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또 다른 만남의 시작
지금 저쪽 편이 되어 붙어도 그 목적에 말려들 뿐인데.
‘백날 노력해 봤자 되지 않는 걸, 늘 버티고 살라는 거 이제는 그만두고 싶어. 태생적 한계라는 거 정말 싫고 끔찍해…. 나는, 결혼하는 것조차도 이렇게 힘든데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하는 걸까?’
바바라의 작았던 불만은 여름과 가을을 넘어, 추운 겨울에 가장 크게 들끓었다.
원인은 분명했다.
그건 수도원의 평민에서 공작저의 에이나를 넘어, 클라인 공녀로 인정받은 도로테아 때문이었다.
드라칸 라이더의 이야기야, 특별한 능력을 지녔고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니 감히 쳐다볼 여력도 없었다.
그녀가 여성이란 건 마법사, 그리고 드라칸을 부린다는 장점 앞에서 다른 말이 나올 이유가 되지 않는다.
천부적인 재능을 질투해 봐야 얻을 게 무언가?
하지만 티아나란 이름을 되찾은 그녀는?
‘핏줄 잘 타고나서, 유년기에 고생 좀 했다지만 이젠 화려한 삶을 잔뜩 즐길 일만 남았잖아. 무려 데뷔탕트의 계절까지 바꾸고…. 아아, 너무 부러워.’
공녀가 자신을 위한 에이나 노릇을 할 당시, 평민이라고 깔보고 무시한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그들은 클라인 공작 부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공작저에 서둘러 선물을 보내고 난리란다. 이제 와서.
겉으로 얌전했던 바바라로선 솔직히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안 해도 될 일을 자기네들이 콧대 좀 세우다가 다 망친 것 아닌가.
공녀는 봄의 첫 무도회에서 데뷔탕트를 치르고 사교계에 정식으로 나서게 될 거라지?
그래서 지금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아아, 부러워. 눈 한번 치뜨면 모두가 벌벌 떠는 공녀님이 되다니.
그녀가 나였다면, 내가 그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도 어딘가에서 바바라의 끝없는 공상이 이어지는 동안, 다른 장소에서도 드라칸 라이더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황궁 내, 블루 로즈 기사단장의 집무실이었다.
“선약도 없이 이렇게 찾아오면 곤란하오, 라파엘 경.”
“하하, 우리 사이에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아 주십시오, 블루 로즈 기사단장. 그간의 정리가 있는데 너무 선을 그으니 살짝 서운해지려고 합니다.”
“…….”
“단장님이 되었다고 우리의 우정까지 저버리기 있습니까?”
라파엘은 평소보다 더 유들유들하게 굴어 댔다. 평소 하던 말투도 완벽한 존대로 바뀌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말하자면 배 속에 느글거리는 올리브 오일을 한 통 촤악 부은 느낌이다.
올리브란 단어를 떠올리니 좋지 않은 기억도 함께 돌아왔다.
“자, 이것은 기사단장 취임 기념 선물이오.”
라파엘은 빙긋 웃다가, 주머니에 숨겨서 가져온 무언가를 꺼냈다. 예의 그 올리브나무 가지였다.
카셀은 자못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치우지 않으면 벽난로에 던져 버리겠소.”
“너무하는군.”
라파엘은 투덜대면서도 싱싱한 나뭇가지를 소중하게 챙겼다.
그는 황궁 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을 알고 있을까.
황태자는 블루 로즈 기사단으로 하여금 자기 세력을 주도하고, 힘의 저울을 자신에게로 기울게 만들길 원한다.
왜 랏셀 가문에서 겁도 없이 전하께 파혼을 먼저 제의하였는지에 대한 그 이유가, 오를레앙 공작가와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무척 높다고 하셨지.
휘안테 후작가와 다투는 이유는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 라파엘은 그에 관련한 내막을 전혀 모를 것이다.’
카셀도 공작가의 대공자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권세와 재물을 누렸지만, 라파엘은 더하다.
오를레앙 공작가는 그의 가문과는 달리 손이 무척 귀한 편이었다.
라파엘은 물론이고 그의 아버지, 그의 할아버지도 전부 형제자매가 없는 독자.
그가 기사라곤 하지만 평생 제도 바깥으로 나갈 일은 손에 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평생토록 보호받았기 때문이었다. 크로우 기사단원 전원이 소집되는 일이 일어나도, 그는 어지간해선 제도 안에서만 활동하게 되겠지.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그만큼 귀한 아들, 아직 가문의 일을 본격적으로 물려받을 기미도 보이지 않는 라파엘.
카셀이 만약 오를레앙 공작가의 사람이라도, 해맑고 귀하게 큰 라파엘에게 그런 일은 비밀로 하고도 남았다.
본인이 알면 억울하다면서 땅을 창으로 탕탕 내리치겠지만.
심란한 생각에 잠긴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라파엘이 책상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댔다.
“단장님?”
“…라파엘 경, 그만해 주시오. 남들 앞도 아닌데 님 자 소리를 들으려니 거북합니다.”
“하하하! 대공자께서 겸양의 말이라니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되었고, 용건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시오.”
카셀은 바빴다.
당장 바쁜 건 아닌데, 눈앞에 라파엘이 있으니 할 일이 자꾸만 생각나고 그를 밖으로 서둘러 내보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꽤 직설적으로 말해 버렸다. 노골적인 축객령을 보여도 라파엘의 안색은 해가 뜬 한낮처럼 밝았다.
“벌써 날 쫓아낼 요량이오? 차 한 잔의 여유도 없이?”
“라파엘 경…! 하아, 그만둡시다. 크로우 기사단의 근무와 행정이 만만치 않은 걸로 아는데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휴가라도 받은 모양이군.”
라파엘의 기세에 완전히 말린 카셀이 틈을 보여도 그는 똑같이 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소. 오늘 아침에 마구를 점검하러 마구간에 갔는데 모리스는 잘 있더군.”
“…….”
라파엘은 그야말로 여름의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단장께서 궁금해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참이었소. 모리스는 아주 성실하오!”
“그랬나.”
“너무 피곤할 때면 가끔 곯아떨어져 마구간에서도 자 버리는데, 이대로 줄곧 버티면 기사 서임은 문제가 없을 것 같소. 늦어도 내년 말 혹은 내후년쯤?”
남들 같으면 감히 꺼내지 못할 말을 참 쉽게도 한다. 악의 없이, 진솔하게. 라파엘은 진짜로 모리스를 응원하고 있나 보다.
그게 라파엘 오를레앙, 이 남자의 장점이기도 하고 심각한 단점이기도 한데….
카셀의 적안이 싸늘하게 식자 라파엘도 나름의 눈치가 있어 화제를 얼른 바꿨다.
“아, 그래서 용건이 있는 건 사실이오, 기사단장.”
“무엇인지?”
카셀이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자 라파엘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 드라칸 라이더 말이오.”
“그녀에겐 왜?”
카셀은 다급한 나머지 말을 툭 잘라 버리고 말았다.
“그대가 황태자 전하께 드라칸 라이더를 소개하기 전에, 마탑에 종종 들렀다고 들었소. 그래서 나도 한번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오.”
“라파엘 경, 그대는 페이 양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 아닌가! 마탑이 외부인의 출입을 어지간해선 꺼리는데 덜컥 방문하겠다니, 믿을 수 없는 말이군.”
카셀은 거의 꾸짖듯이 말했고, 라파엘은 늘 그렇듯 해맑았다.
“누구든 처음의 만남은 있는 법 아니겠소. 그녀가 용맹한 드라칸을 타고 황궁의 하늘을 날던 모습이 가끔 뇌리에 떠올라서….”
“땅에서 보면 거의 드라칸의 배와 날개만 보이는데 어떻게 봤다고 그런 말이오. 페이 양은 차후 황궁에 주기적으로 드나들 것이니 공연히 마탑에 가서 연구를 방해할 생각하지 마시오!”
페이를 위한 열변을 토하느라 카셀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무심하다고 소문난 그로선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
어지간한 라파엘도 당황하여 대꾸를 못 하자, 카셀은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차분하게 타일렀다.
“페이 양은 마탑의 번듯한 마법사고, 현 소속은 마탑과 황태자궁에 걸쳐서 있소. 가서 만남을 건의할 수야 있겠으나 그런 식으로 부담을 주면 그녀가 마탑에서 편히 머무를 수 있겠소?”
“한 번만 마탑에서 만나고 그 뒤부턴 바깥에서 만나자고 하면 될 듯싶은데.”
“안 돼! 라파엘 경, 관두시오. 페이 양을 사적으로, 아니 따로 만나고 싶으면 적합한 자의 소개를 받는 예의를 차렸으면 하오. 내가 물어서 초대 장소와 시간을 내 볼 터이니 개인적으로 연락하려는 획책은 그만두오. 나중에 연락하지.”
카셀은 음성만 살짝 낮췄을 뿐, 거의 을러대어 주도권을 잡겠단 말투였다.
라파엘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반색했다.
“그게 정말이오? 역시 카셀 경, 아니 기사 단장님다운 결정이군! 좋소, 그럼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소.”
목적을 달성한 라파엘이 미련 없이 가 버리고 난 후 카셀은 약간의 자괴감에 휩싸였다.
결과적으로는 숫제 라파엘의 수작에 말려든 게 아닌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한 명의 기사로서 부족함이 없긴 하나 순수함, 해맑음, 무작정 밀어붙이기 등에 능한 라파엘을 가만히 놔두면. 그 대신 페이가 말려들 것이다.
순진한 그녀가 그놈을… 아니, 라파엘이 딱히 잘못한 건 없지만 아무튼 안 돼!
더군다나 라파엘은 그냥 흔한 남자도 아니고, ‘그’ 라파엘 오를레앙이다.
‘둘이서 어정쩡하게 만나게 두면 큰일이다. 차라리 구면인 내가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편이 백 배 나아.’
라파엘이 있을 때만 해도 이것 해야지, 저것 해야지, 라고 생각한 주제는 머릿속에서 몽땅 날아갔다.
지금 중요한 일은, 페이를 마탑 바깥 어디로 불러내 기쁘게 해 주냐는 것이었다.
그는 부관을 부르려다가 조기 퇴근을 하고 황궁에 머무르던 자기 시종 폴을 찾았다.
“제도 내에 반나절에서 하루 이상 머무를 장소를 찾을 생각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합니까?”
카셀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음, 우선 조용하고 남의 이목이 없으며, 내부 장식이 미려하고 구경거리도 많고 시간에 맞춰 간식과 식사 조달이 쉬워야 한다.”
“예.”
“그리고 이동하기에 편하고 휴식이 필요할 때 곧바로 조건을 충족해야만 해. 거처로 돌려보낼 마차와 말도 상시로 보관이 용이해야 한다. 만남의 주인공이 여성이니 꽃이나 손수건 등 만반의 준비를 기해야 하는데 가능한가?”
라파엘의 존재는 어디로 버려 버리고 숫제 페이만 챙기겠단 심보였다.
폴은 카셀의 장황한 말에 묻어 나오는 배려에 잠시 침묵했다가 물었다.
“…주인님, 상대가 누군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음?”
“드디어 누군가에 청혼하시는 겁니까? 주인님의 독단이라면 저는 일단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카셀은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단 내가 만나는 여성을 귀히 모셔야 할 따름이었다.”
충직한 시종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 년이나 저택을 떠난 그의 주인이 드디어 벗어날 수 없는 무드에 빠지나 했더니 아니라니.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쉽습니다.”
“아니라니까! 아무튼… 그런 장소가 꼭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건물 전체를 빌릴 생각도 있으니 예산은 개의치 말고 알아보도록 해.”
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나 카셀이 원하는 그런, 기막히게 좋고 엄폐도 잘 되고 남에게 소문이 안 날 장소가 여러 군데일 리 없었다.
결국, 카셀은 그가 잘 알고 많이 다녔던 미쥬앙 호텔을 빌리기로 했다.
페이도 그 자리에 오겠다고 했고 약속의 날은 생각보다 일찍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