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진실에 접근하는 자
홀로 남은 카셀은 그저 헛웃음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습격? 그것도 우리 가문만을 노리고 날아온다…라?’
말이 되는가. 제도 라피스는 아칸 제국 한가운데에 위치하기에 드래곤이 날아오는 동안 존재가 포착되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첫 만남부터 그와 늘 틀어지기만 하는 티아나의 말이라 더 꺼림칙했다.
그는 집무실로 돌아가 서랍 가장 밑 칸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최근 친자 감별의 추세가 주신전이 아니라 마탑이라 했지.’
마탑에서 만든 진실 판독의 석상.
주신전으로 하나를 보냈고, 마탑에 하나가 더 남아 있다고 했다. 아무나 의뢰할 수 없고 가격은 훨씬 비싸다지만….
‘물건이 아닌 증언의 진실 판단 여부도 가능할 것인가?’
마탑을 떠올리니 자동으로 페이의 얼굴도 떠올려졌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그녀에게 간 김에 만나자고 하긴 곤란한데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안 돼.
머리로는 단념했으나, 페이가 수줍게 웃는 모습을 떠올리니 다 집어치우고 그냥 좀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 어렵군.’
공녀가 가끔 쓰는 실크 리본을 미리 하나 빼돌린 카셀은 일어섰다. 내년 늦여름에 일이 터진다고 해도, 대륙 전체에 남은 드래곤의 동향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서둘러야 해.
카셀은 만사를 다 제쳐 두고 비밀리에 마탑으로 향했다.
그의 이름값과 넉넉한 돈이 있어서인지 석상을 이용하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이것인가.’
그는 공녀의 실크 리본을 석상 앞에 놓고, 심호흡을 했다.
일단은 단 하나의 질문만 던질 작정이었다.
카셀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힌 그 질문인 그것을 물을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지.
“우리 가문, 클라인 공작가의 저택에 내년 무렵 드래곤의 횡액이 닥친다고 누군가가 예언했다. 이 실크 리본의 주인이지. 그것이… 사실인가?”
진실 판독 석상을 장식한 가고일의 눈이 하얗게 변하다가 곧 녹색으로 바뀌었다.
‘맙소사!’
가고일의 눈이 빨갛게 변하면 거짓, 녹색은 진실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곧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온통 녹색으로 물들었던 가고일의 눈이 다시 하얗게 되더니, 왼쪽은 하얀색 그대로고 오른쪽만 녹색으로 변했다.
카셀은 당황하여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지? 아…! 이것은?!”
가고일 앞의 네모난 판에 하얀 글씨가 한 자 한 자 새겨졌다.
<그것은 잊힌 과거의 유산이다.>
“뭐라고?”
그는 되물었으나, 글씨가 다 써진 후 가고일의 눈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탑 측에 물어 다시 해 보려 했으나 석상의 반응은 몇 번을 노력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주신전의 신성 마법을 본따 만든 거라 사람이나 물건이 아닌 ‘현상’에 대한 건 판별이 어렵다는 설명을 추가로 들었을 뿐이었다.
남겨진 문장, <잊힌 과거의 유산>이라는 말이 열쇠일 터.
카셀은 그 말을 해독하려 애썼다.
‘잊힌 과거의 유산? 그럼 우리 가문이 먼 옛날에 당한 일이란 뜻인가?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럼 그 일이 이미 일어났는데 모든 사람이 잊었다는 뜻인가?’
말은 짧고 해석은 없으니 그가 알아서 풀어야 할 숙제였다.
‘나는 분명히 내년 무렵이냐고 물었고 석상은 부정하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저히 모르겠군.’
그는 여러 가정을 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를레앙 공작가라면 몰라도, 클라인 공작가의 역사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만약 드래곤이 공작저를 덮친 사건이 진짜로 있었다면 함구령을 내려 누구도 모르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디선가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을 거고 남 말을 떠들기 좋아하는 측에서 구전으로 내려져 왔겠지.
역사가 오래된 오를레앙 공작가에서도, 꽤 윗대의 선조가 술에 취해 황제의 동상에 오줌을 쌌다가 태형을 당한 망신을 버젓이 다 아는 지금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가 연구해 볼 다른 주제는 어떤 드래곤이 공작저를 습격해 오냐는 것이었다.
그는 황궁으로 돌아가 티세르 대륙이 탄생한 직후 거한 모든 드래곤을 조사했다.
아칸 제국이 세워질 무렵, 고대 드래곤은 거의 멸종했다. 정확하게는 소멸했다고 봐야 하는데 주신과의 전투에서 모조리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드래곤은 루키우스 하나인가?’
고룡 루키우스.
강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인간사에 유독 간섭을 잘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최후는 아칸 대륙 전, 샤르프 제국 말기에 황제 카론과 싸우다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혹자는 죽었다고도, 또 봉인되었다고도 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
‘루키우스라….’
문득 겹치는 이름이 떠올랐으나 카셀은 고개를 흔들었다.
작금의 세대에선 잘 안 쓰는 이름이지만, 위험한 드래곤이 구태여 인간의 모습을 하고 마탑에서 조용히 지낼 리가 없다. 행여 그 드래곤이 약간 미친 상태라면 또 모를까.
고대 드래곤을 제외한 드래곤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중 셋은 바다에 있어 거의 동화된 상태로, 관찰되지 않은 지 수백 년이 넘었다. 설령 동화가 덜 되었다고 해도 바다를 버리고 제국 한복판으로 뛰쳐나올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나머지 일곱 중 토벌이 확인된 게 세 마리, 나머지 네 마리 중 둘은 강력한 마법으로 봉인되었고 둘 중 하나는 본 드래곤이 되어 황궁 지하에 박제되어 있었다.
카셀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다.
‘운신이 가능하며 생존 여부가 확실한 드래곤은 하나만 남는데.’
그가 몇 달 전까지 머무른 로지아 국경지대, 그쪽의 설산에 있는 스노우 드래곤 하이사뿐이었다.
“하이사가 습격을…?”
카셀은 혼잣말을 했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로지아 국경지대는 그가 사 년이나 근무한 곳이라, 연구를 안 했을 리가 없다.
스노우 드래곤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하이사한텐 추운 환경이 최적이며, 설산에서만 활동한 지 또 수백 년째.
즉, 제도까지 날아올 확률이 거의 없었다. 나와 봤자 추위에만 강한 하이사한테는 극히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공녀가 말한 시점은 겨울도 아닌 늦여름이다.
“그럼 종적도, 생사도 확인되지 않은 드래곤은 루키우스 하나로군.”
카셀은 골머리를 앓았다.
‘봉인이 되었으리라’고 다들 추정만 할 뿐이지 흔적도 없이 전설 속에 파묻힌 고대 드래곤이라.
오히려 하이사보다 확률이 적다.
“또 결론이 나지 않는 일인가.”
오를레앙 공작가가 어떻게 랏셀가에 파혼을 종용했는지, 왜 그곳과 휘안테 후작가가 싸우는지 이유도 모르는데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카셀은 깊은 한숨을 쉬다가 그래도 얻은 게 있음을 깨달았다.
도로테아, 너, 도트리샤.
역시 이상하다.
단순히 수상쩍은 게 아니라 이젠 숫제 가문에 먹구름을 몰고 올 존재로 느껴졌다. 꿈? 꿈으로 주신께 예언을 받아 드래곤의 습격을 정확하게 점지해?
‘역대 어느 성녀도 그런 식으로 예지한 적은 없어. 사기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있었거나 벌어지리란 자체를 무슨 수로 알았지? 우리의 앞날을 미리 보고 온 영험한 존재란 뜻인가?’
황태자의 비호를 받는 데다, 블루 로즈 기사단의 단장인 그도 못 알아낸 일이거늘.
클라인 공작저의 공녀에게 무언가가 있다, 분명히.
그는 어느새 티아나의 존재와 공녀로 자리매김한 도트리샤, 도로테아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분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우습게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음?”
파지직-
일어서려 했던 카셀의 뇌리에서 찌릿, 하며 무언가가 떠올려졌다.
눈앞에 드러난 환상 속에서 그는 아버지가 보낸 긴 편지를 읽고 있었다.
- …란다. 우리도 많이 놀랐으나 티아나의 배려가 더 곱지 무어냐.
이제껏 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에이나의 상실감을 위해 공표를 늦춰 달라니. 우리야 그 에이나가 공작저에 계속 있든 아니든 상관이야 없지.
다만 티아나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싫다고 하니 수도원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
“윽…!”
머릿속에서 엄청난 열기가 일거에 치솟았다.
뭐지? 이것, 무슨 소리야. 도…로테아, 도트리샤, 그 앤 자기가 자기 에이나 역할을 했는데 수도원으로 되돌려 보내? 있을 수 없는 말을 왜 하는….
“크윽!”
눈앞이 아찔하고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도 그의 환상 속 카셀은 공작의 편지를 끝까지 읽고 있었다.
- 내, 폴을 시켜 그 아이에게 금화 주머니를 내주게 했다. 수녀원장도 그 딸인 사제도 사고로 죽었고 수도원에 보수할 곳도 많으니 넉넉히 쓰라고 말이다.
아무튼 이 년 동안 고생이야 톡톡히 했지 않으냐. 여긴 걱정할 일 없고, 너도 내년 즈음엔 제도로 귀환하라고 황제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평생 함께하자꾸나.
돌아오면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티아나가 와 있단다….
“으… 으어억!”
카셀은 열이 주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책상 위에 풀썩 쓰러졌다.
수 시간 후, 그는 의식을 되찾았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떠올린 걸까.
내가 모르는 일인데 어째서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있었지?
마탑에서 겪은 일의 진위가 무언지 곧바로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카셀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공녀가 그랬던 것처럼 공작 내외만 모셔 놓고 운을 뗐다.
“아버지, 어머니. 도로테… 아니, 티아나의 데뷔탕트를 뒤로 미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면밀하게 확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뭐어?”
“…….”
공작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으나, 공작 부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우리 티아나가 오로지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 너무하는구나.”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게다가 각하께서도 티아나가 사모하는 황태자 전하의 에스코트를 받게 하려고 불철주야 애를 쓰시는데 그걸 다 물거품으로 만들겠다는 소리니? 가을로 미루라고? 안 돼. 절대로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것만은 못해!”
공작 부인의 역성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어머니.”
“카셀, 난 이 세상 무엇을 준대도 너와는 바꿀 수 없다. 너는 우리 가문을 잇고 지켜 나갈 존재니까 내 목숨이 필요하다면 응당 줘야겠지.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니?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다오. 내가 티아나의 귀환을 기다린 시간은 그 애를 낳고 멀리멀리 떠나보낸 순간부터란다!”
공작 부인이 대놓고 카셀을 찍어 누르려고 했다면 그도 맞섰을 것이다.
클라인 공녀.
부모님의 하나뿐인 딸과 그의 여동생으로 자리매김한 존재가 만약 영혼을 훔친 교활한 악마라면 사교계에 얼굴을 내보이는 일은 신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카셀의 온당한 의심이었다.
“…….”
아들이 대꾸하지 않자 감정이 격해진 공작 부인은 끝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카셀…. 나는, 내 목숨이 지금껏 붙어 있는 이유는 오로지 티아나 때문이란다. 그 아이에게 번듯한 신분을 돌려주고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고 싶다는 게, 이왕이면 황태자 전하의 곁에 세우고 싶다는 소망이 그토록 나쁜 거니?”
“어머니.”
“그래, 안 될 수도 있지. 나도 안다. 그게 황실이지…. 그런다고 해도 일생에 단 한 번인 데뷔탕트, 소녀 마음으로 황태자 전하의 에스코트를 꿈꿀 수도 있지….”
“…….”
“어미는 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고 싶고.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라 부득이하게 단념해야겠니…? 어디 한번 네 생각을 말해 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