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언제나 그녀의 곁에
약속을 어기는 것도 나쁜 일인데, 느닷없이 다른 데로 가자니. 루키우스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가 한적하고 좋은 장소 알아.”
“황궁을 안 가고요? 오늘이 약속 날인데요?”
“그래. 괜찮다니까?”
페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야… 야반도주? 아니, 지금은 아침이니까 다른 말인데?!’
“삐… 삐삐삐~이….”
모모가 슬금슬금 결혼행진곡 음을 읊는데도 루키우스는 막기는커녕 진지하게 설득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그에게 익숙한 공간으로 옮겨서 외부와 차단되면 곧 괜찮아지겠지.
페이에 대한 모든 감정이 스러지는 순간이 언젠가는 올 거다. 그때 그녀가 평생 안온하게 살 공간을 마련해서, 먹고살 만한 재물을 넉넉히 챙겨 내보내면 된다.
그리고 잊자!
나는 페이라는 존재를 만난 적이 없던 거야!
원래의 나로 똑같이 돌아가면 돼!
“거기 책도 많고 근처에 약초 자생지도 있어. 너 마법 공부하는 데는 전혀 지장 없는 곳이야.”
그의 드래곤 레어는 정신세계와 연결된 아공간에 있었다. 안으로 통하는 입구야 드리아나 산맥에 있긴 한데 어차피 선택받은 자 외엔 진입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
루키우스는 그 안에 지금 페이를 들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심지어 눈앞의 모모조차도 레어 안에서 기른 게 아니라 사육장을 따로 만들어서 뒀음에도 말이다.
그를 오래 모셨던 모모의 부리가 서러움은커녕 놀림을 위해 삐죽삐죽 움직였다.
“삐삐삐….”
“아뇨, 가겠어요. 솔직히 떨리는 거야 사실이긴 한데 뭐 어쩌겠어요? 사람이 자기 손으로 일을 저질러 놨으면 죽든 살든 결판을 내야죠.”
그녀는 용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래?”
루키우스의 입술 끝이 기묘하게 씰룩댔다.
젠장, 페이. 너에게 질릴 틈을 좀 줘라. 너는… 나란 위대한 존재를 언제까지 너한테 묶어 둘 거냐고! 물론 너하고 단둘이 내 레어에 갔어도 그때부터 미친 듯이 떨렸겠지만!
그가 내적으로 비명을 지르든 말든, 그들을 태운 마차는 황궁 안으로 무사히 진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중요한 성채가 아닌 서편 한적한 공터로 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도착하기 직전까지 조끼 안으로 계속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페이는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추운가?’
그녀는 수도원에 있을 적, 겨울이 오면 옷 안의 겨드랑이나 허리 등으로 손을 넣어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데운 적이 많았다.
마차 안이 추운 건 아닌데, 계절이 겨울이니까 루키우스도 갑자기 오한을 느꼈을지 모르지.
슬쩍 보니 루키우스의 치아가 입안 여린 살을 씹는지, 군데군데 움찔거리는 모습까지 보인다.
전과는 달리 황궁행이 부담스러운 모양인데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그때였다.
“이거.”
“네?”
루키우스의 꼬물대는 손이 조끼에서 쑥 빠지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향수병처럼 생긴 조그마한 유리병이었다.
“이게 뭐예요?”
“너 지금 긴장하느라 얼굴이 다 텄어.”
“제가요?”
추워하는 게 아니었어?
루키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페이를 똑바로 보지도 않고 병을 더욱 내밀었다.
“이따 너무 긴장되면 남들 안 볼 때 슬쩍 마셔. 기분도 나아지고 몸도 개운해질 거야.”
피로 회복제, 뭐 그런 건가?
페이는 마탑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는 있었으나, 아직 포션 등을 만들어 낼 단계는 아니었다.
뛰어난 마법사인 루키우스라면 만들고도 남겠지만.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루키우스.”
불투명한 노란색이 든 병에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새겨진 글자가 선명했다.
<엘릭서>
페이는, 병의 라벨을 미처 보지 못했고 루키우스는 그걸 줬다는 게 기뻐 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는 소리 없는 웃음을 마음껏 지었다.
잠시 후, 마차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드라칸을 소환하고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곧 카셀 기사단장께서 황태자 전하와 함께 오실 예정입니다.”
“네.”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기사가 페이에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루키우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해지는 모모를 보며 투덜댔다.
“하여튼 기사 놈들이란 저 거만한 성격이 문제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 기분 나쁘게 만드는 재주는 탁월하다니까.”
페이는 나직이 말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안 그런 걸요.”
“…어?”
누구? 내가 혹시 유희를 즐기면서 기사 서임을 받은 적이 있던가?
꽤 우호적인 페이의 말투에, 루키우스는 쓸모도 없는 헤아림을 해 보다가 관뒀다.
젠장, 젠장, 젠장! 나 아니잖아!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 실망스럽지?
“모모, 아니 모이테트라 바누스. 여기서 마음껏 포효를 지르면 안 돼. 알겠지? 성벽에 부딪혀서 소리가 크게 울리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야.”
끄덕끄덕.
페이는 루키우스가 가르쳐 준 비법인, 안장 얹기를 끝내고 웃었다.
“후후, 그래. 잘한다.”
얼마 후 기사들이 우르르, 마차 몇 대가 우르르, 눈에 쨍한 황궁 마법사의 복식을 입은 이들까지 몇 명 차출되어 왔다.
황태자가 친히 납시는 공간에 무려 드라칸을 들이는지라 경계가 퍽 삼엄했다.
루키우스는 요란만 떨고 실속이 없다고 여겨 노골적으로 투덜댔다.
“…쯧, 드라칸이 한창 지능이 떨어지는 종족이라고 해도 저런 허접한 군사 몇몇으로 돌발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쉿!”
“인간이 포악한 드라칸을 길들인다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심한 생각은 여전하군.”
“루키우스, 목소리가 너무 커요.”
페이가 상냥하게 달래도 루키우스의 태도는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방금 기사들이 거만하네, 어쩌네 해 놓고. 그들이 자기 발끝에도 못 미치게끔 권위적인 태도였다.
“네가 곤란해지는 거야 싫지만 저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다.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걸 말이야. 드라칸이 다루기 쉬웠으면 진작 사육장이 있었겠지, 안 그래?”
“루키우스도 참.”
페이는 루키우스가, 가끔 말의 앞뒤를 맞지 않게 할 때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서 내색한 적이야 없지만 솔직히 그랬다.
황태자의 의뢰를 받아서 황궁으로 갈 때도 그랬잖아.
그땐 자기하고 같이 가면 괜찮다더니, 페이가 혼자 덜렁 가겠다고 하자 어디 황궁 같은 데 발을 들이냐고 화내고.
뭐, 한 명이 가서 위험한 장소가 두 명으로 바뀐다고 안전해지나?
드라칸은 드래곤과 비교하면 별로 대단한 존재도 아니라면서…. 황궁의 최고 정예들이 우글우글 모였는데도 못마땅해하고 있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모의 주인다워. 역시 엘프 마법사! 음, 루키우스는 혹시 엘프 장로님 정도 되는 위치 아닐까?
“후후.”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친 페이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조금 웃고 말자, 루키우스의 눈썹이 살짝 풀렸다.
“긴장 풀었어?”
“네. 잘할 수 있겠어요.”
“어. 아, 그리고 내가 말했던가? 드라칸은 위대한 드래곤과는 달리 비늘도 발톱도 피도 심장도 통 쓸 데가 없어.”
“드라칸도 연금술의 재료가 되나요?”
페이가 무심코 물은 말에 루키우스가 히죽 웃었다.
“방금 말했잖아, 아니라고. 시체에서 애써 거둬 봐야 푸석푸석 갈라지거나 단단하게 굳어져서 세공도 안 되거든? 참고해라. 모모 녀석이 쓸모 있을 때는 오로지 살았을 때뿐이야.”
“끄… 끄어….”
루키우스의 광포한 말에 모모가 우는 소리를 쳤다.
페이가 크게 울부짖으면 안 된다고 해서 이것도 줄인 건데, 근처에 모인 기사들에겐 위협적인 눈치였다.
한 기사가 발끈하며 창을 꽉 잡고 이를 악물었다.
“드라칸이…!”
“진정하게. 저 드라칸의 크기가 유독 크다고는 하지만 카셀 단장님께서 직접 확인한 사항이야. 주변인들이 평범하게 구는 한은 위협적이지 않다고 했네.”
“비켜라.”
기사들이 술렁이는 사이, 위엄 있는 목소리가 작은 소란을 뚫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모모?”
“꾸에에에.”
실라스가 기사들이 촘촘하게 둘러싼 벽을 뚫고 등장했다. 페이는 재빠르게 인사를 하는 한편, 모모에게 연습을 시킨 대로 고개를 살짝 숙이게 했다.
거대한 드라칸이 인간의 인사 예법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모습을 보이자 황태자는 감탄했다.
“놀랍군. 카셀 경의 말이라 그대로 믿었지만 살아 있는 드라칸을 다루다니.”
“그야말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태자 전하. 그대, 드라칸 라이더여. 드라칸의 생포는 어떻게 했는가? 그들의 서식지가 지금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정말인가?”
‘아…. 맙소사!’
황태자의 뒤편. 느닷없이 클라인 공작의 중후한 음성이 들려오자, 페이는 아연실색했다.
그와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대뜸 마주칠 줄은 몰랐다.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다행히, 페이에게 관련 서류를 받아 뒀던 카셀이 곁에 있다가 말대답을 해 주었다.
“마법사 페이 양은 나이가 어린 관계로 드라칸의 생포에 관여하진 않았습니다. 드라칸의 원래 주인에게 일정 기간 빌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기에 알지도 못하고, 그에 관해 파헤칠 생각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가?”
“다만 이 드라칸이 그간 고서에 나오는 특징과는 다르게 온순하게 길들여졌음이 중요합니다.”
“카셀 경의 말이 맞네, 공작. 아칸 제국에 드라칸 라이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황태자는 카셀처럼 꽤 유연한 말로 공작의 질문을 넘어가게 해 주었다.
“오호라, 정말로 어린 아가씨였군요. 외양은 연약해 보이는데 남이 길들였다 한들 산 드라칸을 다루다니 놀랍습니다.”
페이는 공작의 등장으로 간이 떨어질 뻔했지만, 용케 울컥거림을 참아 냈다.
하긴 아카드니아 홀에서 도트를 만났을 때도 마음의 예고 따위는 없었지.
황태자가 직접 드라칸을 보러 오는 자리에 제국의 중요 인사들이 참여하리라는 점은, 당연한데.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그렇지만 공…작, 당신은 카셀 님과는 다르게 검에는 문외한이어서 안 올 줄 알았다고요. 말 타기에도 통 관심이 없고 늘 마차를 타지 않았던가요?’
클라인 공작을 두고 무심하니, 신경을 썼니 하고 혼자서만 갈등했는데. 막상 다시 보게 된 공작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겁 없이 드라칸의 위용을 훑고 있었다.
클라인 공작을 미워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무심’이라는 감정이 한 사람을 얼마나 지치도록 몰아갈 수 있는지 알게 한 장본인이 클라인 공작 아닌가.
‘그냥 생각하지 말자.’
페이는 새침한 생각을 하며 공작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와 사무적인 태도로 대하는 이외 다른 관계는 절대적으로 사양이다.
이번 생에선 공작이 페이에게 딱히 나쁘게 하지 않았다고 해도 못 잊어, 나의 아픔은. 당신들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안 돌아가.
“…….”
페이가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 누군가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카셀이었다.
평소 그녀에게 잔잔한 빛만을 보여 주는 선명한 적안이, 있는 힘껏 상냥한 말을 건네 오고 있었다. 괜찮다고, 긴장하지 말고 차분하게 해도 된다고.
‘그래, 난 할 수 있어.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면 되잖아. 뭣하면 다 내려놓고 루키우스한테 마법 연구할 수 있는 거기로 가자고 해야지.’
그가 말한 공간이 드래곤 레어임은 꿈에도 모르는 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