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클라인 공녀
아니, 애초에 나 혼자만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것도 싫어…. 그냥 내가 처음부터 저주받은 변방의 자작가가 아닌 여기서 태어났어야 해.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는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 공녀로 태어났으면!
이 모든 일을 겪을 필요조차 없었다고!
격한 분노를 느낀 그녀의 고개가 왼편으로 살짝 꺾이자, 클라인 공작 부인이 울음기가 확연히 묻어난 음성으로 물었다.
“그냥 처음부터 도로테아였니…? 아니지?”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깜짝 놀란 도트가 쳐다보자, 놀라운 장면이 보였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검은 망사 안으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서, 설마?’
과거 모르가나의 물건이 클라인 공작저에서 나온 것임을 우연히 파악했을 때.
그녀의 이야기와 공녀의 실종 시기를 맞춰 봤을 때.
높은 확률로 모르가나와 클라인 공녀가 서로 일치하는 사람임을 깨달은 뒤 돋았던 소름.
‘그때도… 그때도 그랬어. 내가 주신전에서 공녀라고 판정이 난 이후 날 껴안고 통곡한 사람은 클라인 공작 부인뿐이었잖아.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안 밝혔는데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을 백 퍼센트 다 확신할 수는 없기에 도트는 일단 가만히 있었다.
이럴 때 성급하게 나서 말을 더하면 안 돼.
클라인 공작 부인이 망사에 달린 자그마한 꽃 모형을 만지작거렸다.
“이 모자는 내 친정에서 보내온 거란다. 꽤 오래전에, 이젠 그만 잊으라고. 흐흑….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우리 티아나의 일은 가슴에 묻으라고 말이다.”
도트가 꼭 닫아 둔 입술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난 도저히 그러지 못했어. 각하께서 주신전의 성녀께 티아나를 되찾을 거라는 신탁을 받고 나서 기뻤고 기다림은 너무 길었지….”
공작 부인의 한없는 넋두리 끝에, 말투가 처연하고 다정하게 변한 것도 수상쩍었다.
설마?
“…….”
도트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견딜 수 없었던 클라인 공작 부인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향단목 상자 안에 넣어 둔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 네 물건이지. 언제 갖게 되었는지 기억이 난다면 말해 보렴. 응?”
맙소사! 자신의 옷장 안에, 누구도 모르도록 꼭꼭 숨겨 뒀던 모르가나의 실크 로브!
그것이 클라인 공작 부인의 손아귀에 떡하니 잡혀 있어? 어떻게 된 거람? 난 누구에게도 저 물건의 소재를 밝힌 적이 없다고!
아연실색할 찰나였으나 교활한 도트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무섭고 두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걸 임의로 찾아냈다면 좋은 때를 잡아 일을 저지른다는 내 계획도 끝이잖아?’
공녀의 물건을 가진 것만으로 클라인 공녀가 될 수 있다면, 그녀는 들어온 후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친해진 사용인에게 그 일을 슬쩍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잖아.
주신전….
지금의 나로선 그쪽의 검증을 당장 통과할 계책을 세우기가 곤란해. 모르가나를 무슨 수로 꼬드겨서 데려오냐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 애는 내가 실크 로브를 훔쳤다고 의심하고 있는데!
‘미치겠네. 지금 어떻게든 일을 저지르기엔 내 위치가 너무…. 아니야, 이미 늦었어. 여기서 저것이 내 물건이 아니라 모르가나의 것이라고 실토해도 걔는 날 감싸 주지 않을 거야.’
도트가 머리를 잘 굴리는 편이라고 해도 쓸 만한 패가 없는 상황에선 역부족이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모르가나와 만난 당시 좋게 헤어지지 못했기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저 혼자 공녀가 되고 나를 에이나 자리에서 내쫓고도 남아. 하!’
전에도 모르가나가 싫었으나 지금은 더, 더 얄미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너는 왜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도 사사건건 내 발목을 붙잡는 거냐고!
아카드니아 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초라한 모습일 때, 하필 그 순간에 다가와서 도트 너냐고 물어 왔던 괘씸한 모르가나.
‘정신 차려, 도트리샤 카리스. 난 불타는 마차에 강제로 올라탄 거야, 내려서 달아날 길은 없어.’
예전에도 그랬듯이 나 혼자의 힘으로 이 곤경을 이겨 내야만 해.
‘그렇다면 앞으로 무한히 달려갈 수밖에! 영원히 남 앞에서 도망 다닐 도트리샤로 살기 싫다면,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이 될 길을 너 스스로 개척해 봐!’
도트의 두뇌가 곤란한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 거짓말을 맹렬하게 자아냈다.
“오, 그것은…. 우선 약속해 주셔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을 외부에 당장 노출하지 않고 숨겨 주시겠다고요.”
“응?”
두 번째의 중대한 기로에 선 도트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언젠가 했던 말을 똑같이 읊었다.
단, 이 자리에 없는 또 하나의 물건에 대한 언급은 살짝 피해 가야만 했다.
여기서 말을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곧바로 나락이다.
“제… 물건이랍니다. 어릴 때 썼던 걸로 추정되는데 자세히는 몰라요. 머리를 다쳐 쓰러진 제 옆에 놓여 있었거든요.”
“어릴 때 머리를 다쳤었다고?”
클라인 공작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추운 바람이 쓸어 간 땅 위에, 가엾은 티아나의 머리칼은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머리에서 흘렸을 핏자국과 마차에서 내려온 작은 발자국 몇 개, 몸으로 땅을 쓸어 달아나려던 끔찍한 흔적이 남았었다지.
오, 가엾은 티아나! 너는 도적의 칼을 피하기 위해 어디로 달아났니? 이제 방황은 그만두고 내 품으로 돌아오렴, 어미는 널 기다리다 지쳤단다.
“네. 제가 옛날 일은 잘 모르고 다친 터라 기억이 온전치 않아요. 너무 어두운 이야기라서 남이 떠드는 것도 싫으니 부디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꼭 비밀을 지켜 주시면 좋겠….”
“그래… 그랬구나. 알았다. 나머진 내게 맡겨도 된단다.”
“그래서 저…는… 욱!”
타앗.
그녀의 뒤편에서 웬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한 기사가 등을 가볍게 쳤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진 도트가 눈을 떴을 때는 장소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왔었던 주신전의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웠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니 아팠다.
그녀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던 클라인 공작 부인이 울면서 와락 껴안았다.
“오, 내 사랑스러운 티아나!”
“네…?!”
도로테아가 아니라… 티아나라고 했어? 날 두고?
“되었다, 내 아가야. 다 끝났단다. 원 세상에, 소중한 너를 곁에 두고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다니! 어리석은 나에게 어미의 자격이라고는 전혀 없어.”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래도 나를 용서해 주겠니? 넌 내게 둘도 없는 하나뿐인 딸이란다!”
이게 어떻게 된 거람?
막 깨어난 도트는 하녀가 구십 도로 허리를 꺾으며 바치는 물을 마시고, 간단한 스프와 빵을 먹고 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도트는 그날 의식을 잃고 나서 주신전으로 와 클라인 공녀라고 덜컥 판정을 받은 모양이었다.
공작 부인이 끈질기게 사죄를 청하는 까닭엔, 강제로 의식을 잃게 한 것도 포함이란다. 하루바삐 딸임을 알고 싶어서 저지른 짓이니 부디 양해를 구한다나?
다신 그런 짓 하지 않겠다는 쓸모없는 약조까지 곁들여 받았으나 마음은 계속 술렁였다.
‘그때 분명히 진실의 판독 석상을 통해 실크 로브와 루비 펜던트가 내 것이 맞냐, 그 질문을 받았어. 난 교묘한 술수를 써서 옆방에 모르가나를 둬서 대답을 대신하도록 만들었고.’
이전과는 달리 도트가 주도적으로 계략을 짜서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다. 토대만 쌓아 놓았던 일이 앞질러서 연달아 터지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주신전에 모르가나가 와 있어? 그럴 리가 없잖아. 난 아예 의식이 없는 상태로 오게 된 건데 이게 대체…!’
도트는 잔뜩 겁에 질렸다.
금방이라도 주신전의 카피아 성녀가 와서 석상의 판독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이 여아는 클라인 공녀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말하면 어쩌지?
나는 실크 로브의 출처를 말할 때까지 고문을 당하고 그 후엔 신분 위조죄로 참수형을 당할 텐데!
시간을 벌려고 했는데 왜 내 의지와 상관도 없는 일이 벌어진 거지?
엄청난 거짓말을 해 놓은 도트는 벌벌 떨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여기가… 성녀님이 계신다는 곳인가요…라고 묻자, 성녀 카피아는 소박한 기도를 위해 며칠째 출타 중이라는 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되었다, 티아나야. 이제 돌아가자꾸나. 가서 네가 누리지 못한 유복한 삶을 평생, 마음껏 즐기게 해 줄게. 버거운 에이나 노릇을 하느라고 고생만 시켜서 정말 미안하단다. 앞으로 네게 슬픈 날은 하루도 없을 거란다.”
“네, 네….”
클라인 공작 부인은 자기 숄을 다정하게 둘러주며 도트를 마차에 태웠다.
화려한 마차는 이곳에 다시 오고 싶지 않다는 듯, 주신전에서 서둘러 멀어졌다.
다시 클라인 공작저로 돌아온 도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여태 입었던 드레스보다 훨씬 가볍고 매끄러운 실크 드레스는 물론, 손목에 다정하게 채워진 블루 사파이어 팔찌.
공작 부인은 퍽 기쁘게 웃었다.
“후후, 카셀이 블루 로즈 기사단의 단장이잖니. 이걸로 너와 카셀이 남매의 돈독한 정을 쌓았으면 한단다. 요즘 카셀이 좀 바쁜가 본데 돌아오면 내가 단단히 이야기해 두마.”
“카셀 대공자님께요?”
“대공자님이라니, 이제 오빠이지 않니. 너도 그간의 서운했던 일은 다 잊으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으니 네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란다.”
“아…. 네에.”
보석은 당연히 좋았다.
그러나, 늘 싸늘하던 카셀 대공자의 얼굴을 떠올리니 속이 거북해졌다.
검증이 여차저차 끝났으니 잘 되겠지? 제발…. 그래야만 해. 내 평생에 있어 단 하나의 행운이 와 준다면 오로지 그거여야만 하는 거잖아.
셀피아 하우스로 옮겨서 쓰던 짐은 거의 다 처분되고, 도트는 전에 공녀로 인정받고 배정되었던 바로 그 방을 받았다.
급하게 정해진 일이라 가구는 그전과는 달리 하얗게 칠해진 단조로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렴. 겨울에 급히 만들어진 가구는 도색 재료도 그렇고 상하기 쉬워서 이듬해에 새로 시일을 두고 주문하는 편이 낫단다. 내가, 내년 봄에 네 방을 완벽하게 꾸며 주마. 우선은 겨울용 드레스와 망토부터 준비하도록 할게.”
도트는 뻔뻔스럽게 공작 부인을 끌어안았다.
“지금도 이미 완벽해요. 제가 이 가문의 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요. 정말… 정말이지요?”
“오, 나의 티아나! 넌 누가 뭐래도 내 딸, 고귀한 공녀란다.”
“…저어,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요.”
“무엇이든 말하렴.”
클라인 공작 부인의 말에, 도트의 광포한 욕심이 꿈틀댔다.
당장 금화를 좀 달래서 빨리 일을 칠까….
건조한 겨울에 불을 일으켜 그레이스 수도원을 다시 망가뜨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여럿 죽게 할 필요 없이, 베릴 모녀만 처치하면 된다. 나머지야 죽든가 말든가. 물론 그녀의 본명을 아는 옛 시골의 가족 역시 깔끔하게 죽어 줘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