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과거를 아는 자
다만 노련한 공작 내외의 눈으로 볼 때 두 뺨이 미약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언가 중대한 말을 하려고 둘 다 불렀으리라.
“왜 그러니, 우리 딸?”
클라인 공작 부인은 공작을 살짝 흘겨보며 물었다.
티아나가 생각을 바꾸어 그레이스 수도원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낱낱이 다 털어놓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간 말이 나오는 게 싫다고 했기에 잠자코 두고 봤을 뿐이지.
티아나가 증언하는 순간, 공작 부인은 겨울이고 뭐고 교만한 수도원으로 쳐들어가 완전히 뒤집어 놓을 심산이었다.
내 귀한 딸을 괴롭힌 자들,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지옥이 어떤 맛인지 톡톡히 알게 해야 마땅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처절하게 복수해 줄 거다!
그러고 보면, 새삼 티아나는 공작 부인을 많이 닮았다. 가늘고 연갈빛인 머리칼도 그렇고 백옥처럼 하얀 얼굴에 서린 기품도.
눈이야 공작 각하와 비슷하다지만 내가 배 아파 낳은 내 딸인걸. 날 많이 닮아 예쁘고 사랑스럽고 어딜 보아도 공녀답지, 암.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지만 딸을 향한 공작 부인의 애착은 갈수록 정도가 더해 갔다.
그녀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하나뿐인 딸을 향했다.
그리고, 소중한 공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저… 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요.”
“뭐?”
도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꿈을 꾸었어요. 주신께서 제게 무섭고도 확실한 예언을 해 주셨는데, 아뇨!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두 분이 일이 닥쳐오기 전에 아셨으면 해서요, 제 부모님이잖아요. 다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 주진 마셔요.”
“주신? 꿈? 티아나야, 자세히 말해 보렴.”
수도원의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공작 부인보다 공작이 안색을 굳혔다.
‘그래, 이거야. 다른 일은 다 변해도 드래곤이 공작저를 습격하는 크고 무서운 일이 달라질 리가 없잖아?’
그녀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그리고 어차피 그 드래곤은 잠시 버텼다가 푹 쓰러져 무사히 토벌되는걸. 그때 기사 몇 명만 다쳤지 죽은 사람도 없고 딱히 위험하진 않아.’
도트로선 내심 여러 가지를 계산하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먼저 예고하면 내 위상이 더 올라가는 거야 뻔하지.’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앞으로 사교계에 닥칠 일 몇 가지를 예언하자는 속셈이었다. 과거의 일이 무심하게 흘러가게 두느니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영향력을 더 늘려야지.
첫 번째는 이것, 검고 거대한 드래곤의 공작저 습격.
두 번째는 휘안테 후작의 두통약 재료 맞추기.
시간상으로는 이게 제일 먼저 닥쳐올 일이다.
봄의 무도회가 열리고 시간이 좀 지난 뒤, 휘안테 후작은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리고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는다.
알고 보니 진통을 위해 쓴 약초가 비슷하게 생긴 마비 효과를 보이는 독초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입이 돌아가 끅끅거리고, 사교계에도 한동안 못 나오고 난리였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입이 비뚤어진 모습이 너무 웃겨서 안 웃는 게 힘들었단 말이야.’
세 번째는 퀘이사 백작가의 품질 미달 병장기 납품의 건.
장비를 다량 주문한 그들은 제련이 제대로 안 된 철로 만든 물건을 받게 된다. 비가 심한 장마철이 오자, 무구들은 일제히 망가지고 만다.
퀘이사 백작가의 영지 근처엔 광폭한 마물이 자주 출현하기에, 이는 큰 낭패였다.
이 일은 공작에게 귀띔해 여름이 오기 전에 여분의 장비를 대량 마련케 하고, 그때 도와주자고 하면 이득을 보지 않을까.
다른 자잘한 일들도 떠올랐으나 가문의 위세 등을 생각하면, 나머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뭐, 바바라 가헬 따위가 지방 영지에 팔리듯 시집을 갔다가 풍토병으로 죽은 흔한 일 같은 건 알려 줘서 어디에 쓴단 말이야?
자기가 운도 신분도 없었던 걸 나더러 어쩌라고. 걔는 사실 그 결혼 피한다고 해 봤자 갈 곳도 없으니까 무덤 자리나 빨리 알아봐야지.
‘후후, 좋아.’
도트는 맞잡은 두 손을 가늘게 떨며 연기를 시작했다.
“우리 공작저에 앞으로 일 년 반 후, 늦여름…. 제가 이곳에 왔을 무렵이 되면… 무서운 드래곤이 이곳의 하늘을 뒤덮을 거예요!”
“뭐, 뭐라고 했니, 티아나?”
“네가 그 꿈을 꾸었다는 거냐? 주신께서 음성으로 알려 주시고?”
무서운 말에 질겁한 부인과는 달리 클라인 공작은 사뭇 진지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티아나는 주신의 보호 덕분에 살아난 몸이다.
여섯 살 때 겪은 흉사로 인해 주신전을 원망한 적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별 탈 없이 돌아왔지. 이토록 사랑스럽고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말이다.
고생을 많이 한 티아나를 긍휼히 여겨, 주신께서 약간의 예지력을 주셨다고 해도 이상치 않다.
“네! 하지만 주신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아무도 죽지 않고 무사히 재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저도… 어디론가 달아나지 않고 가문을 끝까지 지키겠어요.”
공녀는 작은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었다.
“오, 그게 무슨 소리니! 드래곤이라니…. 안 된다. 내년 늦여름이라고 했니? 초여름이 오기 전에 내 너를 영지의 안전한 성채로 대피시킬 것이다!”
클라인 공작 부인이 처절하게 흐느꼈다.
할 말을 다 마친 도트는 다가가서 그녀를 끌어안고 다정히 속삭였다.
“저는 두렵지 않아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공녀,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이니까요. 제가 살 곳도, 죽을 곳도 여기뿐이에요. 죽음을 피해 달아나느니 클라인의 영광된 이름을 끝까지 지키겠어요.”
“티아나, 내 딸아…. 내가 너를 지켜 주마!”
‘됐어.’
도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드레스 안의 종아리 부근은 덜덜 떨려 왔다.
이만큼 대비를 했는데도 두려웠다.
‘불안해, 자꾸 무서워 미치겠어.’
보는 눈이 많은 몸이라 암흑 길드 중추엔 발도 못 들였고, 겉으로는 평범한 의뢰를 받는 길드에 문의만 하나 넣어 놓았다.
특별한 건 아니고 특정 영지에서 나는 석류를 좀 먹고 싶다는 의뢰였다.
도트는 공녀 신분이라 혼자 다닐 수 없어 그 보고는 당연히 공작 부인에게 들어갔다. 그런 거야 내게 물으면 당연히 구해 줬겠지, 하며 서운한 말투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었다.
“제 힘으로 뭔가 해 보고 싶었어요. 전엔… 제가 뭘 바라는지도 잘 모르고 살았거든요. 작은 성취를 이루는 일이 저를 즐겁게 만들어 주고 있어요.”
“알았다. 그런 것쯤이야 앞으로는 네 마음대로 하렴.”
됐어. 이런 식으로 안심시켜 놓고 차근차근 발을 넓혔다가 암흑 길드에 의뢰하면 돼.
…그렇게 계획을 철저히 짰는데도 도트는 잠을 자다 놀라서 소스라치게 깨기 일쑤였다. 그 원인은 당연히 하나.
‘모르가나! 다 너 때문이야.’
설마, 아니겠지?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그래야만 하지만. 만약 숙적 모르가나에게 과거의 기억이 있어 그 애도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한 거라면!
그렇잖아? 그 바보가 뒤늦게라도 기억을 깨우쳐 마탑으로 달려갔다면 말이 돼.
예전엔 자기 재능을 알았는데, 공작저에 가는 게 더 좋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
‘그냥 마탑에만 처박혀 있다면 몰라도 황궁에 발을 들인 이상 뭔가를 하려고 들겠지.’
괘씸한 계집애!
‘휘안테 후작의 약과 퀘이사 백작가의 병장기 일에 입을 댄다면 그게 에이나일 적 기억이 남았다는 명확한 증거야. 두고 보겠어!’
‘모르가나, 너는 나를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둔한 머리를 굴려서 발버둥 쳐 봤자 네 인생은 내 힘으로 끝낼 거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민함이 극에 달한 도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무서운 말을 털어놓은 공녀를 침실로 데려가게 한 공작은 엄히 말했다.
“부인, 티아나가 방금 한 말은 영원히 잊어 두시오.”
“여보.”
“악몽일 수도 예지일 수도 있지만, 티아나의 말마따나 함부로 퍼져도 되는 내용은 아니오. 드래곤의 습격이라니 그런 흉한 말을 어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둔다는 말이오?”
“그야 그렇지요.”
꿈에서 보았다라.
증거 하나 없는 말이지만 티아나가 한 말이라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티아나를 눈앞에 두고 엉뚱한 아이를 공작저에 들여 허송세월을 보낼 뻔하지 않았나.
그 우연과 엇갈림을 생각하면 은근히 믿고 싶어진다. 그게 진짜일 경우 문제가 더욱 커짐에도 불구하고 말이었다.
공작은 음성을 더욱 낮췄다.
“당분간 다른 말 말고, 티아나를 잘 보듬어 주오. 좋아하는 것도 듬뿍 안겨 주고.”
“알겠어요.”
“…걱정할 필요 없소, 부인. 내 힘을 써서 우리 티아나의 데뷔탕트 때 꼭 그분이 에스코트할 수 있게 만들겠소.”
공작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의식해 깜짝 놀랄 발언을 했다.
“정말인가요? 가능하다면 꼭 좀 부탁해요. 제가 전하를 단독으로, 따로 찾아뵙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라요.”
클라인 공작 부인은 반색했다.
그래, 티아나가 한 말이 남편의 말처럼 진짜 예언일지 악몽에서 비롯된 결과물인지는 모르지.
어차피 그 일은 내년에 벌어질 거고, 당장 닥쳐올 봄의 무도회에서 우리 딸이 주인공이 되는 일이 더 중요해!
“걱정하지 말고 티아나나 잘 다독여 주구려.”
부인을 안심시킨 공작은 곧바로 카셀을 찾아갔다.
사람 눈이 다분한 공작저 내에서 의논하느니, 차라리 바깥에서 말하는 편이 낫겠지 싶어 서둘러 장소를 잡았다.
황궁의 조용한 응접실에서 아버지가 꺼낸 말을 들은 카셀의 눈썹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말을 했습니까.”
“부인한텐 잊으라고 했으나 너와는 의논해야겠더구나.”
“네.”
아버지와 어머니껜 서슴없이 말하면서 나는 그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라.
카셀은, 도로테아였던 티아나가 왜 자신을 지극히 꺼리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친자 감별을 받을 때 실크 로브 건도 그렇고.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마다 사사건건 비밀에 부쳐 달라고 요구하는 행태는 뭐지?
대관절 뭐가 켕기길래 그토록 기밀을 요한단 말인가. 어차피 사교계에 본격적으로 나서면 공녀의 모든 것이 가십거리가 되고도 남는데.
영 수상쩍고 의심이 갔다.
더군다나 이토록 큰일을 정작 기사단장인 카셀은 부르지도 않고 부모님께만 고하다니, 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아직 서로 떨떠름한 사이라고는 하나 나름대로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고 있거늘.
뭣보다 카셀은 바로 전날에 공작저에 종일 있었다.
차라리 그때 말을 했더라면 대처가 빠를 걸, 왜 굳이 하루를 꼬박 걸렀는지 싶었다.
“드래곤의 동향은 민감한 일이라 대외 극비라지. 네 선에서 조용히 알아볼 수 있겠느냐?”
“당연히 가능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들을 파견하여 알아봐야 하니 시일은 좀 걸리겠습니다.”
“으음.”
카셀은 씩씩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몇백 년 전 기준으로 남은 드래곤이 열 마리도 되지 않고 멸종 전 단계가 확실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 내 너를 믿으마.”
그 말을 남기고 공작이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