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때 부수길 잘했지, 정말
“아무튼 그 일이 알음알음 퍼져서, 최근엔 친자 감별을 주신전이 아니라 이쪽 마탑에 의뢰하는 귀족들도 꽤 있어. 어차피 물건은 똑같고 일이 생겼을 때 주신전보다는 마탑에 따지는 게 마음이 편하잖아?”
홀트데인의 말이 옳았다.
주신을 내세우는 신전이 뭔가를 미진하게 해 줘도 차후에 뭐라 말하기는 어렵겠지.
“대놓고 말하면 주신전과 사이가 나빠질까 봐 다들 말을 아끼는 것뿐이야.”
“그렇군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홀트데인.”
“내가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홀트데인은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었다.
루키우스란 마법사가 온 이후, 현저히 잘난 그와 붙어 다니던 페이가 요즘은 혼자다. 운디네를 휘감고 멍하니 상념에 잠긴 페이의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꿀꺽.
어렵게 찾아온 첫사랑을 포기하기 힘든 마법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이 남자답게, 용기를 내어 널 좋아한다고 말할 기회 아닐까?
좋…아…해…라고 말하면!
그런데 그 좋다는 말은 그가 아닌 그녀의 입술에서 냉큼 튀어나왔다.
“좋아.”
“엥? 허억….”
홀트데인은 무언가를 결심하고 벌떡 일어선 페이를 멀거니 보고 놀랐다.
‘아니…!’
자신만만했던 홀트데인은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뜻하지 않게 중대한 문제를 발견한 탓이었다.
마탑에 올 적에만 해도 그와 그녀의 키는 거의 비슷했다. 조금… 아주 쬐끔, 그녀가 더 컸지만. 거의 엇비슷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홀트데인, 저 뭘 좀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덕분에 당분간 쓸 연구 주제가 생겼어요.”
“뭐… 뭘.”
그는 떠나가는 페이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페이가 완전히 가고 나서, 분한 얼굴을 한 채 카페테리아로 가서 이런 주문을 남길 뿐이었다.
“나 아침에 우유 한 병씩 추가해 줘. 제일 큰 걸로. 당장 내일부터.”
“예, 알겠습니다.”
내가 반드시 크고 만다, 키!! 남자는 나이 더 먹어도 큰다고 했지?! 좋아!
과거의 진상에 가까워진 페이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하아… 하아….”
너무 안일했다. 그녀가 버린 가족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숴 버린 루비 펜던트.
거기까진 그렇다고 쳐도 진실까지 외면하고 알려 하지 않은 건 태만이 맞다.
클라인 공작가의 사람들, 카셀 님…. 아니야, 지금은 약한 생각을 떠올릴 때가 아니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길 포기했어도 알 건 알아야 해.
페이는 침실로 돌아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유모와 함께 주신전에서 지낼 때의 기억은 많지 않아. 그냥… 난 약한 아이, 좀 아픈 아이란 충고와 다짐을 꽤 들었던 것 같아. 정말 그랬나?’
머리를 다친 이후 그레이스 수도원에서 자랄 때, 특별히 그런 일은 없었다.
상처가 다 나은 뒤라서 그렇다고 하기엔…. 선천적으로 그녀에게 어떤 문제나 병이 발견되진 않았다.
공녀라서 호들갑을 떨었나? 하지만, 아픈 곳이 없다면 출생 후 거의 오 년 정도를 공작저가 아닌 주신전에서 지냈다는 설명이 성립하지 않아.
그건 우선 그렇다고 치고. 그녀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망가진 루비 펜던트를 꺼냈다.
‘도트는 실크 로브만 훔쳐 갔는데 공녀로 인정받았어.’
이번 일에 있어서 가장 미심쩍은 점이 하나 있었다.
실제로는 이 펜던트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의문.
‘그럼, 왜 그때 루비 펜던트를 굳이 바꿔치기했지? 이번엔 그 펜던트를 유실물로 여기고 상관하지 않은 걸까? 내가 입었던 실크 로브만 있어도 충분히….’
생각을 거듭할수록 수상하게 느껴지는 인물과 장소가 떠올랐다.
그곳은 클라인 공작저가 아니었다.
‘주신전…. 카피아 성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과거에 친자 감별을 행할 때 모르가나가 대답을 대신 받게 하고 도트가 공녀로 인정되다니, 그런 짓을 주신전에서 돕지 않았으면 어떻게 성공했겠나?
최소한, 조작의 가능성을 알았어도 묵인했다고 봐야 옳다.
그래. 그녀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과 무서운 흉계.
도트가 아무리 교활하게 굴었다고 해도, 이 길고 긴 과정을 시행하는 도중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는 건 있을 수가 없어.
남에게 몇 번씩이나 살해를 사주했던 그 일들도 마찬가지야.
당장엔 들키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꼬리가 밟혀 도트는 궁지에 내몰렸겠지?
‘백번 이해해서 그 진실 판독 석상이라는 걸 사람이 아닌 실크 로브에 대고 썼다고 해도 수상쩍어. 뭣보다 이 루비 펜던트는 단순한 증표가 아니라 내 마력을 철저하게 억제하는 도구였잖아.’
클라인 공작이, 공녀가 마법사가 되는 것을 꺼려 펜던트를 직접 쥐여 준 거라면….
도트가 딸임을 안 뒤 마법사의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주신전에서 친자임을 확인했다 할지라도 역시 이상하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력이 몸이 컸다고 해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그런 일, 가능하지 않으니까.
티아나의 마력이야말로 친자 감별 결과가 잘못되었거나, 도트가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중요한 열쇠인데.
결론은 공작이 루비 펜던트 존재 자체를 모른다 혹은 용도를 몰랐다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내 루비 펜던트는 공작가의 뜻이 아니라 다른 데서 얻은 물건인가. 결국…. 또 주신전이야?’
과거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주신전과 성녀 카피아와 강한 얽힘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닥을 뒹구느라 더러워진 실크 로브는 헹구지도 않고, 루비 펜던트만 깨끗하게 관리해서 같이 보내 준 마탑주 바로아 님.”
페이는 크고 무서운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처음부터 생각을 잘못한 거였어. 바로아 님은 당시 마탑주셨잖아? 그 펜던트의 정체를 몰랐을 리가 없다고.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각성하길 원해서 일부러 펜던트를 같이 내주라신 걸까?’
구태여 부정적인 의미의 펜던트까지 챙겨서 내준 이유가 무엇이지?
‘모르가나와 모건 르 페이란 이름, 그리고 선천적인 마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루비 펜던트에 있음을 내가 알아내는 게 첫 조건이었다면….’
그를 떠올리자 답답했던 가슴이 어느 순간 탁 풀렸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숱하게 많은데, 열쇠는 단 하나. 페이가 직접 찾아내야 한다!
그녀는 바로아의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굳게 닫힌 문은 페이가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열렸고, 그 안에 바로아는 언제나처럼 없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언젠가는 이 방에 다시금 들어오리란 것까지 내다보았을 거야!
페이는 안에 들어가 푸른 얼음상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했다.
“바로아 님! 저는 바로아 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저를 둘러싼 진실이 그게 뭐든 제 손으로 꼭 파헤치고 말 거예요. 그렇잖아요? 마법사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니까요!”
푸른 얼음상은 고고하게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
“바로아 님이 저를 지켜보고 있든, 어딘가를 방랑하고 있든 제가 꼭 찾으러 갈게요. 그리고 감사하다고 말하겠어요.”
대답하지 않는 얼음상은 어떻게 보면 바로아의 분신 같기도 했다.
“저는 바로아 님이 지어 주신 이름처럼 마법사가 되었어요! 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요.”
옛 마법서에서 보았다.
모르가나, 모건 르 페이. 그 두 가지의 이름 모두가 물에서 비롯된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바로아는 그녀가 마법사가 될 소질이 있음을, 새로 지어 준 이름으로 큰 힌트를 남겨준 셈이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이 웃었다.
“…아직은, 제가 훌륭한 마법사가 될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노력하겠어요. 분노의 화염에 휩싸여 미치는 일은 없다고 약속할게요. 그럼 언젠가, 우리 꼭 만나요! 전 바로아 님을 반드시 만나고 말겠어요!”
한때는 당신이 루키우스 님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지만. 맞든 아니든 상관없어. 난 당신이란 존재를 반드시 찾아내고 말 거니까!
페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그녀에게 앞으로 할 일이란 무한히 많았다.
페이의 모습이 사라지자 바로아의 연구실 문이 자동으로 쾅, 닫혔다.
그리고 푸른 얼음상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미세한 금이 가더니,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 * *
“으음….”
바로아의 방에서 나온 페이는 즉각 부서진 루비 펜던트의 조사를 맡겼다. 마탑에는 각종 연구에 미친 자들이 많았기에, 결과는 생각보다 이르게 나왔다.
“너 이런 흉한 고물은 어디서 발견했어?”
“네?”
파인 에코들은 이게 틀림없이 강력한 마력 억제 도구라고 했는데?
“아, 옛날 물건이란 뜻이었어. 이건 어, 수백 년쯤 전에 썼던 유물로 추정돼. 펜던트의 다른 부속품은 최근에 갈아 끼운 것 같지만 보석 자체는 만든 지가 그쯤 되거든.”
“그래요?”
“다만 보석에 강력한 술식이 깃든 흔적이 있어. 사용자의 마력을 억제하고 요, 루비에 담겼을 불의 마력 영향만 받게 하는 물건이거든.”
“네? 그럼 약한 마법사에겐 오히려 도움이 되는 물건 아닌가요?”
페이의 동공이 커졌으나, 연구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 펜던트의 영향력에 지배되기 때문에 마나의 성향이 뭐든 천부적인 마법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돼. 이걸 오래 썼더라면 부작용으로 외모가 좀 변하거나, 자기가 마법사임을 영구히 깨닫지 못할 수도 있어.”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로군요.”
“맞아, 실제로 이걸 수백 년쯤 전엔 주신전에서 썼다는 기록도 있어. 신전과 뜻이 반하는 마법사의 능력을 억제하려고 말이야.”
“…….”
“우리에겐 아주 괘씸한 물건이지. 지금이야 보석이 손상되어 효력이 없다지만, 계속 들고 있었으면 엄청난 재능을 가진 자라도 결국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된다고.”
“…역시 그런 거였군요. 감사해요.”
페이는 물건을 들고 작별을 고했다.
루비 펜던트의 내막을 알게 된 그녀는 그 물건, 흉물이나 다름없는 것을 들고 와 원래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카셀이 선물해 준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카셀의 외모는 차치하더라도. 클라인 공작 내외를 비롯하여, 모리스까지 포함해 그들과 썩 닮지 않은 이 연핑크빛 머리카락.
그들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이 외모가….
‘루비 펜던트에 담긴 게 불의 마력이면, 내가 이 특이한 머리칼 색을 가진 것도 설명이 돼. 혹시 나, 태어난 직후와 지금의 머리색이 다르지 않을까?’
페이는 한편으로는 자기 생각이 차라리 틀렸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평화와 온유함의 상징인 주신전에서 어떻게 그런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였는지, 진짜라면 너무 기막힌 이야기다.
‘내가 주신전에 있는 동안 따로 그린 초상화라도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결론이 뭐가 되었든 흑막으로 손꼽히는 최후의 인물은 한 사람이다.
도트, 나의 친구였던 도트리샤가 아니야. 뒤에 보이지 않는 교묘한 그림자 술사가 한 명 있었어.
‘카피아 성녀!’
그녀가 간절히 떠올리던 인물은 주신상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요하게 기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