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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내가 모르던 가족의 일원 (27/148)

27화 내가 모르던 가족의 일원

그는 우선 머그컵에 담긴 코코아와 황금빛의 스콘을 가리켰다.

“드십시오, 페이.”

“와, 잘 먹을게요.”

카셀이 제도로 돌아오고 나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음료는 바로 이것, 코코아였다.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 모르도록 걸쭉하고 퀴퀴한 색에 끔찍하리만큼 코에 맴도는 단내.

그는 싫어한다지만, 이것이 제도에 보급되고 나서 어린 영애들이 즐겨 찾는다는 말에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준비했다.

페이는 아마도 처음 보았을 이 음료가 무언지 묻지도 않고 홀짝홀짝 잘 마셨다.

검고 안이 비치지 않는 음료를 처음 본 몇몇 영애는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던데, 그녀는 용감하게 다 마셨다.

그의 기분도 느긋하게 풀어졌다.

한동안 먹고 마시기를 마친 페이는 텅 빈 머그컵을 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앗, 저만 너무 먹었네요. 리온 님은 그간 잘 지내셨어요? 이렇게 만나니까 좋네요.”

카셀은 빛이 잘 들어오는 방향으로 자리를 바꾸어 선 채로 물었다.

“페이 양, 내가 입은 제복의 문양이 어떤 것인지 혹시 알아볼 수 있습니까?”

가까이 다가온 페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으음…. 글쎄요. 독수리나 사자는 아니고, 장미인가요?”

“맞습니다. 작은 사파이어를 세밀하게 가공해 푸른 장미를 표현한 겁니다. 블루 로즈 기사단이라고, 예전엔 제도를 아우르다가 로지아 국경지대로 편입되어 최근엔 이 문양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블루… 로즈….”

어디선가 들었던 말.

블루 로즈 기사단, 그리고 로지아 국경지대라면. 거기는…. 그곳은!

“블루 로즈 기사단은 제도권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재편성 결과로 내가 단장으로 취임하게 되었고요.”

눈앞의 기사님이 담담하게 말하는 고백에, 옛 기억으로 남겨 뒀던 정보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페이는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쏟아지리라 직감했다.

“리온 님…?”

“단순히 기사단 하나가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매우… 큰일입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그대가 황태자 전하께 고용되어 ‘그 일’을 한 이유가, 블루 로즈 기사단의 귀환을 종용하기 위해서였지요.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큰 목적의 한 가지임은 분명합니다.”

“…네?!”

카셀의 붉은 눈이 무언가의 격렬한 감정으로 요동쳤다.

“내 이름은 그대에게 알려 주었던 리온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럼…요?”

진짜 이름이 무어냐며 되묻는 입술이, 그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려 왔다.

“내 이름은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 최근까지 블루 로즈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날, 페이 양이 수확제에 왔을 때 나도 거기에 있었고 일의 경과 때문에 무척 걱정했습니다.”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

그의 이름을 천천히 되짚는 페이의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리온 님이? 리온 기사님이….

리온 님이, 내가 모르던. 이름만 알았던 바로 그…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 대공자였어?

공작 부인이 늘 보고 싶다고 투덜대고, 모리스는 구태여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바로 그…. 내가 만나지 못했던 그분…!

클라인 공작저의 마지막 수수께끼의 인물, 단 한 사람…!

당신은, 내….

나의…!!!

목이 콱 메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이 나의 누구인지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영원한 비밀로 남아야 하잖아.

그렇지만, 페이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애써 진정했다.

그녀의 손으로 직접 다 끊어 낸 인연을 다시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카셀이 자기 신분을 꼭꼭 숨겼다고 한들 그건 잘못된 행위가 아니었다.

그때, 부서진 마차 바퀴를 눈앞에 두고 내가 클라인 공작가의 대공자라고 했다면 페이가 과연 그의 말 등에 덥석 탔을까?

감히 그를 쳐다보고 어디로 간다고 말을 쉽사리 붙였을까?

얼음 창고에서 두 번째로 만났을 때 기쁜 마음으로 둘이서 축제를 구경했을까?

거울 선물도 흔쾌히 받고 오늘의 만남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했을까?

아니….

아니었을 거야.

나는 그와의 만남을 최소화하려고 끙끙댔겠지. 어쩌면 마탑과 또 다른 먼 곳으로 도망치려 했을지도 몰라.

나도 리온 님도, 아니 카셀 대공자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잖아.

그녀는 리온, 카셀과의 관계에 필사적으로 선을 그어 내려 했다.

“페이 양?”

카셀은 페이가 자신의 고백 때문에 잔뜩 움츠러들었음을 간파했다.

이런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페이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췄다. 지극히 정중한, 기사다운 행위에 페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상해. 다른 사람, 내가 몰랐던 가족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나 마구 들끓는 기분, 뭐라고 하는 걸까.

나는 그가 조금도 원망스럽지 않아. 다만, 다만….

그녀는 애써 웃었다.

“저, 전혀 몰랐어요. 짐작도 하지 못했네요. 처음에, 마탑으로 갈 때 다른 기사님이 부단장님이라고 부르는 걸 얼핏 듣긴 했거든요.”

“우리는 국경을 수비하는 인원이라 이름과 신분을 함부로 밝히지 않는 게 규율로 정해졌습니다. 그쪽에는 사시사철 첩자가 들끓어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이젠 제도를 공식적으로 수호하는 기사단이니 그러지 않을 겁니다.”

“아….”

“페이 양을 황태자 전하께서 고용했다는 말과 당시의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정체를 듣고 나서 페이 양이 거리끼는 마음을 가져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주십시오. 고의로 페이 양을 속이려 하진 않았습니다.”

카셀의 적안에 쓸쓸한 회한이 담겼다.

“네?”

“나와 블루 로즈 기사단이 계속 제도에 있었다면, 나는 첫 만남 때 이름을 제대로 밝혔을 겁니다.”

그의 긴 설명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거만한 고위 귀족이 통상적으로 보이는 행태와는 차원이 달라.

페이 역시, 마부 아저씨의 일도 그렇고 그녀를 대하는 카셀의 인품에 깊이 감동했기에 고개를 저었다.

“실망이라든지, 그런 게 아니었어요. 다만 클라인 공작가의 대공자셨다니, 놀랐을 뿐이에요.”

솔직히 누구든지 알고 나면 놀랐을 일이다. 페이에겐 남들보다 좀 더 특별한 사정이 있기에 더한 것뿐.

클라인이란 가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것만도 철저하게 피하는 그녀가 아니던가.

“페이 양.”

“그러면 이젠 국경지대로 돌아가시지 않고 여기에 쭉 계시겠네요. 축하해야 하는 일이겠지요?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제가 만난 기사 리온 님은 최고의 기사였거든요. 제도에서 사는 모두에게 정말 잘된 일이에요. 저도 포함해서요….”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축하해요’를 말하고 나서, 카셀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마탑의 제 방에,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이 엎드린 페이는 마음껏 울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소리 없이 줄줄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베개를 차갑게 만들어도 서러운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코가 잔뜩 막혀 끅끅대는 울음이 입술 바깥으로 새자, 자고 있던 모모가 귀를 푸르르 털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페이가 엉엉 우는 게 아니라 억눌린 울음을 헐떡이며 뱉는 터라, 모모는 잠귀를 닫고 그냥 푹 자 버렸다. 루키우스 곁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데.

루키우스가 이 사실을 알면 분노하여 나태한 드라칸을 마탑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마법을 연달아 날릴 것이다.

“흑….”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몇 달간 계속 꿋꿋하게 살았던 마법사 페이는, 그날 밤만큼은 무력하고 가엾은 소녀 모르가나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셀, 나의 큰 오라버니.

당신이… 계속 클라인 공작저에 있었더라면.

깐깐한 공작 내외와 모리스, 그리고 도트까지 예전과 똑같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당신만 같은 공간에 있어 줬더라면.

나의 고단했던 생은 좀 달랐을까요?

과거의 내가, 매일같이 상처받고 끝없는 공부와 타인과의 냉랭한 만남에 지쳐 가던 나도 좀 웃었을까요?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던 나의 끝이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다른 길을 그려 내지 않았을까요?

나는,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 줬을 거라고 믿어요. 설령 우리가 평생토록 서로의 혈육임을 모르고 살았다고 할지라도요.

그녀는 베개가 카셀의 너른 등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꽈악 부여잡고 지쳐 잠들 때까지 계속 울었다.

눈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모르가나의 아픈 과거 위를 후벼 묻어 뒀던 상처를 드러나게 했다.

나는… 당신만은, 그들과 완전하게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는 그것을 강하게 예감하고 있어!

당신이란 존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더라면 과거로 돌아오고 난 직후에 아마 그리워했을 거야.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이지, 이젠 그들과 절대로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서도.

그래서 더 미쳐 버릴 것 같아….

퉁퉁 부은 눈 위에 지독한 쓰라림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페이는 간신히 쉴 수 있었다.

아련한 슬픔에 빠져든 페이가 지쳐서 겨우 잠들었을 때는 여명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 * *

‘짜증 나.’

도트의 현 감정을 하나로 모아 정의하자면 그거였다.

언제 겨울 초입이었냐는 듯 본격적으로 추운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곧 새해가 밝아 올 텐데 그녀는 여전히 클라인 공작저의 에이나, 그것도 ‘에이나 후보’였다. 정말이지 비참한 행태였다.

마음처럼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으니, 너무 답답했다.

그들은 공작저에서 지내기 좋았던 과거와는 달리 도트를 중간중간 압박하려 들었다. 멍청한 모르가나에게 했던 것보다는 덜했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포셰트를 가까스로 내쫓지 않았으면 더 힘들어질 뻔했어.’

지금도 홀로 버티기가 어려운데 제도의 정세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음이 피부로도 느껴졌다.

모르가나와 공작저에 같이 오지 않은 게, 뭐가 큰일이라고 과거의 상황이 계속 바뀌지?

그녀를 노골적으로 꺼리는 대공자 카셀은 국경지대로 돌아가기는커녕 제도에 눌러앉는 건 물론, 기사단장으로 승진했단다.

수확제의 그 폭발 사건 이후로 뭔가 방침이 바뀐 모양이었다.

‘세상이 왜 요 모양 요 꼴이 되어 가는 거지? 곧 죽어 나갈 바바라 가헬이 요즘 눈앞에 얼쩡거리는 것도 보기 싫어 죽겠는데.’

사건 당시 도트는 클라인 공작 부인과 함께 있긴 하였으나 모의 전투에 참여하는 자들과는 자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마침 클라인 공작가의 토너먼트 시합도 끝난 뒤라 뒤편으로 더 물리게 되었고.

그러기에 폭발 소리도 희미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황비며 황자가 피신하고 두 가문이 사건의 경위를 두고 상대방 소행이라고 주장한다는 풍문을 들었을 뿐.

과거와 앞으로의 전개가 달라진다면 어떻게든 적응해야 해.

도트리샤 카리스는 싫은 일을 두고 끙끙대며 감내하는 모르가나와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 아닌가?

‘그래, 그거야!’

도트는 벌떡 일어섰다.

그나마 공작 부인 말고 공작과 모리스 둘 다 도트를 딱히 예뻐해 주지 않는 지금.

오래 두고 쓰든, 잠깐 발을 디딜 목적이든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무형의 발판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작금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 사교적인 구실을 만들어 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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