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쉽지 않아
카셀은 공작 부인의 절절한 속내를 듣고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 저는.’
그는 자기 가슴속에 담아 둔 무서운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그가 고통 속에서 보고 들은 바는 예삿일이 아니다. 간과할 수 없어, 사실 여부를 꼭 밝혀내야 한다.
자신을 로지아 국경지대에서 제도로 떠밀어 오게 했던 강한 예감과 같은 느낌이거늘.
하지만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열 달 품어서 어렵사리 낳은 아이를 요양 때문에 보내고 오 년 뒤 돌아오는 날 잃어버렸고, 한참 후에 간신히 찾아낸 어미에게… 당신의 딸이, 딸이 아닐 수도 있노라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악의 씨앗일 수도 있다고.
힘들고 어려워도, 그는 자기가 찾아낸 절망이자 진리의 불씨를 꺼트릴 생각은 없었다.
부디, 잘못된 일을 언젠가는 바로잡을 날이 오기를.
언젠가는, 반드시.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은 가여운 어머니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 * *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얼음이 녹는 계절.
드디어 봄의 황궁 무도회를 알리는 초대장이 차례차례 발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초대장은 마탑에도 한 장 닿았다.
어느 집안의 아가씨든 받으면 기뻐 날뛸 초대장은, 이곳에선 유독 조용히 책상 위에 놓여 있기만 했다.
“루키우스.”
“음?”
그를 부른 페이는 턱을 괴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 휘감아 도는 운디네의 물결은 어느 적막한 호숫가에 온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자아냈다.
정확히, 루키우스의 눈으로 보기엔 그 가운데 있는 페이의 존재만이 눈부셨지만.
오랜만에 연핑크빛 머리카락을 묶지 않고 죄다 늘어뜨린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드디어 겨울이 가네요.”
“아쉬워?”
그녀는 혹시 알까.
루키우스는 페이 앞에서 떨거나 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지금 그녀에게 일상적으로 대꾸해 주는 일도 솔직히 힘들었다.
이게 사랑인가?
정말 끔찍하고 힘든 감정이군.
그녀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느끼고 싶지 않아. 이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주기를.
그는 가만히 있어도 그녀 앞에선 자꾸 떨리는 손가락을 외투 속으로 감췄다. 그녀 앞에서 태연한 척 구는 일이 힘들어도 아예 못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요즘 기분 나쁜 거라야 뭐….
대놓고 놀려 대던 모모가 놀림을 그만두고 가끔 그를 침중한 눈으로 본다는 거였다. 거의 낫지 못할 불치병 환자를 보는 눈빛으로.
누가 보면 루키우스가 곧 죽을 존재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망할 자식! 난 진정으로 멀쩡하단 말이다.
“글쎄요.”
“왜, 눈이 안 와도 넌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 근처 대기를 적당히 얼려 놓고 눈이며 얼음을 소환하면 오래도록 안 녹아.”
기후고 뭐고 다 무시하는 가르침에도 페이의 나직한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있잖아요. 저, 거의 말한 적 없죠? 수도원의 일요.”
“…어?”
그가 감당하기 힘든 화젯거리.
루키우스는 그레이스 수도원의 말이 나오자, 평정심을 잃고 몸의 중심까지 살짝 흔들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끔찍해도 잊어서는 안 되는 그의 원죄인 것을.
“저요, 어릴 때 심하게 다쳐서 어떤 분의 도움으로 그레이스 수도원에 맡겨졌거든요. 그 이후로 마탑에 오기 전까지 쭉 그쪽에서 지냈어요.”
“…….”
“거기서 제일 싫어한 계절은 겨울이었어요. 지금 제가 물과 얼음을 다루는 데 가장 익숙한 걸 생각하면…. 좀 우습죠. 굶으면서 살진 않았지만,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었어요. 특히 빨래할 때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페이의 연둣빛 눈동자에 지난 고통과 아릿함이 가득히 담겼다.
“겨울에도 일을 했구나.”
“최대한 손을 안 대려고 나무 빨랫방망이 끝으로 빨랫감을 쿡쿡 쑤시기만 해도 손이 물의 냉기에 영향을 받아서 가렵고 얼어붙었거든요.”
루키우스는 그녀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힘든 일 있었으면 서슴없이 다 말해. 네 아픈 기억을 털어 버릴 수는 없어도 들어줄 수는 있으니까.”
크헤케켁!
바구니 안에서 눈만 뜨고 루키우스의 동정을 살피던 모모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냉혹하고 무시무시한 주인이 이런 소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오늘은 광포한 루키우스도 상념에 젖은 페이도, 모모를 돌아보거나 웃어 주지 않았다.
날은 점점 따뜻해지는데, 두 남녀의 기분은 비가 오는 공원을 떠돌듯 축축하고 아련했다.
“솔직히 너무 많았어요. 아, 제일 슬펐던 날은 알겠네요. 창고 관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보관했던 사과가 거의 다 썩었어요. 그리고 감자도요. 싹이 나고 곰팡이가 스는 바람에 다 버려야만 했거든요? 그 추운 겨울날에 울면서요….”
“…….”
페이의 덤덤한 눈빛이 진한 슬픔으로 물들었다.
“수녀원장님은 누구에게도 죄를 묻거나 탓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날 이후로, 보리가 나오는 계절 직전까지 먹는 양은 현저하게 줄어 버렸죠. 그때부터 먹을 거에 강박증이 약간 생긴 것 같아요.”
“뭘 어쨌는데?”
“물 한 병 정도는 버릇처럼 방에 매일 떠 두고 그랬어요. 먹을 건 없어도 물이 있으면 사람이 며칠 살 수는 있잖아요.”
맛있는 과일을 다 따 놓고 굳이 시큼한 피클통을 찾은 것.
그것도… 조금 영향이 있으려나.
먹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아껴서 먹어야 해. 입에 넣을 수 있는 거라면 먹기 좀 껄끄러워도 내 근처에 두자.
루키우스는 초라한 과거 때문에 서글퍼하는 페이를 보자, 누구를 향하는지 모르는 혐오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절반 정도는 자신의 지분이 있으나, 나머지 절반은 여러 희생양에게 나누어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드래곤은 다시금 미쳐 날뛸지도 모르니.
그 희생양 중 몇몇은 당연히 가짜 공녀와 그녀를 끼고 희희낙락 도는 멍청이들이었다.
“페이.”
“네?”
루키우스의 입술이 무거운 말을 머금었다.
“너는 만약 가까이 있던 사람이 널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떡할래?”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사람은 단 한 명.
도트리샤….
성녀 카피아의 배신과 음모도 놀랍지만, 노골적으로 흉수를 뻗쳐 온 나의 끔찍하고 아름다웠던 친구.
나만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너.
내 자리를 강탈하고 공녀로 살기 위해 기어이 날 죽이고,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 지금도 독한 흉계에 성공했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음모를 또 꾸미고 있을 너.
외로웠던 내게 다가와 친구라는 새로운 기쁨을 알게 해 주고, 내 아팠던 옛날 일을 함께 울어 주고, 루비 펜던트에 입술을 고스란히 맞추면서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던 너. 너, 너….
도트.
나는 너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너란 존재는, 내게… 무엇이지?
페이는 분노인지 회한일지 모르는 감정을 무한히 곱씹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그동안 루키우스도, 모모도 미동 없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글쎄요. 지금 생각으로는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요. 지금 생각으로는 마주하면 반드시 죽이고 싶어질 것 같거든요? 목숨을 취하든, 명예를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든요.”
“…그래.”
루키우스의 흑안이 실망보다는 약간의 체념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하는 말의 대상이 그가 아님은 안다. 그녀의 자리를 강탈한 그 가짜 공녀 이야기겠지.
그래도,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또 그녀의 따스한 손이 자신에게 닿아 오길 원했다.
어떤 식으로든, 용서를 받을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쟁취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완수해야지.
페이는 어느새 도트가 아닌 모리스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때가 되어 봐야 알 것 같아요.”
“뭐?”
“저요, 예전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게 용서를 빌 리가 없어요. 저에 대한 기억을 몽땅 잃었거든요, 본의 아니게요.”
그녀는 막연하게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과 도트를 제외하고, 누군가가 또 과거의 기억을 가져 지금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켰을지라도.
그 안에 모리스 클라인은 없으리라고.
그의 심경이 변한 이유는 맏형인 카셀의 귀환과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신기하죠? 그 사람은 예전에는 전혀 보여 주지 않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 지켜보고 싶어졌어요. 그가 저한테 한 일을 뉘우치지 않더라도 올바르게 되기를요.”
“용서하진 않지만,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길 바라는 건가?”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리스 클라인은 과연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기사가 될까.
모르겠다. 알 수 없어. 그렇지만, 기사를 꿈꾸었다가 기사의 종자가 되어 지금 겪고 있는 그의 경험이, 부디 현명한 길을 열어 주기를.
누군가의 자리를 장난으로 흔들어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고 행하지 않기를.
최소한 ‘자신의 유희’를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 않길….
나는, 당신을 영원토록 오라버니로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망하지 마, 모리스 클라인. 부디 전생과 다른 길을 걸어가도록 해. 그만큼만 한다면 난 당신이 속죄했다고 생각할게.
클라인 공작저와 성녀에 관한 생각을 잠시 접어 둔 그녀는 황궁에서 온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약해졌던 루키우스의 눈빛이 금세 들끓었다.
“갈 거야?”
“네.”
제국의 황실은 올해 봄의 무도회를 데뷔탕트 겸으로 삼겠다고 작년 겨울 무렵에 선언했다.
따라서 가을을 생각하고 느지막이 준비하던 귀족들은 긴 겨우내 서둘러 드레스를 맞춘다, 장인을 찾는다며 난리를 피워 댔다.
페이는 막연히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바라 가헬…. 그녀도 오겠지.’
데뷔탕트의 계절은 바뀌어도 햇수는 그대로니 올 것이다.
부디 그녀의 삶도 조그마한 변화를 얻어 달라졌으면 좋겠는데.
페이는 봉투의 인장을 뜯고 초대장을 확인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왜. 뭐 있어? 어디 봐.”
그녀는 루키우스에게 순순히 넘겨주었다.
봉투 안엔 멀쩡한 초대장과 한 장의 서신이 동봉되어 있었다.
“하?”
또 다른 서신에 적힌 내용은 간결했다. 긴히 의논할 사항이 있으니 황궁으로 와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황태자로부터.
루키우스는 서신을 돌려주며 투덜댔다.
“용건이 있는 쪽이 당연히 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어딜 다른 용건에 끼워서 보내?”
“…후후, 그랬다간 더 큰일이 날 걸요?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오시면 마탑이 들썩들썩하고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늘어날 텐데요.”
“황태자가 대수인가?”
“루키우스도 참, 마법사들이 세속에 관심 없다는 말 다 거짓말인 거 알면서.”
마법사의 성향은 천차만별인데, 남에게 관심받고 싶어 하는 독특한 성향의 소유자들은 그야말로 골 때리는 짓을 수시로 벌이고 다녔다.
현재 마법사를 꺼리는 분위기에 그들이 0.5할 정도는 기여하지 않았을까.
“무슨 상관이야.”
“뭣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너무 잘생긴 게 문제가 되죠. 저도 정신을 놓고 있으면 눈빛이 흐리멍덩해지던걸요.”
“취소. 안 오는 게 낫겠다.”
그도 뻔히 알았다.
일국의 왕자도 아닌 제국의 황태자가 왔다 갔다 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는 것쯤이야. 그거야 뭐, 카론과 겨루기 위해 친히 그 나라의 수도를 덮치면서 겪었….
무진장 아픈 기억을 떠올린 루키우스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