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카피아 성녀
추운 계절.
사나운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 중인 성녀를 걱정한 어린 사제가 외투를 가져와 청했다.
“성녀님, 날이 찹니다. 이제 기도는 그만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알았다.”
두 번 거절하는 기색도 없이 침실로 돌아온 카피아의 얼굴엔 서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풍문으로는 클라인 공녀의 귀환을 봄의 데뷔탕트 무도회 때 발표한다지? 좋아…. 그때까지는 얌전하게 기다려 주겠어.
성녀가 된 지 벌써 삼십 년이 훌쩍 지났다.
신전 전체의 신성력 약화를 이유로 온갖 굴욕을 당한 카피아는 뭐라도 붙잡아야 하는 신세였다.
‘당장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뒤를 봐준다고는 하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돼.’
오래전, 마침 제국의 왼편 심장이라는 클라인 공작 내외가 주신전을 찾았다. 공작 부인은 곧 만삭이 될 처지로 평안의 기도를 원해 온 참이었다.
카피아는 기를 쓰고 연을 엮으려고 온갖 궁리를 떠올렸다. 이유가 없다면 만들기라도 해야지, 그래서 곧 태어날 아기를 축복해 주는 척 호흡이 약해지는 신성력을 배에 슬쩍 불어넣었다.
그녀는 공작 부인을 보자마자 알아챈 것이다.
얼마 안 가 태어날 이 아기는, 거대한 마력을 천부적으로 삼킨 마법사.
하지만, 지금은 잠재력을 품었을 뿐 힘없는 태아에 불과하지 않은가?
내가 손을 댄다면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으로 꾸민 즉흥적인 음모였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되었다.
아들 둘을 낳고 귀여움을 잔뜩 받게 예정된 막내가 선천적으로 아프게 되리란 말을 듣자, 그들은 갓난아기를 주신전에 덜컥 맡겼다.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이라는 고상한 이름만 지어 주고 넘어왔지.
이제 갓난아기 공녀의 목숨 줄은 카피아가 고스란히 쥔 것이다.
‘좋아.’
원래는 있지도 않은 병을 고쳐 준다는 핑계로, 말귀가 통할 때까지만 데리고 있자는 속셈이었다.
공녀가 꽤 커서 이 카피아를 대모처럼 따르게 될 즈음에 돌려보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거야.
그렇지만, 공녀가 세상에 보기 드문 대마법사로 자라게 놔둘 수는 없어. 그렇잖아?
나는 성녀가 되고서도 평생을 조롱받으며 힘들게 사는데 너만 신분도, 마법 능력도, 좋은 남편도 다 가져선 안 돼. 그건 불합리하다고.
너는 날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평생 받드는 착한 공녀가 되렴.
권력욕이 성녀를 망쳤을까, 성녀가 된 카피아의 심성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을까?
비뚤어진 욕망으로 가득한 카피아는 공녀를 무려 여섯 살 생일이 임박할 때까지, 주신전에 꽁꽁 묶어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전의 옛 유물인 루비 펜던트를 주어 천부적인 마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갓 태어난 공녀가 눈을 뜨고, 자라난 머리칼은 원래 공작과 거의 흡사한 옅은 금발이었다.
하지만 루비 펜던트의 강력한 힘 때문인지 고유의 머리색은 점점 연한 핑크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진한 적발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피아는 위중한 병이라 그런 것이니 절대 발설치 말라며 유모와 하녀들을 압박했다.
그런고로 그들은 공작저에 꾸준히 보내는 편지에도 그와 같은 말을 적지 않았다. 세 살 무렵에 생일을 맞아 화가의 말이 나오자 기겁하며 공녀님은 쉬어야 한다고 거절하기 바빴다.
카피아가 죄 없는 클라인 공녀를 무턱대고 증오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바라는 소망을 이룰 매개체로 다뤘을 뿐.
그렇게 근 오 년이 흘렀다.
벌써 여섯 살. 늘 방에서 지내게 했기에 별로 친해지진 못했지만 꽤 붙들어 놓기도 했고, 투병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그쪽에서 다른 치료사를 들이밀지도 모른다.
이젠 돌려보내야지. 오 년을 주신전에서 꼬박 키운 공녀니까 클라인 공작가에서도 나를 괄시하지 못할 거야.
‘슬슬 때가 되었지?’
성녀는 머리카락은 어쩔 수 없어도 건강은 괜찮아졌다고 말해 공녀 일행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그 마차가 귀환 도중 난데없이 습격을 당했다.
범인? 제국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옛 망국의 유민 혹은 화적으로 추정이 될 뿐. 그들은 마차에 실린 재물과 약간의 금화를 탈취하기 위해 끔찍한 살인을 한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이것만은 카피아의 짓이 아니었다.
마차의 외관이 너무 화려했던 게 문제였다. 조금만 더 가면 근처에 주둔하던 성기사들이 길가까지 나와서 호위를 하도록 약속되어 있었는데.
마부와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어린 공녀는 어디론가 실종되고 말았다.
유민들이 끌고 간 게 맞다면 제국 너머, 치안이 좋지 않은 왕국의 노예로 팔렸겠지, 뭐.
끔찍한 결말을 생각하면서도 공녀가 공작저로 돌아오리란 신탁을 나중에 준 건… 뻔한 수작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클라인 공작이 행여 예전 일을 추궁해 성녀를 궁지로 몰까 봐,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 보려고.
성녀의 입술이 흉하게 실룩였다.
내가 임의로 내렸던 신탁은 묘하게 들어맞았어! 당신들의 시선과 발길이 안타깝게 어긋났을 뿐이지.
‘솔직히 클라인 공작, 당신 잘못이야. 핏줄이 당겼으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봤어야 할 거 아니야? 한 끗, 몇 발자국만 더 내디뎠으면 당신 딸을 무사히 찾았을 텐데.’
그랬으면 나도 괜한 모험을 할 필요 없었고 당신들의 재회도, 내 뜻도 다 이뤄지는 건데.
“하아.”
아득한 예전 일을 더듬던 카피아의 눈이 현실로 돌아왔다.
뭐,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진짜 공녀는 자기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제도 내에 클라인 공녀를 찾았다는 소문이 분분하게 퍼졌는데 도통 움직이려 들지 않잖아.
오를레앙 공작가의 도움을 받아, 클라인 공작가에 꽤 오래 심어 뒀던 첩자. 별 기대도 없이 놔둔 그가 큰일을 해 줬다.
사용인으로 분한 첩자는 틈을 타 에이나로 들어온 도로테아의 방을 뒤졌고, 수상한 물건-유아용 실크 로브-을 발견했다.
그레이스 수도원 출신에 다른 물건은 변변치 않기에 이건 혹 훔친 물건이 아닌가 싶어 보고를 주신전으로 올렸다. 그 아이의 약점을 쥐게 될까 싶어서.
독특한 매듭을 가진 유아용 실크 로브라. 혹시?
카피아는 에이나 도로테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물건을 가져오게 했고, 예전에 봤던 거라 정체를 쉽사리 간파했다.
‘연갈빛 머리칼에 푸른 눈? 네가 공녀일 리가 없지. 나는 그 아이의 갓난아기부터 자라난 시절의 모습을 훤하게 아니까!’
급히 도로테아의 예전 발자취, 그레이스 수도원의 동향을 파악하게 한 카피아는 내막을 간파했다.
수도원에, 연핑크빛 머리칼의 모르가나란 여아가 있었다고? 도로테아는 그 아이의 곁방 친구였고?
그래…. 거기서 몰래 훔쳤구나. 탐욕스러운 아이야.
“난 죄인이야.”
성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실을 말했다.
그때-모르가나란 아이가 틀림없이 클라인 공녀임을 추측했을 때-입을 열어 모르가나의 신분을 되찾게 해 주었더라면, 최소한 둘이 살았던 수도원에라도 찾아가 자초지종을 털어놨더라면.
공녀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겠지.
카피아 또한, 그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쯤은 덜어 냈을 것이다.
하지만 카피아는 그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가온 참회의 길을 얌전히 걸을 수야 없지. 그러려면 내가 죄인으로, 나락으로 굴러떨어져야 하잖아?
클라인 공녀의 실종 이후.
성녀는 제도 내든, 바깥이든 핑크빛 혹은 적발을 가진 이들을 거리끼기 시작했다. 그건 그냥 본능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멀리했고, 심지어 성기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했던 나인데….
너는 거기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구나. 주신의 날개 끝, 수도원의 고독한 방에서.
카피아는 공작저 내에 있는 첩자를 이용해 이 일을 미묘하게 비틀어 공작 부인에게 알리게 했다.
그리고 일부러 도로테아의 의식을 잃게 하고 데려오라는 주문도 넣었다. 도로테아의 꿍꿍이가 무언지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잃은 의식을 다소 몽롱하게 바꾼 다음, 석상의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질문을 넣어 본 결과.
‘너도 공녀의 정체를 뻔히 알면서 거짓된 자리와 영광을 원하는구나, 좋다. 네가 원하는 자리를 주마.’
카피아는 기뻤다.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고, 내키면 지옥으로 떨굴 수도 있는 자그마한 악마 한 마리를 새로 발견해서.
‘그러나 언젠가는 네가 한 일의 대가를 수백 배로 치러야 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내게 말이다!’
마도에 철저히 물든 성녀의 눈빛이 음습하게 빛났다.
* * *
페이는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구조는 대강 파악했다.
‘앞으로 어쩌지?’
단순히 도트의 악행을 고발하고 정의를 세운다의 문제를 훌쩍 넘어설 줄이야. 도트는 이 사실을 알까? 알면서 손을 잡았어도, 모르고 있어도 무서운 일인데.
‘난….’
바구니를 둔 따스한 창가에서 요란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삐! 삐익! 삐삐삐!”
“어, 모모.”
“삐이이이익!”
모모는 눈치도 없는지 혼자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신나게 엉덩이를 흔드는 와중에 뒤룩뒤룩 찐 옆구리 살이 같이 흔들리는 모습도 귀여웠다. 루키우스와 재회하고 옛 주인이 무서웠는지 좀 시무룩하더니, 요즘은 완전히 살판났다.
그녀가 루키우스와 살짝 소원해진 지금이 모모에겐 더 좋아 보였다.
그래, 너라도 행복하렴. 모두 우거지상을 하고 살 필요는 없잖아?
“후후.”
간만에 웃어 보인 페이는 그날 오후께, 뜻밖의 방문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옛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그녀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리온… 아니, 클라인 대공자님.”
카셀의 적안이 말할 수 없는 비애로 물들더니 그녀만큼 딱딱한 말을 내뱉었다.
“그냥 카셀이라고 해도 됩니다, 페이 님.”
“그럼 카셀 경께서도 저를 그냥 페이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페이 양.”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여 물러선 남녀는 상대방을 빤히 바라보았다.
페이는 차마,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아서 축하드린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말만은 입에서 쉬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만약 그녀가 마주하는 사람이 도트라면 그녀는 기꺼이 말할 것이다.
너의 진짜 신분을 찾아서 축하하고, 앞으로 고귀한 공녀님으로서 잘살길 바란다고.
혀 속에 칼을 품은 채로 간악한 도트를 너끈히 상대할 자신은 있다.
눈앞의 카셀에게 의미심장한 독설을 던질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 역시 이상하게도 공녀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어릴 때 잃었던 혈육의 존재인데, 무심해서는 아니겠지. 뭔가… 다른 사정이 있을 거야. 그렇다고 믿고 싶어.
“그냥… 페이 양을 보고 싶은 마음에 선약도 없이 무작정 왔습니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아니에요!”
솔직히 기뻤다. 페이는 일부러 꾹꾹 눌러 뒀던 이성을 조금 잃은 채로 그를 멍하니 훑어보았다.
그녀와 그가 서로 닮은 점이 있나?
진짜 신분을 알고 다시 만난 큰 오라버니는, 공작 내외와 닮았다는 말이 냉큼 튀어나오는 외모는 아니었다.
클라인 공작가에선 몇 대를 건너뛰어 드문드문 강골의 무인이 나온다던데, 공작은 아니니까 그 선대를 닮은 걸까.
카셀과 마찬가지로 페이 역시 공작 내외의 외모를 그다지 안 닮아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셀의 향후 동정에 더욱 마음이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