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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미심쩍은 존재, 나의 여동생 (31/148)

31화 미심쩍은 존재, 나의 여동생

그래, 이런 게 좋은 거다. 말만 자작이지 고작 하녀 한 명 둬서 집안일을 보조하느라 힘들었던 옛날로는 돌아갈 수 없어.

내가 갈 길은 처음부터 오로지 여기였다고.

끝없는 야망으로 미친 도트의 눈빛이 음습함을 애써 숨겼다.

“어머니….”

“그래그래, 알았다. 내 이제 남은 생은 널 위한 일만 할 것이야. 너는 무엇도 걱정하지 말렴.”

“네에….”

도트는 공작 부인의 품에 안겨 들어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수확제에서 너무 멀찍이 있느라 얼굴은커녕 머리카락도 제대로 못 본 황태자 실라스. 그에게 어서 고운 클라인 공녀와의 결혼 말이 닿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도 삼 년이 넘도록 홀로 있었으니 슬슬 가부를 결정할 때가 되었잖아?

그날 밤이 저물고, 이튿날 아침이 밝아도 모리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도트가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멀쩡하게 장성한 남자, 신분은 무려 공작저의 차남이고 돈도 외상도 마음대로 할 터이니 알아서 하겠지. 반항이 오래될수록 더 좋지 않을 텐데, 멍청이.

주신전의 일은…. 아마도, 그전에 암흑 길드에 갔을 때 들었던 말이 진실이지 싶었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성녀는 물론 신관들의 신성력이 급감하여 예언도, 신탁도 다 틀리고 고위 신성 마법도 거의 못 다룬다고 했지.

그러니까 대충 귀한 물건만 보고 그녀를 클라인 공녀라고 찍은 거겠지?

잘했어, 이 멍청이들아. 너희들은 잡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굵은 동아줄을 잡은 거야.

도트는 화려한 백조 무늬의 둥근 거울에 얼굴을 비쳐 보며 눈웃음을 쳐 댔다.

* * *

“…….”

“단장님.”

“이것을 클라인 공작저에서 온 사용인들에게 주고 돌려보내라.”

“예.”

부관에게 편지를 들려 보낸 카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가 제도로 돌아온 블루 로즈 기사단을 맡아 달라 한 이후, 그의 취임식 겸 겨울 무도회가 열릴 날이 코앞이었다.

그깟 무도회보다 중요한 건 드디어 칩거를 깨겠다고 결심한 황태자의 의중이었다.

페이가 이 일에 깊이 엮이기도 했고, 거기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그가 황궁에서 일하는 사이 가문에 중대한 일이 하나 터졌다.

‘도로테아가 티아나라고?’

클라인 공작 부인은 주신전까지 가서 도로테아가 티아나라는 확답을 받고 왔단다.

그러나 카셀은 그 말을 듣고서도 딱히 피가 요동친다거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실감이 나지 않는, 뜬구름 잡는 해괴한 소리로 느껴졌다.

차라리 공작이 처량한 목소리로 우리 티아나를… 이라고 할 때가 더욱 슬펐다.

솔직히, 그는 도로테아가 티아나라는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더 강했다.

현재 주신전에 도사리고 있는 성녀 카피아는 그전에도 예언이나 신탁 등을 내렸다가 결과를 틀리기 일쑤였다.

고위 귀족이나 황족 등만이 비싼 값으로 이용했던 친자 감별의 신성 마법.

차후에 등장한 진실 판독의 석상 역시, 말이 많았다. 이용한 전적이 있는 자들의 말에 따르면 교묘한 질문을 설정하여 물으면 명확한 대답을 피해 갈 수 있다나?

이를 이용해 병이나 독 등으로 의식이 희미한 배우자를 속이고 가짜를 가문에 당당히 입적시켰다가 들켜, ‘아는 이만 아는’ 난리가 난 사건이 있었단다.

주신전의 명예가 있어 그 일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지만. 뭣보다 느닷없이 도로테아를 두고 티아나라고 의심하게 된 계기가 이상했다.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사용인이 도로테아의 옷장을 정리하다 특이한 물건이 나와 바쳤다지만. 여름에 왔던 아이의 옷장을 왜 겨울철인 지금 뒤졌으며 그 실크가 우리 가문에서 주문한 것인지 무슨 수로 알아보고 고한단 말인가? 실크에 꼬리표가 달린 것도 아니고.’

카셀의 추론으로는, 실크 로브를 찾아냈다는 사용인의 정체가 수상했다. 그자가 언제, 어디서 공작저에 흘러 들어왔는지부터 자세히 파헤쳐 보아야 할 듯싶었다.

어쨌든 도로테아였던 소녀를 딸이라고 굳게 믿는 공작 부인의 요청은 따로 있었다.

이번에 카셀이 기사단장으로 취임하게 되는 기념의 겨울 무도회.

거기서 에스코트하여 정식으로 클라인 공녀임을 알리고 화려한 귀환식을 같이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가문에 없던 사이 벌어진 일이니 서신으로 자세히 물을 수도 없어. 만에 하나 옷장을 뒤졌다는 사용인이 따로 꿍꿍이가 있는 자라면…. 더욱 유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카셀은 편지에 구구절절한 그의 의심을 담지는 않았다.

다만, 이 무도회는 황실에서 주최하는 것이고 오를레앙 공작가와 휘안테 후작가의 화해가 더 중요하다.

이런 사유가 있으니 티아나의 정식 데뷔는, 이듬해 봄에 열리는 무도회에 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완곡한 답신을 썼다.

그의 속내인, 황실의 일에 개인사를 끼워 넣지 말라는 딱딱한 글귀는 썼다가 구겨 버린 참이었다. 공연히 어머니의 화나 돋울까 싶어서.

‘후우.’

문득 눈을 들어 창을 보니, 계절에 걸맞지 않게 먹구름이 어디선가 잔뜩 몰려와 있었다. 꼭 그의 마음과도 같아 더욱 답답했다.

티아나의 일은 그렇다 치고 모리스는.

동생인 모리스는…. 지금 크로우 기사단의 종자로 신청하여 하급 기숙사에서 숙식하고 있다.

집사에게 들은 귀띔으로는 도로테아가 티아나로 인정받은 직후, 공작 부인과 언성을 높여 집을 나왔다지?

‘녀석, 열심히 해라.’

카셀은 이번만큼은 모리스를 한심하게 여기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독기를 품고 시작한 만큼 뭐라도 성과를 꼭 냈으면 했다. 블루 로즈 기사단이 아닌, 크로우 기사단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한 결정도 밉지 않았다.

라파엘이 거기에 있으니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게 가끔 살펴 줄 것이고.

‘나도 부모님과 똑같이 이성적이지 않군.’

카셀은 자기가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티아나가 얼마나 가엾게 자라 실종된 뒤에 힘들게, 우연에 우연을 거쳐 돌아왔는가. 하나뿐인 여동생을 외면한 모리스를 야단쳐서 돌려보내기는커녕 마음속으로 응원하다니?

그러나 그의 심장이 향하는 방향은 도로테아로 살았던 티아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어렴풋이 상상했던 어린 여동생 티아나는.

우리들 앞에서 말 한마디나 제대로 했을까?

말로만 듣던 공작저의 위세에 압도되어 떨진 않았을까?

여섯 살 무렵에 돌아오기로 약속되어 있었지, 티아나야. 너는 오래 앓았다고 했으니, 햇살처럼 밝게 웃는 모습이 아니었을 것 같다.

어리고 핼쑥한 얼굴에 어색한 표정을 띤 채로 여기가 내 집인가,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살피다가. 유모의 손을 꼭 잡고 긴 스커트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트렸을 거야.

갑자기 바뀐 환경이 낯설고 두렵고 무서워서.

‘흐아아앙!’ 하고 울어 버리면 나도 어머니도, 모리스도 아버지도 쩔쩔매며 너를 달래려고 애썼겠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을 거다.

나는 납작 엎드려 개구리 흉내라도 내지 않았을까? 화원에서 꽃도 가득히 따다 주고, 주방에 들이닥쳐 달콤한 푸딩과 머핀도 손에 안겨 주고.

너는 그래도 새침한 얼굴을 한 채 방싯거리며 금방 웃지야 않았겠지.

가엾은 것.

너는… 누구를 닮았을까.

아버지? 어머니? 나처럼 선대의 강인한 피를 타고 툭 튀어나온 흑발일까.

어느 모습이든 넌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란다, 티아나. 설령 네게 오래 앓아 힘겨운 흉터가 버젓이 남아 있다고 해도 말이다.

‘성녀는 티아나가 위중할 때가 많다고 늘 겁을 주어 유모와 네 명 하녀들까지 거의 오 년을 신전에 계속 뒀었지.’

지금 생각하니, 아무리 상태가 안 좋다 할지라도 세 살 무렵에는 화가를 보내 초상화 정도는 그려 뒀으면 좋았지, 싶었다.

티아나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그 아이를 현실적으로 떠올릴 물건 하나 없다니. 지나간 일을 계속 떠올리니 회한만 가득히 쌓였다.

티아나에 관한 모든 일은 그에게 후회로 점철된 아픈 기억이었다. 그래서인지 기뻐야 할 지금이 더욱 실감이 나지 않았다.

“후….”

결국, 카셀의 입술에선 짙은 한숨이 흘렀다.

티아나를 찾기만 하면 따스해질 것 같았던 마음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었다.

겨울 무도회 당일.

카셀의 기사단장 취임식은 이르게 끝났고, 골이 깊어진 두 가문의 수장 내외의 참석도 무사히 확인했다. 큰아들의 답신에 적이 실망한 클라인 공작 부인은 공녀 없이 홀로 출타한 눈치였다.

어차피, 모든 것이 확실해진 따스한 봄에 본격적으로 알리면 더 좋을 거다.

카셀은 그리 생각하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으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쩐 일인지 사람들이 하나, 둘 그와 공작 부인의 곁으로 몰려들어 공녀의 귀환을 축하하는 것이 아닌가?

“축하드려요, 카셀 단장님. 여동생을 드디어 찾았다지요?”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카셀이 속으로 당황하여 묻자, 상대방이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소식은 빨리 퍼진다지 않습니까. 조만간 아리따운 공녀의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한두 사람만 알았다기엔 꽤 여러 가문에서 와서 축하 인사말을 건넸다. 주신전의 검증 때문에 발표가 늦었다고 다들 생각하는 눈치였다.

예삿일이 아니야. 안 그래도 미심쩍었던 카셀은 공작 부인의 곁으로 가 물었다.

“어머니께서 공녀의 일을 알리셨습니까?”

“내가? 아니다. 그렇지만 주신전에서 그런 일이 있었고 딱히 숨기려고는 하지 않았지.”

“따로 짐작되는 바가 있으신지요?”

“뭐, 이것저것. 최근에 보석 장인을 시켜 우리 티아나에게 줄 물건을 한꺼번에 맞추기도 했었고. 그러니 사람들이 눈치껏 안 게 아니겠느냐?”

“…….”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티아나를 이번 무도회에 데려왔으면 더 좋았겠지.”

클라인 공작 부인은 사교계의 중심답게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카셀에게 약간의 원망을 흘리기를 잊지 않았다.

심지어 무도회 중간에는 휘안테 후작가와 오를레앙 공작가를 달래러 나온 황태자까지 이 일을 언급했다.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 공녀를 찾았다지.”

“…예. 우선은 그렇습니다.”

실라스는 카셀의 답변에서 미묘함을 눈치챘으나 별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알겠네. 내년 봄쯤에 보게 되겠군.”

그것으로, 클라인 공녀의 정식 데뷔탕트는 은근슬쩍 봄의 무도회로 정해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태자의 언급이기에 공작 부인은 도리어 기뻐했다.

“음, 그래. 황량한 겨울보다야 따뜻한 봄에 우리 티아나를 공개하는 편이 훨씬 낫겠지. 내 생각이 짧았구나. 다들 깜짝 놀라도록 잘 꾸며서 그간의 홀대를 후회하게 만들어야겠어! 이 나라의 공녀가 어떤 존재인지 만천하에 알려야지.”

“…….”

도로테아가 에이나 노릇을 할 당시, 썩 예쁨받지 못한 것은 그녀의 탓이 대부분이었다.

포셰트 학자에게 단 한 번도 칭찬받지 못한 건 자랑이 아니다.

처음에야 식사 예절과 걷기, 앉는 법 등이 보기에 괜찮았다지만, 그 후에 다른 배움이 늘지 않은 것은 노력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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