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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도트리샤의 찬란한 꿈 (50/148)

50화 도트리샤의 찬란한 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황궁에서 만나 에스코트를 받는 게 아니라 직접 오기까지 하다니.

공작 부인으로서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황태자 실라스는 데뷔탕트가 있는 무도회의 관습대로, 짙은 색 계열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모든 가문의 여식들을 주인공으로 환하게 돋보이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눈부시게 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도트는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의자 옆에 서 있었다.

“공녀,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단다.”

“잘 있었습니까, 공작 부인.”

“오, 저는 개의치 말고 공녀를 잘 부탁드립니다.”

실라스는 삼 년 전의 어느 날이 오기 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온화하고 깔끔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황태자와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도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다.

방금 빠져나온 본채 건물. 클라인 공작저 안에서 보이지 않는 혈투를 몇 번이나 벌인 끝에 간신히 얻은 공녀 자리.

그를 바탕으로 하여 황태자비가, 나아가 황후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데뷔탕트에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기 위해 클라인 공작이 얼마나 애썼는지도 알았다.

얼마나 로비를 잘했으면, 직접 에스코트하러 마차까지 대동하고 왔을까?

그러나 미안하지 않았다.

‘후훗, 이게 다 미래를 위한 투자이니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안 그런가요? 제가 황후가 되면 클라인 공작가도 외척이 되어 무한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거잖아요?’

공녀가 제국의 황태자와 결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참금이 필요한지는 안중에도 없는 도트.

그녀는 황태자가 자신을 에스코트한다는 장엄한 생각에 도취되어 아카드니아 홀 안으로 발걸음을 턱 옮겼다.

아, 여기에 들어가지 못해서 우울했던 날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당연하잖아, 모르가나 따위는 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걸!

“황태자 전하와 올해 데뷔탕트를 치르게 된 클라인 공녀 드십니다!”

황궁 시종의 높은 외침.

그래, 이것도 좋아. 정말이지 다 좋구나? 이런 생활을 늘 꿈꿨어. 오늘이 나의 위대한 시작이 되겠지?

도트는 한없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실라스의 팔에 자신을 기댄 채 그녀를 위한 자리에 착석했다.

미리 대기했던 클라인가의 기사 두엇까지 와서 뒤에 붙어 주니 한없이 든든했다.

내가 이긴 거야!

“감사합니다.”

“아니오. 클라인 공녀, 봄을 맞아 데뷔탕트를 치르게 된 것을 축하하오.”

실라스는 그야말로 흠 잡을 데 없는 깔끔한 어투로 공녀의 새로운 시작을 치하했다. 그러고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황제의 곁으로 갔다.

도트는 속으로 여유를 만끽했다.

후후후.

연주가 시작되기 전, 황태자 실라스가 관습대로 첫 춤을 추겠지. 그가 다시금 다가와서 ‘부디 나와 춤을 추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상대는 당연히 나고!

물론 춤을 다 춘 후엔 내게 반해서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잖아?

도트는 더할 나위 없이 신이 났다.

좋아… 좋다고. 다 잘 되어 가고 있어!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홀 안의 많은 사람이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당연하잖아? 난 고귀한 공녀니까.

도트는 맑고 고운 눈을 뜬 채로 얌전히 앉아 소개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아직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는지라 그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녀가 만물을 굽어보는 황후처럼 갸륵하고 인자한 미소를 한껏 지었을 때였다.

“…아스테인 황자님과 레이디 모르가나 님이 드십니다!”

“헛.”

눈두덩이에 칠한 예쁜 화장이 돋보이도록, 눈을 고혹적으로 뜨던 도트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잘못 들었겠지? 레이디 모르가나라니, 그런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없잖아. 왜….

머리로는 부정했으나 궁금증은 참을 수가 없었다.

조바심이 난 공녀는 슬쩍 일어났고, 고개는 문 쪽을 향해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살짝 길었던 머리를 짧고 깔끔하게 다듬은 황자 아스테인, 그리고 그 옆에 팔짱을 낀 여자. 다신 보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든 처치하려 했던 멍청한 모르가나!

세상에서 제일 싫은, 핑크빛의 머리칼이 어깨 뒤편에서 나풀거리는 꼴이 짜증 났다.

‘망할! 그분의 많고 많은 부하 중 하나에 불과한 주제에 기분 잡치게 하려고 이 자리에 꾸역꾸역 온 거야? 뭐하러? 도대체 넌 왜 내 발목을 사사건건 잡아채려고 드는 거냐고!’

모르가나가 이 자리에 오기 위해 필요한 건 황실에서 보낸 공식 초대장.

즉, 황태자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도트는 분노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

사람들이 아직 지켜보고 있다. 같은 수도원 출신임을 그들이 버젓이 알고 있는데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면 큰일이야.

만약 도트리샤 카리스가 물불 가리지 않는 다혈질이었다면, 이 자리까지 절대로 올 수 없었다.

그녀는 까다로운 성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겉으로나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러나 듣기 싫은 소리가 계속 들려오니 분통이 터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스테인 황자도 참석하셨군요?”

“예. 황태자 전하께서 칩거를 그만두고 사교계에 나오셔서 그런가 봅니다. 전엔 늘 라냐 황비님 곁에만 있었는데 드라칸 라이… 하하.”

“어머! 그러게요. 호호호.”

“레이디 모르가나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해서 오는 모습이라. 아기 적 모습이 눈에 선한데 벌써 다 크셨군요.”

“슬슬 황태자 전하의 혼사가 다시 결정되면 황자님의 일신에 관련해서도 뭔가를 정하시겠죠.”

“그러겠죠?”

‘흥!’

선남선녀가 보이면 하나로 엮기 바쁜 사람들의 소리를 귀로 흘려들었다.

‘그래, 모르가나. 네까짓 게 잘났다고 설치고 나의 실라스 곁에서 맴돌아 봐야 필요 없어. 너한테는 지금 네 곁에 있는 찌끄레기 이방인, 반쪽짜리 황자도 과분하지만.’

도트는 속으로 업신여기고 또 조롱했다.

‘뭐…. 둘이 결혼해서 멀리멀리 떠나 주기만 한다면 네 목숨을 살려 주는 일을 한번 생각해 볼까?’

물론 그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안 요소란 모조리 잡아 없애야 안심이 되는 법이니까.

그녀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독한 마음을 품었다.

‘흥, 지금 널 신임하는 황태자가 네 목숨을 손수 거둬도 재밌는 일이지. 나는 똑똑하고 잘났고 뭐든지 다 가능한 사람이라고. 너하고는 다르게! 두고 봐. 네 최후는 이전과는 달리 땅바닥이 아닌 거대한 처형대가 될 거니까. 이전의 개죽음보다 조금 낫긴 하네?’

“음….”

초청자 명단을 꼼꼼하게 훑어보던 시종을 향해, 시종장이 말했다.

“일단 시작하게. 거의 다 오셨고 시간이 임박했네.”

“예.”

도트의 예상대로, 그녀의 첫 춤 상대는 황태자 실라스였다.

레이디 모르가나란 이름으로 와선 안 될 자리에 온, 괘씸한 계집애의 생각도 잠시 잊어버렸다.

그녀는 황태자의 수려한 얼굴을 보고 또 보며 스텝을 가볍게 밟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모든 동작을 완벽하게 해내고, 짧은 탄식으로 그를 유혹하려 애썼다.

그 와중에도 정숙한 태도와 소녀다운 수줍은 미소는 잃지 않았다.

‘됐어, 성공했어.’

이만하면 제국의 황태자가 홀딱 넘어와도 무방하다.

춘정을 이기지 못하고 내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 따위를 해 줘도 괜찮은데, 아….

하지만 실라스는 춤을 추는 내내, 클라인 공녀를 살뜰히 배려하는 것 외에 다른 사적인 신호는 전혀 주지 않았다.

“고생했습니다, 공녀.”

첫 춤의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흘러가 버렸다. 악사들이 일제히 활과 악기를 내려놓는 순간이 정말 안타까웠다.

그래도 남자의 매력에 홀려 질질 끌려다니는 태도를 보여서야 못 쓰지.

공녀답게 하자.

“아니에요. 황태자 전하의 상대를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제 솜씨가 미숙하여 혹 불편을 끼쳐 드리진 않았는지 염려됩니다.”

“당신은 훌륭했습니다.”

실라스의 입가에 살짝 지어지는 의례적인 미소.

도트는 기뻐 미칠 지경이었으나, 부끄러운 듯 맞인사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다른 신체적인 접촉은 없어도 이 정도면 과정이 순조롭다.

이런 모습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면 그녀를 가르치는 교사는 물론 어머니, 아버지까지 잘한다고 칭찬해 주기 바쁘겠지?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것들은 이제 싹 다 내 아래로 들어온 거잖아. 평생 내 눈치를 봐야 마땅하지!

‘아, 전하. 어서 다음의 약속을 주셔요.’

도트는 후일을 정하는 말을 은근히 기다렸다.

“…….”

“그럼 지쳤을 터이니 편히 휴식을 취하십시오.”

황태자는 끝까지 친절한 배려를 잃지 않은 채, 공녀를 의자 근처까지 인도하고 황제의 곁으로 가 버렸다.

“네… 네.”

기분이 얼떨떨했다. 좋긴 좋은데, 뭔가 부족했다.

왜 두 번째의 권유는 하지 않은 거지? 내가 벌써 지쳤을까 봐?

춤의 두 번째 순서는 쉬고 세 번째 연주 때 하자면 되잖아?

당황하여 시선을 들어봐도 황태자의 등은 황제를 향해 똑바로 가고만 있었다. 미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눈치였다.

홀로 남겨진 도트를 향해 클라인 공작 부인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정말 잘했다, 티아나! 내 사랑스러운 공녀, 나의 보물.”

“아…, 네….”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저까지 오셔서 널 손수 데려간 것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단다. 춤도 완벽했고, 잘했구나. 조금 쉬었다가 공녀로 돌아온 축하 인사를 받아야지?”

“네, 그런데….”

“우선 물부터 마시렴. 부채가 필요하니? 어서 티아나의 몸을 식혀 주고 발도 살펴라!”

황태자 전하는요? 어머니, 이게 끝이 아니지요? 언제 또 오시기로 했는지 약속한 사항이 있다면 어서 말씀해 주세요.

도트로선 용건을 말하고 싶어 죽겠는데 사람들 눈이 있으니 목구멍 안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물컵을 받아 든 도트는 눈으로나마 실라스의 뒤편을 좇으려 했으나, 다가오는 사람들의 벽에 가로막혀 불발되었다.

공작저까지 와 줘서 날 에스코트하고 첫 춤도 추었지만, 이게 끝이라면 너무 허무한데…. 난 공녀잖아, 제국의 유일한 공녀! 당연히 뭐가 더 나와만 하지 않아…?

도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물을 다 마시자 공작 부인은 사용인들을 뒤편으로 물리고, 찾아온 이들을 한 사람씩 소개시켰다.

“호호, 인사하렴. 이미 아시지요? 클라인 공녀, 우리에겐 사랑스러운 티아나랍니다. 자아….”

“안녕하세요.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트는 억지웃음을 지은 채, 가족을 찾아서 축하하고 가장 아름다운 공녀란 찬사를 끝도 없이 듣고 의례적인 인사를 똑같이 해 줘야만 했다.

인사의 순회가 두어 번이 지나자 벌써 힘겨워졌다.

지겨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데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이들. 창의성이라고는 있지도 않지!

근처에 모여든 이들은 판에 박힌 찬탄과 인사말을 건네고는, 곧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떠들어 댔다.

“황태자 전하께서 드디어 무도회에 나와 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분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국의 한 사람으로서 행복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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