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시오넬 영지로
페이의 요청에, 루키우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네가 원한다면 어디든지 가야지.”
“흐음….”
드라칸을 이용하라는 루키우스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허가만 난다면 드라칸을 타고 날아가는 편이 기동성이 압도적으로 좋으니까. 정말 괜찮을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하나 싶어서 망설이는 찰나, 그가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만약 모모가 느릿느릿하게 날거나 말 안 들으면 이걸로 갈음해.”
그가 내민 것은 반짝이는 줄에 매달린 조그만 피리였다.
피리…?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웬 피리예요? 설마 불면 어디선가 큰 코브라가 나와서 진흙탕을 건너게 해 준다든가 하는 건가요?”
“그런 흉측한 걸 내가 너한테 줬을 리가 없잖아!”
“음….”
“일단 받아, 그리고 불어 봐.”
루키우스는 유독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엘릭서를 주던 그날처럼.
페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던 터라 그 미소를 보지 못하고 엉겁결에 피리를 불었다.
삐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하얀 무언가가 몽글거리며 생겨나더니 우아한 실루엣을 자아냈다.
말을 닮되, 그보단 약간 작은….
“…유니콘?”
머리 위에 새초롬하게 돋은 뿔을 발견한 페이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유니콘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루키우스는 이때다 싶어서 신나게 자랑했다.
“유니콘은 죄다 정령계로 떠나갔다고 알려졌지? 실제로는 한 마리가 대륙에 남았는데, 그게 이 녀석이야. 이름은 꽤 긴데 굳이 알 필요 없어. 모모보다는 더 똑똑하니까 그냥 좀 특이한 말이다 생각하고 부려먹으면 돼.”
새하얀 몸체와 곱슬거리는 은빛의 갈기가 너무나도 탐스럽고 아름다웠다.
페이가 손을 내밀자 유니콘은 고개를 기꺼이 숙여 머리를 만지게 해 주었다.
보드랍고 폭신한 갈기의 느낌에 반해 버린 페이는 뒤늦게 더듬거렸다.
“유, 유니콘을 가지라뇨!”
“밀렵한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챙겨. 얘는 적어도 모모보다는 착하거든.”
“삐이익!”
모모가 유니콘을 홱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아, 이것도.”
루키우스는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거다! 그거! 전에 마차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었던 엘릭서!
“이번엔 진짜 안 받을 거예요!”
페이가 손사래를 치자 루키우스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말했다.
“귀한 유니콘이 다쳤을 때 상비약으로 쓰려면 받아야지 않겠어?”
“읏…! 그건, 하지만…!”
“이왕이면 여러 개.”
그는 반대편 손도 주머니로 넣더니 엘릭서를 세 병이나 더 꺼냈다.
이건…. 이건…. 받으면 안 돼.
생각은 이성 쪽으로 줄달음치려 했는데, 손은 유니콘이 내민 머리 뒤편의 갈기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유니콘은 더 만지라는 듯 발굽을 치며 다가오더니 허리를 그녀의 몸에 바짝 댔다.
페이의 손가락은 갈기를 긁어 주느라 쉴 틈이 없었다.
“웃….”
만지고 있으니 정말 따뜻하다. 그리고 아늑해.
왜 엘프들이 한때 유니콘이란 존재에 목을 맸다는 기록이 남았는지 알아 버린 순간.
페이는 유혹에 졌다.
끝내 피리와 엘릭서 병을 받아 든 페이를 향해 루키우스는 웃고 또 웃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진리.
그가 달콤한 미끼를 놔둔 덫에 페이가 영원토록 걸려들길 바라고 있었다.
매일 정성을 들여 꾸며 놓을 테니까.
이번에 계획한 일을 끝낼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미소는, 출발 당일 아침에 딱 사라졌다.
황태자에게 허락을 구한 페이가 데려온 동행 셋. 아니, 세 놈. 그 면면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저놈은 페이의 친오라비 아닌가? 페이가 아무 말도 안 했기로서니 여태 눈치를 못 채? 괘씸하고 무능력하군.’
마법이 걸린 가죽 갑옷을 걸친 카셀은 목에서 그르릉대는 소리를 내는 드라칸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정말 건장한 남자 넷을 한꺼번에 태워도 괜찮습니까?”
“네. 괜찮다고 원…주인께서 그러시네요. 저건 그냥 습관이래요.”
크흠흠. 모모가 페이를 위해 하는 고생이야 상관없는데, 저놈들. 살면서 드라칸 등 위에 타는 영광을 누려도 괜찮은가!
루키우스의 못마땅한 눈은 이번엔 옆의 라파엘에게 옮겨 갔다.
카셀놈도 그렇고 저놈도 기사 티가 나긴 하는데 날티도 나는 것이 한심하군. 쯧…. 그 옆은 또 뭐야, 칼이라곤 식사용 나이프나 쥘 수 있는 애송이인가?
아스테인은 루키우스가 자신을 훑어보는 눈치를 채고는 밝은 인사를 건넸다.
“루키우스 님에 대한 이야기, 그때 만남 후로 또 들었습니다. 차기 마탑주가 될 확률이 가장 높다고 명성이 자자하다면서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딴 것엔 관심 없어…!”
다짜고짜 제국의 황자를 향해 반말을 해도, 아스테인의 진지한 표정은 변함없었다.
“과연 대단하신 분입니다. 혹시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절대 없어!”
카셀은 아스테인의 어림없는 소망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드라칸의 상태가 괜찮다면 슬슬 출발하도록 하지요.”
“네, 그래요.”
“크아아아!”
본체로 돌아간 드라칸은 포효를 내지르고는, 다섯 명을 한꺼번에 태운 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휘이잉-
페이의 마법으로 보호받기에, 그들 주변에는 부드러운 공기만이 흘러 다녔다.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인데도 쾌적한지라 카셀의 입에선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흠….”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라파엘과 일대일 담판으로 기사의 맹세를 하고 속을 터놨는데, 그는 예상대로 오를레앙 가문의 수상한 획책에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단, 그도 가문 내에서 뭔가 수상쩍은 낌새가 꾸준히 벌어지고 있음은 눈치챘다고 실토했다.
물증이랄 게 아무것도 없으나 만약 제국의 기치에 반한다면, 부모가 한 일이라도 자기 손으로 고발하겠다고 맹세했으니.
믿어야지.
“…….”
라파엘을 쳐다보자, 그가 카셀의 마음이 뭔지 안다는 듯 친근하게 씨익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하등의 근심거리가 없어 보였다.
‘만약 기사로서의 맹세를 어긴다면 네 목은 내가 친다, 라파엘. 너와의 사이에 우정은 없지만. 그걸로 예의를 다해 주겠다. 후회는 없겠지?’
카셀도 그를 마주 보며 작게 웃어 주었다.
“그런데, 아스테인 황자님은 용케 외출 허락을 받았네요? 무려 제국의 최남단까지 가는 길인데요.”
아스테인은 허리에 찬 소검을 슬쩍 건드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바깥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도 목적지가 제도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알고 있으니까요. 뭣보다…. 싸움이 벌어지면 이걸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걱정됩니다.”
페이는 좌중을 스윽 둘러보고는 안색을 약간 굳혔다.
“정말 그러네요. 시비 같은 게 걸리면 살짝 험악하게 생긴 분들이 있어야 중재가 쉬운데. 두 분 기사님들이 키와 덩치가 커도 얼굴은 미형이라 쉽지 않겠네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레이디.”
카셀이 정중하게 말하자, 페이는 몸서리치는 시늉을 했다.
“으으…! 제가 레이디는 무슨요. 공적인 자리에서야 당연히 받아들여야겠지만 우리끼리는 페이 양으로 참아 주세요.”
실은, 들어도 괜찮다. 다만 카셀과 지나치게 딱딱한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은 페이만의 ‘작은 투정’이었다.
“앞으로는 익숙해지셔야죠. 당신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못하는 겁니다.”
카셀과 페이의 훈훈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그때 무도회에서 손등에 키스를 받는 일은 없어서 천만다행이었어요. 참고 또 참아도 그것만은 몸이 간지러워질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요.”
라파엘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 첫 영광은 제게 주지 않겠습니까, 레이디 모르가나? 그대가 만약 발을 접질려 비틀거린다면 재빨리 안아 드리겠습니다.”
“라파엘 경, 그만. 만약 레이디 모르가나에게 무례를 저지르면 나는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밖에 없네.”
“너 기사와 마법사 간의 결투가 뭔지 제대로 알아보고 싶나?”
카셀과 루키우스의 견제가 동시에, 그것도 살벌하게 들어갔다. 라파엘은 살기로 충만한 그들을 차례로 쳐다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여기 얼굴만 좀 곱상하고 마음씨 험악한 사람이 둘이나 있습니다, 페이 양. 우리 측에 시비가 걸릴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네?”
“나야말로 무의 극강이라 불리는 카셀 기사단장과 결투하고 마탑주 소리도 나오는 마법사와 연이어 결투하면 곧 죽겠습니다.”
“푸훗!”
그녀는 참았던 웃음을 결국 터트리고 말았다.
모험책 따위에나 나오는 작은 투닥거림, 실존하는 거였구나. 출발하고 고작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이런 대화가 오가다니 심심할 틈은 없겠어.
시오넬 영지로 향하는 이유가 결코 밝은 것은 아닌데도, 이들과 있으면 즐겁다.
나와 피가 통하는, 과거에 나를 몰랐던 큰 오라버니.
조사 대상인 가문의 후계여도 어쩐지 안심이 되는 기사 라파엘.
그리고…. 모리스처럼 황태자의 그늘에 늘 가려졌던 황자 아스테인.
이 자리에 없는 황태자 실라스도 포함해서,
늘 곁에서 든든하게 지원해 주는 루키우스까지.
‘세상엔 좋은 사람들도 있어, 으응. 역시 내가 갔던 길목에서 뛰쳐나와 다른 길로 가 본 건 잘한 선택이야.’
라파엘의 투덜거림을 끝으로 잠시 끊겼던 대화는 카셀이 다시 이었다. 목적은 다름 아닌 페이와의 친분이었다.
“그럼, 페이 양은 레이디 모르가나로서 사교 활동은 정해진 바가 없습니까?”
“으음, 뭐 그렇죠. 저에게 가문의 기반이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매번 남의 살롱이나 호텔에서 만나자고 할 수도 없잖아요.”
“…….”
페이는 담담하게 말했으나, 카셀은 한탄을 흘릴 뻔했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늘 씩씩하고 야무지고 자기 할 일을 다 해내지만,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는 순간이란 없었다.
방금 그녀가 한 말 그대로 사교계의 일이란 복잡하다.
자택에 초대하여 가산 규모를 과시하고 사용인들을 잘 다뤄 손님 대접을 하는 모양새도 평가에 들어가므로.
그녀가 그쪽에 있어서 처음부터 불리하다는 건 알아.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페이 양의 사정이 무언지는 다 알고 있다.
그렇지만 포기와 체념을 버릇처럼 하고, 담담하게 살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난….’
“뭐,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그럼 좋은 해결 방법이 있지요.”
라파엘이 갑자기 팔을 뻗어 페이의 고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응? 네?”
“놔라.”
영문을 모르는 페이와 루키우스의 살벌한 눈초리에도 라파엘의 끈적이는 말은 멈추지 않았다.
“레이디 모르가나께서 저와의 정식 교제를 결심하기만 한다면야…!”
“이봐, 카셀. 이 자식 저 아래에 떨궈 놓고 가도 되나?”
“…….”
카셀은 루키우스의 험한 질문에 긍정의 대답은 안 했지만, 고개는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라파엘이 경악했다.
“카셀 경! 나를 버리겠다는 것이오? 내 마음은 한 줄기 장난도 없는 진심인데!”
“빨리 손이나 놔드리세요.”
“황자님마저! 어째서 제 편은 가면 갈수록 사라지는 겁니까? 전 여기에 있는 모두와 잘 지내고 싶단 말입니다!”
‘아하하….’
그사이 라파엘의 손에서 자기 손을 슬쩍 뺀 페이는 즐거워서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는 웃음을 토해 냈다.
그녀가 웃었기에 루키우스의 노기도 곧 가라앉았다.
만약 페이가 진심으로 질색했다면 라파엘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