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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못 참겠네, 정말! (51/148)

51화 못 참겠네, 정말!

“누가 안 그렇겠습니까, 호호. 그보다 이번에 새로 거둔 레이디 모르가나는 총애를 얼마나 받게 되려나요? 전하께서 손수 레이디 칭호를 주신 걸 보면 내후년엔 작위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야 그렇겠죠.”

아칸 제국 유일의 드라칸 라이더는 사사로이, 또 공적으로 떠들기 좋은 주제였다.

도트는 하필 제 주변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해 대는 이들을 바닥으로 밀쳐 버리고 싶어 약이 바짝 올랐다.

감히! 제국 유일의 공녀인 나를 두고 거슬리는 말이나 해 대다니, 생각이 있어?

만약 나와 고 계집애가 같은 수도원 출신이라는 소리를 지껄이기만 해 봐.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혼쭐을 내게 할 거니까!!

“마법 실력도 상당하다던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물의 마법에선, 동 나이대에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하더군요.”

“혹시 마법사 혈통이 아닐까요?”

‘그래…. 이거지.’

도트는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란 사람들, 마탑에 우르르 모여 사는 것도 그렇고 황궁에서 말로는 우대한다지만. 정작 사람들은 평민이든 귀족이든 마법사들을 두려워하고 약간 꺼리는 분위기가 없잖았다.

설령 고것이 레이디라는 가당찮은 칭호를 달고 다닌대도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란 뚜렷할 것이다.

고소해라. 

도트는 속으로 킬킬댔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만, 레이디 모르가나는 어리고 앞날이 창창하니 더 지켜봐야죠.”

“하하, 내 막내아들이 세 살 연하인데 어서 커서 레이디 모르가나와 좀 더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사내라도 너무 애 같아서 말이지.”

“당신도 참. 그것도 나쁘진 않죠. 위에 아들들이야 다 결혼했으니까요. 뭐, 그때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해요.”

뭐? 누가 감히 그딴 소리를 해?

도트는 잔을 바꾸는 척 고개를 슬쩍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도 아니고 퀘이사 백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부인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더 열 받는 건 백작 부인도 딱히 싫어하지 않는 눈치란 거였다.

귀족의 삼남이 보통 별 볼 일 없는 처지라지만 퀘이사 쪽은 사정이 약간 달랐다.

둘째 아들까지는 죽은 전처의 소생이고 삼남은 현 부인이 낳았기에, 법적으로 부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망할! 관심 끊어, 그딴 것에게 눈길 주지 말라고!’

아스테인 황자도 언감생심인데 백작가의 삼남까지? 듣기만 해도 속이 쓰리고, 이딴 말을 모르는 척 넘기기도 고통스러웠다.

다행히, 할 말 다 했는지 근처에 모여든 이들은 화젯거리를 다른 것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새로 제도에 들여온 차 맛이 생각보다 별로라는 둥, 고래잡이 사업이 신통치 않다는 둥 자랑 섞인 투덜거림이었다.

아… 아, 따분하고 지겨워서 정말로 미쳐 버리겠네.

황태자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왜 이 나를 덩그러니 놔두고 구출하러 오지 않는 거람?

기다리고 기다려도 황태자 실라스가 공녀에게 두 번째의 춤을 요청하러 오는 일은 없었다.

얼핏 눈을 들자 그가 다른 영애-누구지, 에솔트 백작 영애?-와 춤을 추는 장면만 보고 말았다.

난 이쯤은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어. 대신, 한 번 다른 이와 춤을 췄으니 이제 오실 때잖아.

그녀는 분노와 짜증 사이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림의 끝은 행복이라지.’

그러나 황태자는 다시금 다가와서 공녀를 홀의 중앙으로 인도해 가지 않고 자기 할 일만 철저히 했다.

도트는 공녀 신분이라 황태자 앞에 억지로 밀고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그러기는 또 싫었다.

황궁 어디를 가든, 보고 듣는 눈과 귀는 최소한 수백 개가 달려 있다.

차후 황태자와 혼사를 치를 때도 두고두고 말이 나올 거 아닌가? 여자 쪽에서 전전긍긍하며 매달렸다고.

당연히 내게 먼저 와 줘야지.

그래야 내가 이 온갖 고생을 헤쳐 가며 살아남은 이유가 되지 않겠어?

‘어째서… 분위기 좋았는데 끝이 이렇게 마무리되는 거지? 이게 다 아침에 하녀장이 공연히 유치찬란한 핑크 장미 핀을 권해서야! 그따위 것을 내 귀한 머리카락에 대니까 부정 타서 망한 거잖아! 난 핑크색이 싫어, 싫다고!’

심적으로 지친 도트는 남 탓을 하며 악독함을 무럭무럭 키워 갔다.

이 와중에, 안 그래도 부족해진 그녀의 평정심을 와장창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뉴엘라 드 랏셀 공녀님 드십니다!”

뭐라고! 누구? 공녀라니! 이 세상에, 아칸 제국에 나 이외의 공녀는 있을 수가 없어!

점점 미쳐 가던 도트는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당황하여 일어섰다.

“아니….”

약간 떨어져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클라인 공작 부인도 입장의 외침을 듣고는 당황한 눈치였다.

“랏셀 공녀께서?”

“그분이 초청 명단에 있었단 말입니까?”

“어흠… 어흠. 뭐, 못 나올 것도 없는 분이기도 하지요.”

한 사람은 홀 위쪽 상단에 와서 자리한 라냐 황비를 슬쩍 흘기기까지 했다.

내내 닫혔던 문이 열리고 단아한 모습의 랏셀 공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 공녀는, 다들 이름인 티아나가 아닌 클라인 공녀라 부른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예절 때문이기도 하고 공작가의 혈통임을 중시하기도 해서였다.

그러나, 같은 예법인데도 마뉴엘라 드 랏셀을 두고 랏셀 공녀라고 부를 경우엔 새삼 경각심을 일깨우게 된다.

모두가 랏셀 공녀를 두고 타국의 왕녀 출신임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까지 나대면 안 되는 거잖아!

그를 무한하게 곱씹은 도트는 분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말로만 들었지 눈으로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벌써 증오심이 들끓었다.

‘도대체 왜! 코빼기도 안 보였던 카셀 대공자에 이어서 저 망한 공녀까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아아, 빠르게 죽였어야 마땅한 모르가나까지 주제 넘는 드레스를 입고 여기서 설치고!’

세상에 이러는 법은 없다.

뭐가 중간에서 꼬여도 단단히 꼬여 버린 모양이다.

‘내 찬란한 앞날에 거슬리는 것들이 더러운 물고기처럼 헤엄쳐 다니는데 역겹고 짜증 나서 미치겠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봄에 열린 데뷔탕트 무도회인데, 내가 주인공인 데뷔탕트인데 저것들이 다 망쳐 놓고 있어!

어느새 사람들의 대화거리에는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랏셀 공녀가 올라 버렸다.

딸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클라인 공작 부인은 예상외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랏셀 공녀께서 오셨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뭐, 칩거하고 근 삼 년이 넘어가니까요. 슬슬 나오실 때도 되었죠.”

도트는 충혈된 눈으로 랏셀 공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홀 안에 버젓이 있는 황태자의 앞에 가 얼굴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에스코트를 해 온 영식도 기사도 없는 모양이고. 그나마 최후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지?

그렇지만 사람들은 은연중에 랏셀 공녀와 황태자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고 있었다.

그중 최고로 당황한 자들은 페이의 예상대로, 오를레앙 공작가의 사람들이었다!

“아… 아니, 왜….”

“주제넘군.”

“이게 정말인가요? 네? 랏셀 공녀가 왔다고요? 거참, 기가 막혀서!”

같이 모인 이들에게만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들은, 분명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이런 꼴을, 뒤에 빠져 있던 라파엘 오를레앙이 빤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풀피리 소리를 내려다가 짧고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대놓고 휘파람은 못 불지만 이거라도 하려고 했는데…!

퍼억!

“윽.”

카셀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라파엘의 종아리를 가격한 카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엄한 충고를 내놓았다.

“자중하게, 라파엘. 여긴 황궁일세.”

“으…, 드디어 경이 아니라 그대의 친우로 인정해서 이름만 불러 준 거요?”

라파엘은 입으로는 여전히 농지거리였으나, 눈빛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그의 가문 사람들이 꾸미는 음모와는 뜻이 다르다는 완고한 증표였다.

‘다행이군.’

속으로 약간 안도한 카셀은 나직이 경고했다.

“나는 그대만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네.”

“카셀 경, 나도 우리 사이가 다른 기사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사람의 종아리는 두 짝이라지?”

“쳇.”

어림도 없지, 카셀이 그의 희망 사항을 툭 잘라 버리자 라파엘은 투덜댔다.

세게 맞은 건 아닌데 다리 둘을 다 맞으면 기사라도 어기적대며 걸어가야 할 게 아닌가. 평소 싱글벙글 웃고 다닌대도, 남에게 우스운 꼴은 보이기 싫었다.

입은 툴툴대면서, 그의 눈은 랏셀 공녀가 아닌 다른 이들을 재빠르게 훑었다.

그를 낳아 준 아버지와 어머니, 공작 내외와 사이가 유독 가까운 영지의 가신 및 기사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편, 다른 쪽에서도 오를레앙 측의 반응을 은밀하게 살피는 이가 있었다.

“…….”

지금까진 성공적이네. 아스테인 황자와 들어온 이후로 흘러가는 과정을 지켜보던 페이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클라인 공작가에서 뭐라고 하지 못할 만큼, 황태자가 클라인 공녀에게 극진한 대우를 해 준다.

이것이 첫 번째 계략.

이후 페이가 아스테인 황자와 아카드니아 홀에 무사히 입성.

레이디 모르가나로서 데뷔탕트를 치르는 일도, 딱히 저항감 없이 홀 안의 이들이 다 받아들여 주었다.

아스테인과 첫 춤을 추고 나서 카셀, 라파엘 등 구면과도 인사를 나누고 새롭되 두 번째의 만남도 다른 이들과 짧게나마 가졌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황태자의 직속 부하인 페이에게 호감과 친밀함을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 랏셀 공녀의 등장도 무사히 끝냈다.

남은 것은 오를레앙 공작가의 반응을 살피는 일.

됐어. 공적인 일은 다 마쳤으니 이젠 내 용건을 볼 차례인가?

그녀의 시선은 멀찍이 있는 누군가에게 ‘드디어’ 옮겨졌다. 아카드니아 홀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이였다.

“저 머리 좀 식히고 올게요.”

더할 나위 없이 분노한 클라인 공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테라스를 향해 몸을 휙 돌렸다.

세상 누구보다 딸의 동정에 마음이 쏠린 공작 부인은 왜 노했는지 익히 알았다. 그녀는 경망스럽다며 말리는 대신 데리고 온 레이디스 메이드를 내주며 덧붙였다.

“테라스 말고 정원을 통해 녹음의 홀에서 편히 쉬렴. 오늘 내내 비워 두라고 했으니 잠깐 눈을 붙여도 된단다.”

“…네.”

도트의 대답은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네가 이 홀 안의 누구보다 아름다워. 사랑한다, 우리 예쁜 딸.”

공작 부인은 진심을 담아 격려해 줬으나, 분노가 끓어 넘치기 일보 직전인 도트의 귀엔 잘 안 들렸다.

공녀는 윗사람처럼 고개를 성의 없이 까딱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녹음의 홀로 향했다. 도망치듯 달아나는 어깨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다 싫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왜 내가 사람들의 온당한 시선을 저딴 것에게 빼앗겨야 해!!

“하…!”

공작 부인의 레이디스 메이드도 문 앞에 세워 두고 혼자 녹음의 홀 안으로 온 도트는 진정하기는커녕 더욱 씩씩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 나를 두고, 어떻게! 오로지 나만 주목받아 내일부터 제도 전역을 시끄럽게 해야 할 클라인 공녀의 귀환을! 이리도 망쳐 놓아!

“이게 말이 돼?”

어지간한 도트도, 분함을 참지 못해 소리 내어 홀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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