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공작의 아쉬움 (38/148)

38화 공작의 아쉬움

“뭐하러 그런 걸 물어보셔요? 우리 티아나가 친했던 아이라면 진작 말이 나왔겠죠. 아니니까 말 안 한 거고요. 오죽하면 티아나가 수도원에서 누굴 초대하겠단 말도 지금껏 안 꺼냈겠어요?”

“그러니 지금 묻잖소.”

“여보, 티아나한테 자꾸 부담 주지 마세요. 아직 데뷔탕트도 안 한 몸으로 황궁에 드나드는 것만도 대단하잖아요.”

“내가 무슨 부담을 줬다는 거요? 딸한테 이만한 말도 못 하나?”

“되었다, 티아나야. 방으로 과자와 따뜻한 차를 보내게 할 테니 들어가서 이만 쉬렴. 오늘 황궁으로 출타하느라 고생했고 나도 곧 쉬러 들어가마. 내일 아침에 보자꾸나.”

공작 부인은 공작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다.

“어… 네. 편히 쉬세요.”

도트는 부스스하게 일어섰다.

웬만하면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등의 말로 간사하게 곁들이를 했을 텐데. 오늘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공연히 다른 말을 덧붙였다가 수도원의 이야기가 나오기라도 하면…. 안 돼. 제발 이 자리를 여기서 끝내 줘.

안색이 하얗게 질린 공녀가 도망치듯 가 버리자, 공작 부인은 꾹꾹 참았던 말을 냉큼 내뱉었다.

“혹시 그 페이란 마법사가 우리 티아나를 괴롭힌 게 아닐까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아니, 그렇잖아요. 마법사라면서요! 수도원에 살았으면서 마법사였다니 믿기 힘든 일인데, 마법으로 우리 티아나에게 몰래몰래 골탕을 먹였을 수도 있죠!”

공작이 경솔한 말을 하지 말라고 꾸짖기도 전에 카셀이 즉각 해명했다.

“어머니, 페이 양은 수도원에선 늘 성실하고 일에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법은 마탑으로 간 이후에 배웠던 거고요. 그래서 더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어쩐 일인지, 자기가 페이를 손수 마탑으로 데려다주었다는 말은 꺼내기 어려웠다. 딱히 비밀로 삼은 적이 없는 일인데도 그러했다.

그 여름날의 기억만은 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 혼자만이 알고 있는.

클라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서 파견된 이에게 그간의 사정을 다 들었소, 부인. 그보다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오?”

“뭔데요.”

남의 집 고아엔 통 관심 없는 공작 부인이 찻잔을 티스푼으로 가볍게 저었다.

“실은 내가 데려오려던 에이나 후보, 우리 티아나가 아니었다오. 알고 보니 수녀원장이 따로 골라 둔 후보가 있었다더군. 그게 마법사 페이 양이라는데 이것도 우리와 속한 인연 아니겠소?”

“네에?”

“원래 우리 가문에 오기로 한 소녀가 마탑으로 가서 마법사가 된 뒤, 우리와 뒤늦게 만나게 된 거요.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지? 당장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만나기로 정해진 운명처럼 말이오.”

페이가 황실의, 황태자가 인정한 드라칸 라이더가 되기로 결정한 후. 당연하게도 그녀의 과거 흔적은 속속들이 조사에 들어갔다.

페이도 그쯤은 각오했었고 도트에게 은근한 압박을 주기 위해 피할 생각도 없었다. 겸사겸사 도둑이 제 발 저리게 되는 꼴 아닌가?

그녀는 수녀원장님과 셰릴 사제님께 편지를 보내, 어릴 적 누군가에 의해 맡겨졌다는 것까지만 알리라고 했다.

마탑주 바로아 님, 함께 맡겨진 물건, 다친 상태로 왔다는 등의 세세한 일은 관두고.

그러나 도트, 도로테아와 페이의 과거 이름 및 둘이 친구 사이였다는 사실에 관해선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공작이 다분하게 호감 섞인 발언을 하자 공작 부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어요.”

“둘이 나이도 비슷한데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닐 리 없잖소.”

공작 부인은 티스푼을 내려놓고 완전히 정색했다.

“여보! 전 그런 것 알고 싶지 않아요. 우리 티아나가 온갖 고생을 하다가 어렵게 돌아왔는데, 왜 구질구질한 과거 일 따위에 발을 묶여야 해요?”

“왜 이렇게 심기가 불편한 거요?”

“그 페이란 마법사가 그러던가요? 우리 티아나가 거기서 뭘 했고 어쨌는지 안다고요.”

클라인 공작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흥, 필요 없어요. 드라칸인지 뭔지, 얼마나 잘난 마법사인지 평생 이 가문의 안주인 노릇만 한 제가 어찌 알겠나요? 다만 이제부턴, 그 누구도 우리 티아나를 괴롭힐 수 없다는 거예요.”

“당신 생각이 너무 엇나가 있소. 괴롭히기는 누가 그런단 말이오?”

“뭐 그 마법사가 어쩌다가 우리 가문에 안 온 건지야 모르나 잘된 일이죠? 우린 진짜 딸을 찾았고 그쪽은 황태자 전하께 잘 보여 출세할 길을 잡았으니까요.”

황태자란 단어를 입술로 말하며 공작 부인은 더욱 불쾌해졌다.

티아나를 되찾은 후, 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간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봄의 데뷔탕트도 좋고 공작저의 생활도 좋지만, 나이가 차서 혼기가 곧 눈앞이지 않은가.

공녀의 본분이란 것보다도 티아나의 행복을 선택해야지.

이왕이면 가까운 곳, 제도 내에 재산 넉넉하고 인품 좋은 어른들이 있는 가문으로 시집을 보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야 평생 곁에 끼고 살고 싶고, 남편이 데릴사위 운운했다지만 공작 부인은 그러기 싫었다.

번듯한 결혼을 시키려면 역시, 내년 봄 데뷔탕트 직후가 최적이야. 길게 볼 것 없이 화려하게 소개를 한 다음 서둘러 혼담을 추진해야 해.

상대측에서 공연히 우리 티아나를 두고 흠을 잡지 못하게 말이야. 그리고 내가 살뜰한 친정 어미 노릇을 톡톡히 해야지. 두고두고….

‘아휴, 전하께서 수확제 이후로 칩거를 거의 풀었다지만 우리 딸도 참 눈이 높지…. 공녀답게. 그래, 랏셀 공녀와 파혼하고 삼 년이 훌쩍 지났으니 지금쯤은 괜찮겠지?’

얼굴을 붉힌 공녀가 은근히 관심을 보인 쪽은 놀랍게도 황태자 실라스였다.

‘티아나는 황태자 전하를 수확제에서 멀리 뵌 것 말고는 접점도 없는데 느닷없이 왜 관심을 가졌담.’

제국의 왼편 심장이라는 클라인 공작가도, 황태자는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특히 그가 삼 년 동안 사교계에 나오지 않았기에 대화의 장에 이끌어 내기가 훨씬 어렵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딸의 일이니 포기할 생각은 없는데….

그 페이란 마법사는 황태자를 코앞에서 보고, 정작 황태자와 결혼하고픈 딸은 성벽 위에 뚝 떨어져 있는 게 오늘의 일이었다.

황태자의 일만큼은 공작가의 이름으로도 압박을 넣을 수 없으니 그녀로선 분하고 원통했다.

그래서 쓸모도 없는 심술이 평소보다 더 뾰족하게 돋아났다.

“되었어요. 티아나가 쉬러 갔으니 저도 이만 가겠어요. 각하께서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일찍 침실에 오도록 해요.”

“침실? 오늘? 우리 부인께서 막내딸을 찾은 뒤끝이라 그런지 기어코 막둥이가 필요한가?”

무심코 침실을 운운한 공작 부인은 얼굴을 붉혔다.

“남사스럽게! 정말, 왜 이러셔요. 되었어요!”

쾅. 평소답지 않게 문을 박차고 나간 공작 부인의 등을 보며 공작이 껄껄 웃었다.

“허허, 평소엔 당당하면서 황궁에 다녀오면 저런 모습을 드문드문 보이니 놀랍지.”

“…….”

카셀은 다른 주제라면 몰라도 이런 것에는 대답해 주기 어려워 침묵했다. 공작도 큰아들의 대쪽 같은 성품을 뻔히 알아 화제를 돌렸다.

“카셀, 앞으로 그 마법사와 되도록 친해져 두어라. 아까 말한 대로 인품이 퍽 괜찮더구나. 얼음을 잘 다룬대서 쌀쌀맞을 줄 알았더니 세상인심을 괜찮게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습니까?”

“음. 나이치고 성숙하더구나.”

클라인 공작은 오늘, 페이와 짧게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젊은 인재라 그런지 황태자가 감싸고도느라 얼굴을 마주한 시간이 길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데 닳고 닳은 공작이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할 만큼으로는 충분했다.

그의 부인은 티아나의 과거사 때문에 수도원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지 무척 신경을 썼다. 공작에게 불만을 몇 번씩 토로하기도 했었고.

부인의 말을 다 믿지는 않는다지만 딸의 일인지라, 그도 페이에게 속내를 감춘 채로 물어봤다.

“으음, 페이 양. 그대는 그레이스 수도원 출신이라고 들었소.”

“네.”

“베릴 수녀원장을 어떻게 생각하오? 그대의 경험을 솔직하게 말해도 좋소.”

후드로 머리칼을 여민 페이는 별로 생각지도 않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분은 평소 수도원의 아이들에게 엄하게 대하십니다.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느라 규율을 어겨도 괜찮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또 모두에게 똑같이 대해 주지도 않습니다.”

“오호? 아이들을 편애한단 말이오?”

페이는 미소조차 띠지 않은 채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바라는 바와 생각과 행동이 각기 다르니까요.”

“다르다?”

“네. 활달한 아이는 다칠까 두려워 얌전함이 미덕임을 알려 주고, 구석에 가만히 웅크린 아이에겐 나가서 마당을 쓸라며 빗자루를 안겨 주십니다.”

“본 성향과 다른 일을 준다라….”

“결론적으로… 그분은 대하는 방법이 각기 다를 뿐 수도원에 기거한 모든 아이를 사랑하셨습니다. 저도 포함해서요.”

“그랬구려.”

클라인 공작은 은근히 감탄했다.

마법사 페이가 수도원에서 잘 지냈든, 못 지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베릴 수녀원장을 격하하는 말 또는 무작정 좋았다, 최고였다 등의 판에 박힌 말을 늘어놨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솔직했고 베릴의 엄한 성격을 누군가가 비난하지 않도록 완곡하게 덮어 주었다.

뭣보다 소문으로 틀림없이 같이 지냈을 공녀, 우리 티아나에 대한 평가도 섣불리 늘어놓지 않았지.

나름대로 눈치도 있고 공작을 앞에 두었다고 해서 비굴한 기색도 없다.

‘지나치게 나서는 성격은 아니되 능력 있고, 남을 비난하지도, 오해를 사게 놔두지도 않아. 인성이 제대로 되었어!’

드라칸 라이더.

말이 드라칸 라이더지, 고대 이후로 명맥이 끊긴 이능족을 길들여 다루는 능력은 쉬이 볼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인간에게 드문 물과 얼음 마법의 발현자라니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클라인 공작은 페이에게 퍽 호감이 갔으나, 수도원 출신이라 덮어 놓고 꺼리는 부인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어렵게 찾은 딸, 공녀가 초년에 겪은 고생이 많아서 무조건 보호하고 싶기야 하겠지. 더군다나 티아나가 제 입으로 수도원에서 사랑받았다고 한 적이 없으니.

하지만 올바른 사고와 행동을 하는 본질만은 잃어선 안 된다.

수도원 생활이 척박했어도, 단 하루도 굶지 않고 초라한 옷이나마 입혀 주고 돌봐 준 은공을 잊어선 안 되는 법이다.

심지어 칼을 맞대고 싸운 이의 가족이라도, 과부와 어린아이만 남았다면 곡식과 피륙을 내주는 게 사람 사는 도리거늘.

공작으로선 공녀의 파르르하고 새침한 태도가 아쉬웠다.

좋은 신분을 되찾았을 때, 서러운 게 있더라도 수녀원장을 비롯하여 친구들에게 맛있는 과일과 고기라도 좀 내달라고 말하기가 그토록 어려웠을까. 초대는 관두고라도, 그쯤이야 충분히 베풀고도 남는 일인데.

‘우리 가문에서 매해 꾸준히 적선한 것으로 지금껏 네가 먹고산 것이 아니냐, 티아나야. 사람이 꼭 돌려받을 것만을 따지고 남에게 해 주는 건 아니라지만. 난 그것도 특별한 사랑이라고 여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