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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음모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53/148)

53화 음모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발… 제발… 제발…. 있다!

바스락. 작게 접혀 바구니 밑에 꼬깃꼬깃 붙인 쪽지를 펴자, 중간 즈음에 놀라운 보고 사항이 적혀 있었다.

다른 내용은 볼 것도 없었다.

- …쪽은 그러한데, 겨우내 비가 잘 오지 않아 바짝 마른지라 카리스 자작의 집과 그 일대가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

화재 원인은 알 수 없으니 안에 든 이들은 모두 죽은 것으로 추정되며, 근처 마을에서 불의 시작을 알지 못해 구조를 할 틈이 없었다고 함.

집은 전소되어 부서진 채로 방치 중이고 유해의 수습을 누군가가 할 엄두도 못 내는 모양. 시오넬에선 공동묘지의 매장비도 무척 비싸다고 함. 또….

‘뭐? 뭐? 뭐라고?’

놀라운 보고였다. 겨울에 비가 잘 오지 않으면 봄에 화재가 잘 일어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망할 모르가나가 수도원 시절에 이것저것 신나게 떠들어 댔으니까.

그런데…. 죽었다고? 그들이?

한번 죽인 가족이, 자기가 손대기도 전에 또 죽었다고 슬퍼할 도트는 아니었다. 되레 자신이 손을 대지 않고 해결된 것에 그녀는 전과는 달리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난… 의뢰를 하지도, 그들을 죽이겠다는 티를 내지도 않았어. 그런데 우연히 난 불로 알아서 죽어 주다니, 세상에.’

예전엔 암흑 길드의 힘으로 옛 가족을 죽여 놓고서도 껄끄러웠다. 혹시 저들은, 언젠가 내 정체 혹은 왜 그들을 죽이라 했는지 이유를 알아내 내 등 뒤를 찔러 오려 하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이제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시오넬 영지는 기후가 좀 독특한 편이라, 양은 많지 않아도 희귀한 농산물이 간간이 생산되는 특수한 지역.

‘내가 식도락가인 것처럼 꾸며 놓았으니 나중에 이 의뢰가 들켜도 할 말은 충분해. 시오넬 영지에서만 나는 것을 먹어 보고 싶었다고 하면 되잖아?’

어떻게 둘러댈지 착착 생각이 잡히자 신이 나는 도트였다.

‘귀족들을 알아 둬야 물건을 구하기 쉬운 건 사실이니 구구절절 변명할 필요도 없고. 아…! 내 일이 잘되려나, 좋아. 다음엔 모르가나 차례로군!’

아무리 암흑 길드에 맡기는 의뢰라도, 연달아 두 건의 살인 의뢰를 맡기려면 마음이 좀 그렇지.

됐어, 일단 나는 안전해졌어.

그 느긋함과 흐뭇함이 도트의 몸을 요사스럽게 휩싸고 돌았다.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책략가라고 자신했고, 연이은 승리로 도취되어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의 발생 따위야 임기응변으로 다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뭐든지!

한편, 주신전의 누군가도 어디론가 보낼 서신을 부지런히 쓰고 있었다.

성녀 카피아였다.

- 클라인 공녀의 귀환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가엾은 공녀를 끝까지 돌보지 못한 죄인이라, 곧바로 찾아와 인사를 나누기가 망설여져 시기를 늦췄습니다.

데뷔탕트도 잘 치렀고 조만간 사교계 활동을 본격적으로 한다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요. 모든 게 다 주신의 뜻일 터입니다.

조만간 그쪽으로 올라가 뵙겠습니다. 공녀께서도 이 보잘 것 없는 몸을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만나는 날을 늘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신의 축복을 만인에게 전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성녀 카피아로부터.

“후….”

펜을 놓은 카피아의 얼굴엔 싸늘함이 떠올라 있었다.

이 고독한 공간에서 그간 너무 초라하게 웅크리고 살았다. 내가 정말 주신의 자녀라면, 생애 한 번쯤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순간이 있겠지.

만약 주신께서 그럴 기회를 주지 않으신다면 직접 만들어야 하는 법.

나의 이 두 손으로.

“이것을 황궁으로.”

“예, 성녀님.”

“서신을 부친 후에 조만간 탁발을 나설 준비도 하여라. 긴 여정이 될 것이다.”

“성녀님께서요?”

어린 사제가 깜짝 놀라 되묻자, 카피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봄을 맞이하여 성기사단도 고행의 행군을 떠났다가 돌아왔거늘 내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사람이란 모름지기 일해야 하는 법이란다.”

“예…. 성녀님.”

얼굴에 존경의 빛을 띤 어린 사제가 서신을 소중하게 받아 들고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남겨진 카피아의 눈빛이 도로 싸늘하게 식었다.

아이야, 너는 나를 언제까지 그런 눈빛으로 볼 것이냐.

내가 성녀가 된 후 숱하게 많은 이가 나를 경탄 어린 시선으로 보다가, 환멸과 체념으로 바뀌고, 그 뒤엔 가끔 떠올리지도 않는 퇴물로 여겼지.

고작 신성력의 증감 때문에 말이다. 나는 그 일을 몇십 년이나 겪어 왔다.

너도… 변할 것이냐.

나는 더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 존경받는 성녀로 살기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란다. 너만은 나를 이해해야지?

성녀 카피아의 마음속엔 선악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모든 언행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다툼에 불과했다.

* * *

“정말인가요?”

“네, 페이 양. 왜 그러십니까?”

미쥬앙 호텔 최상층.

봄의 무도회가 끝나고 오랜만에 카셀과 독대한 페이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카피아 성녀!

그녀가 조만간에 황궁으로 입성할 것이라니, 세상에.

“…페이 양?”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던 페이가 눈을 들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로만 들었던 주신전의 성녀님이 황궁으로 와 강론을 펴신다니 놀라워서요.”

카셀은 페이 앞인데도 옅은 미소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사실 놀라울 것은 없습니다. 선대 성녀님까지만 해도 매년 황궁으로 와 자선과 자비 등을 권유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지금 대에 와서 빈도수가 상당히 줄어들었을 뿐이지요.”

그는 왜 그러한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정보를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페이도 구태여 캐묻거나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네….”

작금의 성녀가 왜 홀대를 받는지는 홀트데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문제는 가만히 있던 성녀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려는 사유가 무엇인가, 그거였다.

‘이젠 앞일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과거와 달라졌어. 나도 힘들지만 도트도 그럴 거야. 카피아 성녀가 어떤 식으로든 친자 감별과 관련을 맺었다면 그를 바탕으로 일을 꾸밀 확률이 높겠지?’

성녀가 모르가나의 인생을 고의로 망친 이유는 심심해서가 아닐 터.

공녀로 태어난 모르가나를 시기 질투해서 그랬다면, 주신전에 있을 때 병을 빙자해 죽였겠지.

만약 마차의 습격을 주도한 게 성녀라면 뒤가 켕겨서라도 제도로 얼굴을 내밀진 못했을 거다.

죽거나 실종되었으리라 여긴 공녀의 생존을 확인하고 오는 이유는, 화적의 습격과는 정말 관련이 없어서일 거야.

그렇다면 제도행의 실제 목적은?

‘자의든 타의든 ‘조력’을 했다면, 공녀로 자리매김한 도트를 흔들어서 뭔가를 얻어 내려고 할 수 있잖아. 공짜로 도와줬을 리가 없다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그냥 주어지는 호의다. 급하다고 해서 넙죽넙죽 받아먹었다간 나중에 크나큰 대가를 치르는 것이 진리라지?

페이는 직감할 수 있었다.

카피아 성녀는, 도트의 편도 페이의 편도 아니다. 자기가 바라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일을 같이 조작했거나, 알면서도 조작을 묵인했을 테다.

카셀과 헤어진 페이는 성녀가 과연 자신을 알아볼 것인지 고찰했다.

‘…하고도 남겠지. 대놓고 내 마력을 묶어 놓기 위해 루비 펜던트까지 줬잖아. 내 머리칼은 쭉 연핑크빛으로 물들었고 지금도 색이 바래지 않았으니, 진실을 알아챌 확률이 너무 높아. 내가 마법사가 되었음을 알면, 주신전의 유물이 망가졌단 사실도 유추하고 남겠지.’

현재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카피아 성녀는 오를레앙 가문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했다. 먼 친척뻘인데 성녀가 된 뒤 후원을 꾸준히 받아 왔다나.

또 오를레앙 공작가다.

페이는 속으로 탄식했다.

‘정말이지, 황태자 전하의 의뢰를 받고 나서 하는 일들은 딸기 넝쿨을 들어 올리는 것과 같네. 다들 따로따로 열린 열매 같지만, 막상 들어 올리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뿌리를 찾기가 힘들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단서 찾기도 언젠간 종말을 고하겠지.

‘어려워도 멈출 생각은 없어. 뿌리를 찾아내고 나면 근처에 열린 딸기 열매는 모조리 다 회수할 수 있어. 힘내자, 페이. 샅샅이 찾아내서 다 불태워 버리는 거야.’

「…이, 페이!」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수도원 근처에 붙여 놓은 셋을 제외한 나머지 하나, 파인 에코였다.

“엇, 4호!”

최근 도트의 근황을 알아보기 위해 공작저 잠입을 시도하게 했는데 결과가 궁금했다.

운디네의 소환 해제 이후로 한 일인데, 그전과는 다르게 파인 에코는 본채 안으로도 슬쩍 진입을 한 모양이었다.

왜 이게 가능했는지 짐작은 되었다.

루키우스가 준 엘릭서를 마시고 극도로 성장한 마력의 힘 때문이겠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전엔 못 한 일을 해냈다는 게 좀 신기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흐-흥, 내가 가자마자 엄청난 것을 알아 왔지.」

“그래?”

4호는 거만하기로 소문이 난 샐러맨더보다 더 뻐겼다.

「그래! 페이가 이 4호를 사랑해 주기 때문에 특별히 알려 주는 거야, 알겠어?」

“그럼, 그럼.”

파인 에코가 알아 온 소식은 색달랐다.

공녀는 어떤 쪽지를 침대맡에 숨겨 놓고 그것을 꼼꼼히 훑어보더니 곧 촛불에 태웠단다. 몇 번씩 읽었는지 귀퉁이에 손때가 약간 묻어 있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었다.

파인 에코가 단번에 읽어 외우기엔 내용이 상당히 많았는데, 쪽지의 첫머리에 적힌 말은 <시오넬 영지 북부 근황 보고서>라고 되어 있었다지?

「그렇지만 그 쪽지, 아무래도 바깥에서 온 것 같았어. 왜냐하면 쪽지를 없앤 다음 방 안에 있던 빈 바구니도 결 사이사이를 죄다 뒤져 보고는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사용인한테 버리라고 줬거든.」

“바구니 전체를 봤다는 소리야?”

「으응! 원래 있었던 물건이라면 굳이 바구니 상태까지 살펴볼 필요가 없잖아?」

그렇겠지. 누군가를 시켜서 뭔가를 받아 오는 척, 시오넬 영지 근방을 탐색하게 한 거야. 거기에 무엇이 있길래?

“시오넬 북쪽 영지라….”

“페이, 고민하지 말고 그냥 가 보자.”

“삐루룩, 삐약, 삐이!”

옆에 있던 루키우스가 꺼낸 말에 모모도 좋다고 동조했다. 우는 소리가 뒤로 갈수록 이상해졌지만, 뭐 어때.

페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루키우스, 시오넬 영지가 어딘 줄은 알고 말하는 거예요? 거긴 제국 끄트머리라고요. 그나마 시오넬의 북쪽이면 거리가 줄어들긴 하지만 제국 최남단까지 내려가야 나오는 지역인데요?”

“얘 타면 되잖아.”

“삐이…?”

루키우스가 바구니 안에서 육포를 씹으며 놀고 있던 모모를 가리켰다.

삐질. 

탈것답게, 벽에 걸린 지도를 냉큼 보고 거리를 얼추 가늠한 모모.

그냥 가는 거야 좋지만 내가 수고해야 하는 일이라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모모가 큼지막한 눈알을 굴리며 둘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외면하자, 루키우스의 타당한 말이 들려왔다.

“넌 황태자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드라칸 라이더야. 왜 못해? 제대로 허락받고 제국 하늘 가로질러서 휙 가 버려. 또 안장에 너 포함해서 최소 서넛은 더 태울 수 있으니까 시중들 사람도 좀 데려가고, 모모는 튼튼하니까 고생 좀 해도 괜찮잖아.”

“삐에엑.”

모모는 페이 말고 다른 사람은 태우기 싫어서 배를 뒤집고 날개까지 펼쳐 죽은 시늉을 했다.

그러나 모모의 잔꾀는 둘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셋이 함께한 시간이 나름대로 끈끈했다.

모모는 일을 좀 해야 활기(?)를 되찾는 아이다.

“루키우스. 가능하면 같이 가요. 저하고 같이 가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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