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어
“네?”
아스테인 황자가?
그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었다.
“치렁치렁한 옷을 입는 거야 이골이 났으니까 손에서 불과 얼음을 날릴 줄 알게 되면 멋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하하….”
페이는 작게 웃었다.
루비 펜던트를 가진 이유로 마법의 재능이 있는 줄도 몰랐을 때, 그녀도 한 번쯤은 그런 공상을 했다.
내가 어느 날 위대한 깨우침을 받아서 로브를 뒤집어쓰고 마법을 쓰면 수도원의 모두가 놀라겠지? 뭘 하면 좋을까?
수도원 지붕에 올라가서 맛있는 닭들을 만들어서 바닥으로 내려 보내는 마법이면 좋겠네. 그런 마법이 없으면 꼭 개발해야지, 모두가 굶지 않게 말이야!
열 살도 되기 전의 일이지만, 막 떠올리니 좀 창피했다. 마법에 대해 알게 된 지금으로선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걸 안다.
살아 있는 생물체를 만드는 마법은 세상에 없다.
정령의 혼을 안착시켜 움직이게 하는 골렘이나 죽은 이를 이용하는 무시무시한 사령술이라면 또 모르지만. 소환술도 빼고.
그리고 마법사들이 로브를 주로 입는 이유는 연구 때문에 꼬질꼬질해진 외양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멋있어 보이려고가 아니라.
그간 황자의 사소하고 소년다운 마음을 전혀 몰랐던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마법은 못 써도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황자님. 얼음이야 손에서 던지면 되고 불은 깡통에 담아서 휘두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파엘 경, 그 무슨 위험한 소린가!”
보다 못한 카셀이 나서서 라파엘의 입을 막았다.
멀쩡하게 잘 있는 아스테인에게 이상한 짓을 부추기려 들다니 기사 자격이 없다. 얼음 던지는 것도 그렇지만 불놀이 따위에 관심을 물들게 하면 큰일인데.
“그냥 해 본 말이었습니다.”
“카셀 경, 라파엘 경을 탓하지 말아 주세요.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나와 놀아 주는 터라 무료함을 잊게 해 줘 늘 고마울 따름입니다.”
라파엘, 너는 오를레앙가의 수상한 일과 관련이 없겠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찜찜함을 애써 접어 둔 카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앞으로도 이상한 것은 황자께 일절 고하지 말아 주시오.”
“하아, 얼음 던지기는 겨울에 호수에서 파내서 하면 되고 불로 들판을 태우는 일도 봄의 농사를 위해 중요한 연례행사인데. 황족의 일원으로서 황자께서 마땅히 아셔야 할 일 아닙니까?”
라파엘은 거짓으로 낙담한 척하면서 카셀을 놀려 댔다.
“…….”
거기에 대고 할 말이야 당연히 없겠지.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는, 둘의 사이가 솔직히 웃겼다.
‘푸훗. 카셀 오…라버니, 으응,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우리 둘의 피는 이어져 있으니까. 아무튼 저는 오라버니께서 라파엘 경 같은 사람에게 약할 줄은 몰랐다고요.’
페이는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카셀과 그를 놀려먹는 라파엘을 번갈아 보았다.
카셀이 제도에 사 년을 돌아오지 않았다는데 같은 공작가의 후계라 그런지 친하긴 친했구나. 이런 장난도 칠 줄 알고.
그나마 황자 앞이라서 언행을 절제하고 있을 텐데, 둘뿐이라면 더 웃긴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멀찍이서 구경하면 재밌겠어, 정말.
아스테인이 대화의 물꼬를 편하게 터서 그런지, 대화의 분위기는 괜찮게 풀어졌다.
눈앞의 화려하고 각기 다른 잘생긴 얼굴 셋과 눈이 잠깐잠깐 마주칠 때마다 정신을 차리게 되었지만, 오늘 만남에 대한 감상은 하나였다.
역시 이 셋은 좋아.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종업원이 들어오더니 페이를 향해 꽃다발을 내밀었다.
싱그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튤립이 얇은 포장지 안에 가득했다.
“아….”
“받으세요, 페이 양. 오늘의 만남을 축하하는 의미로 준비했습니다.”
카셀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한겨울에 튤립을요?”
그녀는 화려한 꽃다발을 받으면서,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그녀는 루키우스가 다짜고짜 내미는 꽃다발을 받아야만 했다.
새하얀 겨울을 보드랍게 녹여 줄 것만 같은, 진홍빛과 연보랏빛이 들어간 희귀한 장미 꽃다발이었다.
페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이건 또 뭐죠? 설마, 백 년에 한번 피는 그런 꽃인가요?”
“아니야, 그… 그냥 꽃이야.”
“왜 주는 건데요?!”
그녀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 일전에 그가 황궁으로 같이 가 주던 날 받았던 피로 회복제 있잖은가.
그건 피로 회복제가 아니라 엘릭서였다!
더 허망한 건 마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무심코 꼴깍 마셔 버렸다는 점이었다.
엘릭서를 통째로 마셔? 다친 곳도 없는데? 너무너무 아깝게!
마시고 나서 이상하게 마력이 증강한 것 같은 기분에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돌아와서 빈 병을 버리기 전에 보니 ‘엘릭서’라고 쓰여 있던 게 아닌가!
혹시 잘못 준 게 아닌가 싶어 물었더니, 루키우스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너한테 주고 싶어서’라고 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엘릭서를 홀라당 다 마신 마법사니까 넌 앞으로 더 잘 될 거라고.
모르고 그랬다지만 엘릭서를 그런 식으로 써 버리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아쉬운데.
루키우스는 우물쭈물대며 더 황당한 말을 꺼냈다.
“…일이야.”
“네?”
“오늘이 마탑 창립 기념일이래. 그… 그냥 꽃이니까 부담 없이 받아.”
“알고 봤더니 장미가 아니라 뭐 귀한 꽃이라든지…!”
“이번엔 진짜 아니야!”
대체 마탑 창립 기념일을 왜 둘이서만 기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마탑의 그 누구도 관심 없어 하는 날-아무튼 그 꽃은 지금도 페이의 책상 위 화병에 잘 꽂혀 있다.
꽃다발을 받은 페이는 남는 화병이 또 없는지 생각해 보다가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한겨울에 꽃이라니 화사하네요.”
“갈 때 꼭 들고 가십시오.”
“네.”
예의상 꽃다발의 향기를 맡은 페이는 애써 다른 생각으로 넘기려고 했다.
이 꽃다발을 보고 있으면 루키우스가 다른 데를 보며 딴청을 부리던 장면이 자꾸 생각나서였다.
그럴 때면 꼭 쑥스러워하는 소년 같다니까.
그건 그렇고 엘릭서…. 대체 왜 그랬지?!
나머지 둘도 꽃다발이 예쁘다는 둥, 페이 양과 잘 어울린다는 둥 낯간지러운 사탕발림을 잠깐 하고는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이 시간이 부디 천천히 흘러갔으면 했다.
‘오를레앙 공작가의 일만 아니면 더 좋겠는데.’
똑똑.
다과 시간도 끝나고 잠시 대화가 끊겼을 때, 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냐?”
“실례합니다, 대공자님. 접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노크한 자는 문을 열면서 카셀을 대뜸 불러냈다.
“폴, 무슨 일이지?”
“그것이….”
‘앗!’
클라인 공작저의 시종, 폴.
또 아는 사람을 본 페이의 눈동자가 다급하게 다른 곳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폴의 귓속말을 끝까지 들은 카셀은 무척 미안한 얼굴을 하며 일어섰다.
“페이 양, 아스테인 황자님과 라파엘 경께도 죄송합니다. 거스를 수 없는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두어 시간 후면 황자님도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할 테니 아쉬워도 자리를 여기서 파하면 어떻겠습니까? 페이 양의 배웅은 내 시종인 폴이 해 줄 겁니다.”
라파엘은 카셀이 간다는데 서운한 기색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페이 양을 여기까지 모셔 놓고 그러면 신사의 도리가 아니지. 페이 양의 에스코트는 내가 잘 해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가 보시지요, 기사단장.”
꼭 이 시간만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황자님은 어쩌고?”
라파엘은 일순간 멍청한 표정을 했다.
“아.”
“…하아, 농담할 시간 없으니 정말로 가 봐야겠습니다. 폴? 페이 양을 정중히 모시고 귀가를 너무 재촉하지 말게. 아스테인 황자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카셀 경. 오늘 즐거웠습니다.”
“예.”
카셀은 떠나기 전, 안타까운 눈빛으로 페이를 보았다.
원래 생각 같아서는 아스테인 황자와 라파엘을 보내고 좀 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는 폴을 남겨 두고 휙 떠나려다 무언가를 떠올렸다. 오늘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꼭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카셀은 즉시 페이에게 다가오더니 귓가에 대고 이런 말을 속삭였다.
“만약 라파엘 경이 이상한 짓을 하려고 들면 참지 마십시오. 그, 전에 들어 보니 페이 양의 특기로 프로즌 스텝이라는 마법이 있더군요.”
“예…?”
“그가 수상쩍게 행동하면 마법을 쓴 채로 발등을 사정없이 밟아도 됩니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마무리할 것이니 부디.”
“어… 아하하….”
세상에, 홀트데인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
페이는 곤란한지라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고, 청력이 좋아 카셀이 한 말을 고스란히 다 들은 라파엘은 투덜댔다.
“진짜 너무하네. 우리 우정의 크기가 이것밖에 안 된단 말입니까? 내 발에 동상이 걸려도 괜찮다는 친구라니 그간의 친밀했던 세월이 허무해졌군요.”
“정말 가 봐야겠습니다. 그럼 후에 뵙지요.”
카셀이 가고 나서 남은 셋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섰다. 그의 말마따나 창을 보니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이었다.
비도 오지 않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아 좋았고, 나만이 오랜만의 재회임을 알고 있지만 좋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더 좋았지.
그들을 뒤로하고 마탑으로 돌아온 페이는 침대에 엎드려 생각했다.
‘매일 매일이 이랬으면 좋겠어. 정말 이상적인 날이었는걸. 피…아노만 빼고.’
물론,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설령 그녀가 클라인 공녀의 지위를 되찾았다고 해도 똑같을 것이다. 공녀라고 해서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하루를 마무리하는 철부지 생각이었다.
라파엘 오를레앙, 한 명의 기사로서 훌륭하고 귀부인과 영애들의 사랑도 많이 받고. 최소한 나태했다는 말은 못 들어 봤어.
아스테인 델피어 아칸 황자….
라냐 황비 곁에서 늘 의젓한 모습을 보였는데. 실제로는 호기심도 많고 말도 많은 성격이었구나.
아스테인이 어째서 본래 성격을 숨기고 다녔는지 이해는 충분히 갔다.
실라스 황태자가 쭉 칩거 중인 상황에서, 이복동생인 황자가 활발하게 다니는 건 곤란하지? 여러모로.
모르가나가 알던 황자는, 라냐 황비를 대동하지 않고의 활동은 일절 없었다.
그래서 오늘의 뜻하지 않은 만남이 좀 놀라웠다.
황자가 자기 발로 황궁을 나와서 황태자의 수족인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는 그 용기가.
실라스의 능력과 결단력을 믿기에 자기 목소리를 드디어 냈다는 신호인가?
‘지난 생엔 얌전했던 황자도 전과 다르게 살 기회가 있겠지? 그의 활달한 성격을 마음껏 표출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어.’
그도 라파엘도, 카셀 오라버니도 모두 다 행복하기를.
상냥함을 머금은 페이의 올곧은 마음과 함께, 길고 긴 겨울의 나날이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봄은 곧 올 것이다.
그 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사람들이 각기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 * *
1월의 어느 날.
신년을 맞아 공작저에 가득히 쌓이는 선물을 보는 일도 무료했다.
그간 새 사용인을 고용해 달라, 조용한 외출을 하고 싶다 등의 투정을 부렸던 공녀는 공작 내외를 긴히 마주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을 물려 달라고 청한 뒤라 달랑 셋뿐인 자리였다.
클라인 공녀의 표정만 봐서는 속내를 쉬이 읽을 수 없었다.
고집스레 꾹 닫힌 어여쁜 입술에서 망설임이 엿보일 뿐, 연갈빛의 잘 다듬어진 눈썹이며 맑은 눈망울은 평상시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