래 드라칸의 비행 속도를 고려해도 오는 데 최소한 이틀에서 사흘은 잡아야만 했다. 말을 타고 온다면 짧게는 일주일에서 열흘, 그 이상도 훌쩍 걸린단다.
그의 말마따나 벌써 하늘이 저녁을 지나 밤으로 검게 물들고 있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다들 귀한 분이라고요.”
“넌 너만 신경 쓰라니까.”
“어, 저기 INN이라는 간판이 있는데요?”
아스테인이 눈도 좋게 멀찍이 있는 여관을 찾아냈다.
“다들 출발 전에 말했던 주의사항은 꼭 지켜 주십시오. 단장이니 황자니, 마법이란 단어도 되도록 사용을 자제해 주길 바랍니다. 물론 부득이한 경우엔 마법을 쓰셔도 됩니다.”
카셀이 여관에 진입하기 전에 다짐을 또다시 받아 냈다.
‘신기해.’
제도의 숱한 여관과는 다르게, 경쟁적으로 다른 이름을 간판에 달지도 않고 아스테인의 말대로 INN 자만 딱 남아 있는 곳.
페이는 수도원에서 마탑으로 간 이후, 치안이 좋은 제도 내부에만 거의 다녔기에 이런 장소는 처음이었다.
방까지 잡고 식사를 하겠다며 테이블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는데 라파엘이 벽 쪽에서 펄펄 끓는 뭔가를 보고 물었다.
“설마, 저것이 우리 식사는 아니겠지?”
“당연히 맞습니다, 손님. 솥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백 년을 부어 가며 끓인 전통 스튜입니다.”
스푼과 포크를 먼저 가져다주던 주인장이 슬쩍 운을 뗐다.
“배… 백 년?! 농담이겠지!”
라파엘이 경악하든 말든 주인장은 그를 놀려먹기 바빴다.
“오래 끓일수록 여행자들에게 달라붙은 사악한 기운을 잘 정화해 준답니다. 이 지역의 명물이니 다들 한 그릇씩 드셔야죠?”
“으윽, 난 안 먹겠어.”
“그렇다면 오십 년을 숙성한 반죽으로 구운 빵을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잘 구워지면 빵 위쪽이 움찔움찔하면서 효모가 살아 춤추는 모습이 보인답니다.”
“뭐?”
“운 좋으면 그게 사람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죠. 하하하!”
여관 주인의 아내가 큼지막한 빵 바구니를 테이블 중앙에 턱 놓았다.
“오십 년을 삭힌 반죽이라니! 주인장, 농담이 너무 심하네. 난 안 믿어!”
라파엘은 질색하면서도 동공이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크흡…!”
페이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고 얼굴을 숨겨 키득키득 웃었다.
역시 누가 뭐래도 라파엘 오를레앙은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곱게 자란 공자답다.
자기가 남을 놀리는 걸 좋아해도, 결국 놀림당하는 것도 자신이잖아?
이번 여행이 끝나고, 제도 바깥으로 절대 내돌리지 않고 기사로 쭉 산대도 귀한 도련님다운 성미는 평생 바꾸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것도 라파엘의 매력인걸?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관 주인장의 엄포와는 다르게 음식은 정상적이었다.
다만, 시오넬 영지에선 밀을 재배할 기후와는 거리가 멀어 밀로 만든 빵은 꽤 비싸고 따로 시켜야 했다.
그래도 음식 솜씨가 좋아서 그들은 나온 것을 거의 다 먹어 치울 수 있었다. 쿨쿨 자던 모모도 중간에 깨서 배를 고기로만 듬뿍 채웠다. 루키우스가 꿀밤을 한 대 먹이긴 했지만.
“다들 멀리 오느라 고생했어요. 잘 자요.”
“페이 양, 그대가 드라칸을 훌륭하게 몰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후후, 뭘요.”
“내일 아침에 만나지요. 혹시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면 급히 나오지 말고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페이만 머무르는 독방은 가장 안쪽이었다.
그런 소소한 배려조차 받아 본 적 없는 과거가, 점점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 덕인지 그녀의 깊었던 상처는 분명 나아져 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체크아웃은 미뤄 두고 바깥으로 나와 정보를 수집하려는데 쉽지 않았다.
“주인아저씨 말이 맞았네요. 사람들이 뭔가를 말하기를 너무 꺼려요.”
어제 여관에 머무른 투숙객은 아쉽게도 그들 다섯이 전부였다.
여긴 가끔 두엇 정도 되는 여행객이 왔다 가거나 행상인도 오고 한다는데. 한 이 주 전쯤 꽤 여럿인 무리가 우르르 와서 머무르고 간 뒤엔 대형 손님들이 오진 않았단다.
그리고 여기가 제국 끄트머리라 그런지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제도에도 갑갑한 사람 천지라지만 막상 대하니까 차원이 달라…. 인사도 안 받으려고, 낯선 그들이 다가가려 하면 대놓고 휘적휘적 가 버리다니, 난감했다.
“괜찮습니다, 페이 양. 기운을 내요. 지금까지 잘해 왔지 않습니까?”
“역시 카셀 님은 상냥하세요.”
“…흥.”
루키우스는 라파엘 때와는 다르게 둘의 훈훈한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게 왠지 억울(?)했던 라파엘은 겁도 없이 카셀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게 다 카셀, 그대의 음험한 눈빛 때문이오.”
“내가 무얼?”
“보기 드문 적안이 아침부터 불타고 있으니 사람들이 다 무서워하지 않소!”
카셀은 일행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적안은 윗대 선조 카이도프 님을 닮은 거라 떳떳하지. 숨기고 다닐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역시 그런 거였구나.’
공작 내외를 닮지 않았어도 카셀은 클라인 공작가의 어엿한 자손.
‘예전엔, 클라인 공작저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얼어붙었어. 단순히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서였지.’
어제 잠들기 전에 떠올렸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은… 별로 증오스럽지도 않아.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흘렸던 눈물도 감정도 잊혀 가겠지?’
그건 용서가 아니다. 모리스 클라인에 대한 감정을 정의했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당신들에 대한 망각, 마지못해 덮어 둠일 거야.
과거로 되돌려진 시간이 흘러가며 페이는 이전의 삶과 관련한 끈을 점점 놓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생각을 버려두고는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뭔가, 이 일대 사람들에게 신뢰를 좀 얻어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들은 여관으로 돌아와 대화를 나눴다.
“시오넬 영지는 과히 풍요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빈곤한 지역도 아니라고 해요. 다만 영주를 제외하고 아주 잘사는 귀족은 없고, 제도권이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종종 와서 자리를 잡는다고…. 책에서 봤어요.”
카셀이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페이 양. 어제 먹었던 음식에서 보듯이 기후가 특이해 밀 농사도 어렵다고 하지요. 이 일대에서 나지 않는 식료품은 그래서 가격이 비싼 편이라고 합니다.”
“우와, 그렇군요.”
“…….”
아스테인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그저 신기했고, 루키우스는 페이가 모처럼 ‘그나마 괜찮은 놈이자 유일한 가족’과 하는 말이라 일절 방해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머릿속에 시오넬 영지의 특징 따위는 고대부터 시작하여 전부 들어 있었다.
페이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곧바로 아는 내용을 논문처럼 줄줄 읊어 댈 것이다.
“이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끙…차!”
그녀는 마탑에서 챙겨 온 무거운 짐가방을 끌어올렸다. 곁에 앉았던 카셀은 그것을 얼른 손으로 받쳐서 테이블 위에 놔주었다.
“끄르르르!”
안 그래도 다섯을 태우고 왔는데 저것도 좀 무거웠더랬지. 고생한 모모가 목에서 끓는 소리를 내자 페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 미안. 이거거든요. 신품종 옥수수 씨앗하고 타로 토란이에요. 앗, 모모! 먹으면 안 돼. 어차피 네 입엔 안 맞아.”
카셀은 자루에서 작물을 하나 꺼내 관찰했다.
“이게 타로 토란이라는 겁니까? 고구마와 조금 닮았군요.”
“고구마는 또 뭐지?”
라파엘의 물음에, 페이와 카셀은 서로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카셀은 특별한 일이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제도권에서는 고구마를 잘 먹지 않죠. 라파엘이라면 모를 만도 합니다.”
“감자는 제도의 식문화에 스며들었는데 고구마는 잘 안 먹는 게 신기했어요.”
로지아 국경지대의 혹독한 생활을 견뎌 낸 경험이 있기에, 카셀은 그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감자야 스프나 샐러드로 응용하여 잘 먹지만, 통째로는 잘 안 쓰지 않습니까. 고구마는 아무래도 단맛이 강하다 보니 감자보다도 덜 선호되는 편입니다.”
“이것도 달다는 소리야?”
라파엘의 물음에는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았다.
“보통 식사를 끝마치고 디저트를 달게 먹는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고구마가 중간에 나오면 맛이 덜하게 느껴지죠. 그래서 잘 쓰지 않게 된 겁니다.”
“그렇군요.”
“라파엘은 감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봐서 모를 겁니다.”
“혹시 카셀 님은 감자 캐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나요?”
카셀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예전에 근무했던 지역에서 감자는 그나마 생산이 되던 터라, 매년 물리도록 봤지요. 모닥불 밑에 넣어 뒀다가 꺼내 먹은 적도 많습니다.”
“후후후.”
그와 약간의 동질감이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수도원 시절, 구황작물인 감자와 고구마는 필수적으로 심는 작물이었다. 그런데 제도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그것들을 쪄서 먹는 문화가 전혀 없기에 좀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도트도 감자를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보고 이게 뭐냐고 물었어. 귀족들은 내가 겪은 삶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사는구나.’
“뭔지는 몰라도 나를 실컷 놀린 것 같은데, 그래서 이걸로 뭘 할 겁니까?”
가만히 있던 라파엘이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종자로 쓰도록 좀 나눠 줄까 해요. 뭐, 당장 이걸 준다고 재배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우리한테 주민들이 당장 마음을 열지도 않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