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녹음의 홀에서
어린 나이에 실종된 클라인 공녀의 화려한 귀환과 황태자의 에스코트.
여기까진 딱 좋았다. 도트와 같이 데뷔한 영애들이 얼마나 예쁜 드레스를 입고 보석과 꽃으로 치장했든 다 묻혀 버릴 완벽한 서사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랏셀 공녀의 귀환을 끼얹어?
도트는 내일부터 세간의 입에 두 공녀 중 누구의 말이 더 자주 오르내릴지 뻔히 짐작했다.
존재 자체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가 겨우 귀환해 갓 얼굴을 내민 클라인 공녀.
황태자와 약혼했다가 느닷없이 파혼을 선언하고 칩거했다 몇 년 후 모습을 드러낸 랏셀 공녀.
사람들 틈에서 화끈한 주제는 역시 후자가 되기 쉬웠다.
그래서 더 분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어떻게 나를 없는 존재처럼 지워 버릴 수 있어…!
끼익-
“뭐야!”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라 도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차 싶어서 입술을 뒤늦게 다물었는데, 고개를 빼꼼 내민 이는 레이디스 메이드나 다른 사용인이 아닌….
모르가나였다.
또 너야?
“안녕, 도트.”
“…….”
대답 대신 돌아오는 살벌한 눈초리. 흰자위에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핏발이 서 있었다. 어지간히 열 받았구나, 싶어 페이는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들어와 문을 살짝 닫았다.
도트는 충혈된 눈으로 건방진 모르가나를 훑었다.
고운 머리칼을 내려뜨린 채, 특별한 보석 없이 하얀 바탕에 검은 리본 등으로 포인트를 준 드레스 차림이었다.
도트가 입은 고가의 드레스가 백조의 순백에 훨씬 가까웠으나, 모르가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눈치였다.
자존심도 눈치도 없는 것. 네까짓 게!
그녀는 퍽 명랑하게 말을 건넸다.
“잘 있었어? 또 보니 좋네.”
오늘 모르가나만 단독으로 봤더라면 도트의 무서운 의심이 여지없이 발동했을 것이다.
얘, 뭐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랏셀 공녀가 등장한 지금. 너무 놀랐기에 당연한 의심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도트는 목울대가 끓는 듯한 기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넌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황궁 무도회에 겁도 없이 덜컥 참석하고 간이 크네.”
“응! 네가 공녀님이라 자주는 못 봐도 이렇게 황궁에서나마 가끔 보니까 좋다. 네가 오늘 무도회에 온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꼭 와 보고 싶었어.”
빈정거리는 대답이 곧바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하, 그래서 내가 여기에 들어오는 걸 보고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 들어왔구나?”
“응. 도트 너는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주로 마탑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가끔 황궁으로 오기도 해. 음…. 아!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감명 깊은 구절이 있는데 들어 볼래?”
“…….”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대. 나도 그거 보고 약간 반성해서, 앞으로는 어디에 있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어때, 나 잘하고 있지?”
도트는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모르가나를 빤히 보았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진짜 공녀를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어.
딱히 지적할 구석은 없지만, 제 주제에 걸맞지 않은 드레스를 입고 쓸모없는 말을 나불나불 지껄이는 모르가나.
전에도 그랬지? 수도원에 딸린 도서관에서 시시한 책을 가져와서 내게 하루에 한 구절씩 읽어 준다고 쓸데없는 짓 하고 그랬잖아.
옛날 버릇 못 버리고 똑같이 구니까 곁에 친구라곤 없지. 그때나 지금이나 말이야.
머릿속에 랏셀 공녀와의 싸움이 가득한 도트는 모르가나를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드라칸 라이더? 물 마법사? 보세요, 사람들.
이 애란 존재는 이토록 멍청하고 보잘것없습니다. 하품 나오는 고지식한 드레스를 입히고 황태자 전하의 부하가 되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아요.
퀘이사 백작, 당신의 아들이 다 크기 전에 모르가나의 목을 잘라 드린다고 약속하죠.
도트는 어깨를 펴고 위엄을 한껏 드러내며 말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는 있겠지?”
“응! 그럼, 우린 친구잖아.”
저를 예사로 공녀라고 부를 줄 알았는데. 헛물을 켠 도트는 혀에 힘을 주어 따박따박 질책했다.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 공녀, 그게 나야. 제국에 단둘! 뿐인 공작가의 공녀라고. 알겠어?”
“네 이름은 아는데?”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면서도 일부러 속을 긁자, 도트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내가 부득이하게 수도원에서 댄 옛 이름…. 아니 가명, 이젠 잊어. 그게 너에겐 하늘 같은 공녀님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야. 도트리샤라고 안 부른다고 해서 날 티아나라고 예사로 불러서도 안 돼!”
마뉴엘라의 명예 공녀직 따위, 인정할 수 없지. 제국의 공녀는 오로지 나만 될 수 있어. 황태자 전하의 반려가 될 사람도 오로지 나뿐이야!
연핑크빛 머리칼이 고개를 갸웃하느라 나풀거렸다.
“어어, 앞으로는 네가 공녀님으로 살아야 해서 그런 거야?”
“그래. 네가 그 정도 이해력은 있어서 다행이네.”
도트의 눈빛이 한층 거만함으로 물들었다.
“알겠어. 그럼 나도 앞으로는 레이디 모르가나로서 널 대우하고 생각할게.”
“뭐?”
공녀란 지위를 내세워 쳐다볼 수도 없는 우위를 점하려던 도트가 기막혀했다.
“그렇잖아. 넌 클라인 공작저에 가서 에이나 노릇하다가 공녀가 된 거고, 난 마탑과 황궁을 드나들며 황태자 전하를 모시다 레이디 모르가나가 된 거니까.”
“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야?”
“물론입니다. 도트와 모르가나, 두 소녀의 이야기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 끝났다고 여기면 되는 거겠죠. 안 그런가요, 클라인 공녀?”
문맥만 보면 도트가 원했던 내용이긴 한데, 말의 뉘앙스가 묘했다.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었던 둘 사이를 영원히 가로지르는 선을 긋는 느낌.
‘너…. 설마?’
페이의 눈썹은 똑같은 모양이었으나, 입꼬리만 슬쩍 올라갔다.
“그래도 난 당신의 결정을 슬프게 생각하지 않을래요. 이게 한 사람의 성장이라는 거일 테니까요. 왜, 수녀원장님도 그러셨잖아요? 나중에 수도원을 나가서 살게 되면 어깨를 펴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라고요. 난 이제야 그분의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공녀님도 당연히 그러시겠죠?”
‘이게…!’
도트는 헤아릴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너, 너…. 감히…. 감히 너 따위가 어디서 건방지게 훈계질이야?
“그럼 안녕히, 나의 유일했던 친구 도트리샤. 다음부터는 그대가 원한 대로 철저히 공녀님 대우를 해 줄게요. 당신에게 우연한 행운이 꼭 깃들기를.”
모르가나는 자기가 할 말을 다 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다.
저게, 정말!!
모르가나가 가고 나서야 뒤늦게 떠올랐다.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녹음의 홀이다. 아무나 출입하거나 안의 사람을 방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애초에 고귀한 신분의 영애와 귀부인만 들어올 수 있는 데야, 라고 한껏 훈계할 좋은 기회였는데! 그걸 까먹고 놓쳤어!
바깥에 지키던 이들은 ‘레이디 모르가나’가 들어간다길래 못 말렸겠지. 쓸모없는 것들!
약이 올라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네까짓 게 정말…!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내가 꼭 할 일부터 처리하고 나면 다음은 네년 차례야! 마뉴엘라는 잠시 뒤로 미뤄 두지.’
가장 행복해야 할 날에 도트는 졸도하기 직전으로 노했다.
더는 못 참아.
봄의 무도회에서 돌아온 도트는 공작 내외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정말 감사해요. 오늘,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을 가졌어요. 황태자 전하께선 에스코트 내내 친절하셨고 첫 춤도 추었고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신경을 써 주셨기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서 기뻤어요.”
“그래, 그래. 너도 잘했다, 티아나야.”
화가 났으리라 여겼는데 뜻밖에 공녀가 기분이 좋아 보이자, 공작 부인은 손등을 토닥이며 칭찬하기 바빴다.
“저 며칠만 좀 편하게 쉬고 싶어요. 외출도 좀 하고요. 괜찮죠?”
“그럼! 네 뜻대로 하렴. 다음 다과회나 일정은 네가 원하는 날짜로 맞추겠다. 당분간 다 잊고 편하게 지내도 괜찮단다. 늦잠을 자든 외유를 하든 마음대로 해.”
“네.”
전처럼 또 사용인 몇몇을 데리고 공작저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챈 공작 부인은 에둘러 허락을 해 주었다.
다른 집안 같으면 데뷔탕트를 끝내고 곧바로 타 가문의 동향 탐색에 나서겠지만. 이번엔 긴한 사정이 있지 않은가.
‘랏셀 공녀의 등장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줄 알았더니, 역시 우리 딸이야. 의젓하고 야무져. 울고불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참아 넘기는구나? 날 때부터 고상한 핏줄은 역시 특별하지, 암.’
공작 부인의 콩깍지가 벗겨질 날은 아직도 한참 멀었다.
이튿날, 약간의 변장을 한 도트는 공작저를 나와 미리 약속한 의뢰인을 불러냈다.
용병 길트론.
‘그나마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
겉으로는 멀쩡한 의뢰 길드의 용병이나, 그는 암흑 길드에 한 발을 비밀리에 걸치고 있는 자다.
암흑 길드와 직접 접촉하기 힘든 경우, 길트론을 통하면 수수료를 물고 의뢰를 맡기는 게 가능했다.
그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데만도 시간이 이렇게나 걸렸다.
도트는 조급함을 숨기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부탁해요, 길트론 씨.”
“오, 알겠습니다. 의뢰 내용은…. 아이쿠, 극비지요. 용병 생활을 오래해도 일을 받기 전엔 늘 들떠서 원.”
“후후,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길트론은 과장된 포즈를 취해 보였다.
흥.
등 뒤에 버젓이 있는, 공작저의 기사와 따라온 메이드를 부담스러워할 필요 따윈 없다.
길트론이 내게 무슨 의뢰를 받았는지 당연히 내용을 알아내려고 하겠지. 그러나, 저 서신 안에 든 두꺼운 종이는 세 겹으로 된 특수한 종이였다.
겉면만 보면 계절에 맞지 않는 고급 과일과 다른 영지의 특산물 따위를 가져오란 것이나, 사이에 끼워진 종이를 회수해 불을 대면 전혀 다른 내용의 의뢰가 나온다.
- 시오넬 북쪽 영지 근처를 탐색하여, 근처에 특별한 일이 없는지 낱낱이 확인해 줄 것. 그쪽의 유력 인사인 귀족 가문과 명망 높은 기사의 근황을 포함하여.
이토록 조심해도 발각될 경우를 대비하여, 도트는 카리스 자작가를 없애란 진짜 요구는 넣지도 않았다.
신중해야 해. 여기서 잘못되면, 난 완전히 거꾸러져. 돈을 배로 쓰더라도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안전하게 건너자고.
그녀는 길트론에게 의뢰를 해 놓고 제발 결과가 빨리 나오길 빌고 또 빌었다.
도트의 고향은 보잘 것 없는 이들투성이라, 카리스 자작가를 동향 탐색에 빼놓을 일은 없었다.
그들이 끝내 비렁뱅이로 추락했더라도 그러겠지! 아니, 그때보다 더 가난해졌다면 특이사항이니 보고를 안 올릴 리가 없어.
그러니 기다리기만 하면 돼….
시간이 흘러 길트론이 1차로 보낸 오렌지 바구니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번째로 도달한 설타나와 말린 살구 바구니.
“아휴, 이런 건 저희도 최상품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데.”
“공녀님의 특별한 유희야, 말조심해. 괜히 건드렸다가 취미 하나 잃게 되면 마님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어?”
도트는 문 뒤에서 사용인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무시한 채, 안의 과일을 하나둘씩 조심조심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