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가짜 공녀의 결심
황궁 혹은 작은 모임에서 지체 높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꺼리지 않는데, 어두운 과거의 연은 애써 외면하려는 점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웠다.
물론 그는 딸이 어떤 모습이든 평생토록 사랑할 것이며 아껴 주겠지만….
제국 왼편 심장이라 불리는 가문의 공녀. 그 드높은 자리를 가진 자의 심성으로 볼 때는 약간 아쉬운 게 사실이다. 하나 뭐 어쩌겠나.
우리 티아나가 겪어 온 삶이 너무 기구한데 남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세월이 많이 흘러서 저 아이도 남을 이해하고 성격이 노련해지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쯧, 부인이 워낙 펄펄 날뛰니 당분간 수도원 측하고는 서신만 주고받아야겠군. 그나마 가을에 와인을 많이 사 주어서 겨울나기는 괜찮을 테지.’
“아버지?”
카셀의 부름에 상념을 깬 공작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카셀. 네가 여름에 제도로 돌아오고 좀 쉬려나 했더니 굵직한 일들이 연달아 닥치는구나. 네 심신이 피로할까 걱정된다.”
“저로선 당연히 견딜 만합니다.”
카셀이 국경지대로 다시 불려 가진 않을까, 하루하루 마음 졸일 때는 오히려 아들을 매일 볼 수 있었는데. 제도의 기사단장으로 승진한 지금이 보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도 공작은 그를 훌쩍 넘어서 황궁의 큰 인재로 자리매김한 카셀을 보면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언젠가는, 모리스도 형의 뒤를 쫓아 성장하겠지.
“…널 보고 있으니 네가 완전히 닮은 선조 카이도프 님이 떠오르는구나. 가면 갈수록 그분의 초상화와 똑같아지고 있다. 네 명성도 그분이 쌓아 올린 만큼 높이 올라가겠지.”
공작은 말만 겨우 탈 줄 알 뿐, 검이나 다른 무예는 통 못 하는 편이었다.
둘째 아들인 모리스가 카셀과 비교하여 무위가 한참 떨어졌어도, 아버지의 능력은 월등하게 상회하고도 남았다.
그 정도로 공작은 몸으로 하는 일에는 재능이 없었다.
제국의 왼편 심장과 오른편 심장이라는 공작가의 수장 둘이 사이좋게 펜만 드는 문관인 셈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네 할아버지는 갓 태어난 내 옅은 머리칼을 보고 한숨을 쉬셨다. 흑발을 타고 태어나지 않았으니 기사가 되긴 글렀다고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하, 날 안 닮은 모리스가 나보다 더 나은 걸 보면 모르겠느냐. 너는 틀림없이 지금보다 더 성장할 게야.”
“아버지….”
집에 있을 땐 늘 야단치던 둘째 아들을 보고 싶으신 건가. 카셀은 공작의 이중적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모리스를 야단은 칠지언정 동생이 아니라고 내칠 생각은 추호도 없지 않은가.
“나는 모든 일이 다 잘 되어 간다고 믿고 싶다. 티아나도 어렵게 다시 만났고, 모리스도 내년이나 내후년엔 기사가 될 거고, 네 결혼도 곧 준비해야지.”
“…….”
“하아… 드디어 사람이 사는 집구석 같구나.”
“저는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려던 카셀은, 티아나의 데뷔탕트가 봄으로 기정사실화된 일을 떠올렸다.
그가 서둘러 결혼하지 않더라도 여동생- 아직 그 호칭이 익숙하진 않지만, 아무튼 티아나는 길게 잡아도 이 년 안에는 결혼하는 편이 나았다.
그게 모두에게, 특히 화려한 생활을 꿈꾸는 티아나에게 이로울 것이다.
이젠 마음을 다잡을 때인가.
그는 오늘 공작저로 돌아온 직후 마음먹고 전의 그, 셀피아 하우스를 찾았다.
영 수상했던 운디네를 처치하여 그간의 멀찍한 거리 두기를 조금이나마 사죄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운디네는 흔적조차 없었고, 연못도 바짝 마른 채 얼어붙어 있었다.
‘누가 보냈든, 그냥 돌아갔든 둘 중 하나인가. 내 생각이 틀렸으니 운디네를 보낸 자도 뜻을 이루지 못했겠지?’
이곳에 와서 운디네를 발견하고 고민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훌쩍 지나 버렸다.
카셀의 상념은 공작의 말 때문에 깨졌다.
“네게 후계 공부를 다 시켜 놓으면 난 뒤로 물러나서 조용히 책이나 읽는 삶을 살고 싶구나. 영지도 좀 둘러보고 그래야지.”
“아버지.”
“부인이 정 심심하다고 하면 막둥이도 고려해 보고 말이다. 하하하!”
“…….”
두 번째의 농담이라도 받아쳐 줄 재주는 어디선가 생겨나지 않았다. 앞으로 몇 번을 연달아 듣는대도 익숙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얼굴에 난감함을 잔뜩 떠올린 채 다른 생각을 필사적으로 해냈다. 이를테면 오늘 드라칸 위에 오른 채 멋지게 상공을 비행하던 페이의 모습이라든지.
그러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조금 이상한가? 나는 페이 양을 생각하면 평온해지는군, 늘.
카셀은 홀로 남았을 때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할 때 페이의 존재를 떠올리면 조금이나마 행복해진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클라인 공작저의 불이 대부분 꺼졌으나, 공녀의 침실엔 일렁이는 촛불이 하나만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빛에 비추는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망할!!’
모르가나는 왜 이름을 페이로 바꿨지? 마탑의 마법사가 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만한 재능이 있었으면 처음부터 수도원이 아니라 마탑에 보내졌어야 옳은 거 아니야?
초라해야 마땅한 모르가나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다니, 너무 불안했다.
모르가나, 너. 넌 대체 뭐냐고. 너 사실은 모르가나 아니지? 시간이 되돌려진 다음 모르가나 몸을 훔친 악마라도 되니?
도트는 입술을 짓씹으려다 베개 끝을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모르가나가 날 괴롭혔다고 말할까? 그 애가 내뱉는 모든 게 거짓말이고, 수녀원장님과 다른 아이들도 다 홀려서 난 편하게 숨도 쉴 수 없었다고.’
도트는 시간을 되돌려 온 이후, 실크 로브로 추궁받을 때보다 더한 위기감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거꾸러뜨리는 것 말곤 방법이 없어!’
클라인 공작 부인은 도트를 지극히 예뻐한다.
에이나 시절에 늘 야단쳤던 일이 언제였냐는 듯, 말만 하면 뭐든지 들어줘. 황태자에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눈치이자 봄 데뷔탕트 때 기대하란 말까지 살짝 귀띔해 줬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봄날 무도회의 에스코트를 칩거를 푼 황태자가 손수 해 줄지도 모른다. 나는 그만큼이나 사랑받는 고귀한 존재야. 그러니 그 애 하나쯤은….
한껏 희망에 부풀었던 도트는 곧바로 절망했다.
‘아아…. 안 돼. 모르가나 고 망할 계집애가 이미 황궁에 발을 깊숙이 들인 눈치야. 연고도 없는 공작가에서 찍어 누르기엔 황실이란 날개를 이미 달았다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게 도망가 버린 것 같아 도트는 짜증이 났다.
‘악! 내가 눈독 들이는 황태자 전하의 수족이 되었다니 이게 말이 돼?’
황궁에 가기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
큰 오라버니 카셀이 마탑의 마법사 한 명을 발굴했고, 능력이 탁월해 황태자가 손수 데려다가 부하로 삼을 작정 같다고.
그때만 해도 무심코 흘려 넘겼는데 그게 모르가나의 이야기일 줄이야!
여마법사라고도 안 했잖아?! 설령 말했대도 눈치를 채기란 어려웠겠지만.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친자 검사까지 얼렁뚱땅 건너뛴 지금.
모르가나는 처치하기 너무 쉬운 존재로 전락했다고 생각했는데, 손을 더 뻗기 어려운 존재로 달아나 버렸단 말이다.
마탑…. 그곳 사람들은 황궁에서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고 했어. 여름 과일 축제 때 지나가듯 그랬잖아? 마탑의 마법사들에겐 ‘협력’을 요청해야지 ‘명령’은 할 수 없다고.
더군다나 황태자 전하의 부하라면 날 향한 그깟 괴롭힘 따윈 죄를 묻지도 않을 거야. 끽해 봐야 근신 며칠이나 시키겠지. 아아….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도 명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궁리를 해 봤자 뾰족한 수가 없으니, 도트는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 수련원으로 달려가 모르가나의 목부터 졸라 죽이고 시작했겠지!
아아, 나도 알아. 그랬으면 친자 감별의 벽을 넘을 수가…. 아니야.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 나 혼자 갔어도 너끈하게 통과했다고!
혹시 모르가나한테 물건을 빼앗아서 내 것이 되는 바람에 질문을 통과한 건가?
‘아우,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나도 몰라. 고것이 설마 사교계까지 발을 들이진 않겠지?’
모르가나는 실크 로브의 실종을, 도트의 행실로 의심하고 있다.
이쪽 사람들의 입이야 필사적으로 막는다 한들. 주신전에서 도트의 의중을 똑같이 살펴 줄 리가 없다.
봄이 되고 그녀가 클라인 공녀로서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 그 말을 주신전에서 퍼트릴지도 몰라.
자기들이 공녀의 신분을 되찾아 줬다고 말이야.
거기에 쓴 물건은 지금 모르가나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실크 로브였고!
황궁에 발을 들인 모르가나가 그 일을 남 입을 통해서 알게 된다면.
눈치 없는 고것이 가만히 있을까? 보나 마나 나도 귀한 실크 로브 같은 물건을 가졌는데 누가 훔쳐 갔다고 나불댈 텐데!
모르가나가 살아 있는 한, 꼬리가 밟히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급해, 시간이 없어.
“방법이 없어. …죽여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베개에 입술을 깊이 파묻은 채, 도트는 음습한 눈을 치떴다.
공작 부인이 실크 로브를 두고 내 물건이냐 물었을 때 생각했지. 난 불타는 마차에 뛰어올랐고 다시 내려설 순 없다고.
내 최후가 이 마차에서 영원히 내리지 못한 채로 불에 타 죽을 운명이라면….
그 길동무로 모르가나, 널 데려가겠어. 나는 널 버펄로처럼 들이받아 죽여 버릴 거라고. 알겠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너보다 먼저 망할 수는 없어!
마법사? 뛰어난 재능? 하! 네 친부모도 알아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그래 봤자 넌 멍청이 모르가나고 난 똑똑한 공녀 티아나야. 알겠어?
맹세컨대 네가 티아나라 불리는 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야.
그게 내가 정한 세상의 질서니까!
* * *
페이는 황궁에 다녀온 이후 하나의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모모 타기를 연습할 때, 운디네들과 합동 마법을 연구할 때, 기분 전환 겸 다른 책을 볼 때도 그녀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과거의 기억을 갖고 돌아온 사람이 나와 도트리샤뿐일까? 최소한 제도엔 또 있을 것 같아.”
죽고 돌아온 직후엔 가족에 대한 환멸과, 도트에 대한 반발심으로 놓치고 살았던 생각.
과거와 크게 달라진 지금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어떻게든 바꾸고 싶다고 생각은 했다. 그레이스 수도원이 불타지 않게, 수녀원장님과 사제님을 구하고 도트의 마수도 뿌리치려고 했었지.
여름의 굳은 결심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전과 똑같이 티아나의, 공녀의 자리를 노리고 기어코 성공한 도트와 수도원을 벗어나 마탑의 마법사에서 드라칸 라이더, 또 황태자의 수족이 된 페이.
“도트도 과거와 달라지길 원했지. 더 빨리 가짜 공녀가 되려고 내 에이나 자리를 가로챘어. 고작 우리 둘의 선택이, 세상의 모습을 이토록 달라지게 만든 걸까?”
단 두 사람의 새로운 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