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어느 마법사의 절규
불쌍한 여동생, 그 애만은 공작저 내부를 헤집으며 온갖 투정을 다 부려도 괜찮아. 온 세상에서 오로지 너만 가능한 일이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대공자는 어디에 있든 대공자다.”
“모리스 님…?”
“나는 물론이고 아랫것들이 이러니저러니 떠들 수 없는 존재지. 너도 유념해라.”
눕느라 제 등 뒤에 붙은 낙엽을 떼지도 않고 냉큼 가 버리는 모리스의 뒷모습. 도트는 황당하여 입을 쩍 벌렸으나 곧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겁쟁이 같으니! 무능해서 기사가 못 된 것도 자기 탓인데, 그깟 사소한 잡담을 떠들었다가 뒷담화가 될 것 같아 도망을 가?
‘하여튼…! 저놈은 말라비틀어진 낙엽만도 못하다니깐? 됐어, 네 말대로 대공자는 대공자니 내가 사랑받는 공녀 자리만 되찾으면….’
전과는 다르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약이 바짝 올랐다.
‘너같이 쓸모없는 골칫덩이 차남은 곧 내돌려지는 신세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어떻게든 기사가 될 걸 하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고!’
도트는 앙심을 품었으나 겉으로는 모리스를 상냥하게 대하려고 애를 썼다. 대공자를 보기가 부쩍 힘들어진 지금, 그에게까지 날을 세울 이유는 없었다.
과거에 자신들이 섰던 길에서 현저히 멀어진 이들이 점차 다른 생각을 품어 가는 계절.
페이는 루키우스의 도움을 받아 일전의 그 고원으로 왔다.
“오늘도 고요하네요….”
“디스펠.”
“우왓!”
휘이이잉!
루키우스가 마법 해제 주문을 쓰자마자 엄청난 변화가 생겨났다.
그들 주변에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어 귀가 윙윙거릴 지경이었다. 다시금 윈디 실드를 쓴 루키우스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페이, 넌 어떻게 된 게 학습 능력이 없어? 지대가 높은 곳에 오면 신체의 변화가 생기기 쉬우니까 조절 마법을 쓰는 게 기본이잖아.”
“그, 그러네요.”
페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상해, 다른 사람 앞에선 차분했던 모르가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데. 루키우스 앞에선 그게 잘 안 된다.
“정신 차렸으면 너 혼자서 모모를 타 봐.”
“네!”
루키우스는 페이가 무섭다느니, 싫다느니 하면서 뒤로 빼지 않고 혼자 타려고 하자 조금 당황했다.
‘얘는… 무슨 인간이 이렇게 거침이 없어!’
그는 자기 입으로 혼자 타라고 해 놓고 걱정이 되어 도로 물었다.
“괜찮겠어?”
“네. 모이테트라 바누스, 음…. 일단 저 아래까지 천천히 걸어 볼래?”
끄덕끄덕.
페이가 모모의 본명을 불러 주며 상냥하게 대해 주자, 드라칸이 기쁜 듯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페이가 앉은 자리도 같이 들썩거렸다.
“후후후.”
“얌전하게 굴어! 페이를 등에서 떨어트리면 어디 두고 봐라.”
드라칸은 오리보다 더 시끄럽게 꽥꽥대는 루키우스에게 솔직히 반항하고 싶었다.
강제적으로 그의 부하가 되고 어언 몇 년째인가.
마탑의 사육실에서 주는 먹이 삼키며 편히 지낸 세월과 페이가 그간 잘 대접해 준 덕분에 반항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더군다나 주인은 페이 앞에선 엄청나게 겸허해지는 신기한 양상을 띠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페이를 등에 얹고 멀리멀리 튈까? 티세르 대륙 끝으로? 아니면 바다 너머 조용한 섬으로?
‘이 녀석이 감히?’
그러나 포악한 드라칸의 ‘배신 심리’는 드래곤의 특성상, 루키우스가 곧바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드라칸이 드래곤의 아종인 이상 별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도 아니고 본능인데 뭐 어쩌랴.
분노한 그는 플라이트 마법으로 휙 날아 드라칸의 배 옆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인간화 모습이라도 드래곤은 드래곤.
쾅!
본체로 돌아간 드라칸이 충격을 받아 비틀거리자 놀란 페이가 루키우스를 나무랐다.
“루키우스 님, 너무해요. 절 떨어트리지 말라고 해 놓고선 우리 모모를 괴롭히면 어떡해요!”
“뭐?”
“됐어요. 우리 모이테트라 바누스, 괜찮니?”
“꾸에에에!”
어쩐지 서글픈 드라칸의 엄살이 고원의 풀 위를 사정없이 호령했다. 페이는 장갑을 낀 손을 뻗어 매끄러운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달랬다.
“그래, 많이 서운하지. 저 위로 살살 걸어가 줄래? 오늘은 아팠으니까 높이 날자고 하지 않을게. 우선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응! 잘한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페이의 칭찬 세례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저기 있는 나무를 다치지 않게 한 바퀴 돌아서 저 아래로 가는 거야. 옳지, 옳지! 역시 우리 모모야.”
“…….”
루키우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페이 녀석, 넌 드라칸 라이더잖아! 그런데 저놈을 창공에 덜컥 띄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무슨 아기나 강아지 다루듯이 하고 있어?
드라칸 중에 제일 오래 산 모모 놈한테 걸음마부터 시킬 필요는 없단 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한 말을 곧바로 내뱉지는 못했다.
모모야 노련한 늙다리 드라칸이라 이 상황을 즐기겠지만, 페이는 말도 혼자 못 타는 환자 중의 환자 아닌가.
말을 못 탄다고 해서 환자 취급을 받아야 할 건 아니나 그의 시각으로 보면 그러했다.
그래…. 뭐, 너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라.
‘젠장. 빨리 9서클 마법사로 만들어서 결투하려고 했더니 이것도 어설퍼, 저것도 미숙해. 인간이란 생명체는 왜 이렇게 연약하기 짝이 없어?’
루키우스가 뭐라고 생각하든 페이는 자기 방식대로 모모를 다루기 바빴다.
나름대로 ‘드라칸 어질리티’를 고원에서 해 본 그녀는 꽤 자신감을 얻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그때는 낮은 곳에서 박차고 날아오르는 연습부터 천천히 해 보면 될 것 같았다.
거의 세 시간을 모모의 등에서 버틴 그녀는 상기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루키우스!”
“뭐가.”
“루키우스가 임대해 준 모모는 정말 착하고 순한 드라칸이에요. 문제도 거의 일으키지 않고요! 왜, 책에서 찾아봤는데 대부분의 드라칸은 엄청난 성격이던데요?”
루키우스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책에 뭐라고 적혔지?”
“음, 일단 엄청나게 탐욕스럽고 틈만 나면 주종관계를 배신하려고 난리래요. 감옥에 가둬 놓으면 머리로 천장을 들이받아 탈출한다나요?”
“아… 아, 그래. 배신이라니. 그것 참 큰일이지.”
“그래서 옛날 고대 제국에선 드라칸을 마력 사슬로 묶어 놓기도 했다는데요.”
“정-말 무서운 일이다. 감히 드라칸 따위가 탈출을 꿈꿔서 마탑 천장을 머리로 뚫으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
“그럼요.”
탁, 탁.
아직 본체에서 솜털 병아리로 돌아가지 않은 드라칸의 견갑골을, 드래곤의 튼실한 손바닥이 단어 하나를 말할 때마다 턱턱 때렸다.
페이의 눈으로 볼 때는 그냥 토닥이는 행위였으나 마력이 은밀하게 실렸기에 모모는 죽을 맛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고대에 쓰던 마력 사슬이 루키우스의 끔찍한 협박보다는 더 인간적(?)이다!
“꾸에에엑!(배신 안 해!)”
“응? 왠지 모모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
모모가 자기 원래 주인인 루키우스만 알아들을 수 있게 소리 지르자, 페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자고 일어나면 다시 되겠지 뭐.”
루키우스가 사악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겠죠? 걱정은 안 해요.”
“슬슬 돌아갈까? 그리고 다른 드라칸이라면 몰라도 모모는 안전해. 너를 배신하고 도망간다든지 뭐 그런 거, 있을 수 없어.”
페이가 신뢰하는 눈으로 보았다.
“모모가 착해서죠?”
“착하다기보다는…. 말 못 하는 드라칸이라도 최소한의 인지 지능은 있잖아. 쟤도 자기가 살려면 알아서 눈치껏 기어야지. 일단 원주인이 나라는 게 가장 크지만.”
루키우스는 눈가만 굳힌 채로 입꼬리만 환하게 웃으며 모모를 보았다.
중간에서 죽어나는 건 대화의 주제인 드라칸 혼자였다.
“그에에에… 꾸에 그에에에엑….(제발… 알겠다고 대답 좀 해 줘….)”
“네!”
“꾸에에…!(주인님!)”
“야, 원래대로 돌아가.”
‘원래라니! 이 모습이 나의 원래인데!’
드라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으나, 어쩔 수 없이 보송보송한 새끼 새의 모습으로 돌아가 페이의 품에 쏙 안겼다.
루키우스가 봉인을 풀고 반쪽짜리나마 부활한 이상, 이 인간 여주인의 따스한 품만이 그의 안식처가 될 것이다.
루키우스, 또 모모와의 짧은 수련은 의뢰를 앞둔 페이의 긴장을 일정 부분 해소해 주었다.
그녀의 물 마법은 슬슬 6서클을 상회하는데, 그야말로 미친 속도였다. 다만 나머지 속성 마법은 썩 잘되지 않았다.
그나마 두 번째로 월등한 쪽은 땅이었고, 그다음이 바람, 제일 약한 쪽이 불이었다.
‘으음…. 잘 되려나.’
슬슬 황궁에서 여는 수확제 시즌이 돌아오고 있다.
황태자의 주문대로 남에게 안 들키고 불 마법으로 폭발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1서클인 파이어 애로우는 당연히 쓸 수 있지만, 시전자의 손에서 날아가므로 들키기 쉬워 탈락.
3서클의 플레어 버스트는 폭발 지점을 지정하기에 딱 알맞은데…. 페이가 불 계열은 아직 2서클 마법도 쓰기가 영 힘들다.
‘어쩌지?’
황태자가 준비한 폭발물에 마법으로 불만 슬쩍 붙이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사람 눈에만 띄지 않으면 그만이고, 조사도 황태자 측에서 하니까 마법을 쓴 흔적이 나와도 증거를 알아서 인멸해 줄 테지만.
내 손에서 날아가는 파이어 애로우를 써서 당당하게 ‘자, 내가 범인입니다. 어서 체포하세요.’라고 밝힐 수는 없잖아….
고민에 빠진 페이에게, 어느 날 루키우스가 웬 두루마리를 건넸다.
“뭐에요?”
“펼쳐 봐라.”
“엇…. 이건?”
루키우스가 건넨 것은 무려 7서클의 마법 수식이 정확하게 완성된 파이어 익스플로전 스크롤이었다.
7서클의 마법을 쓸 수 있는 것과 7서클의 마법을 스크롤에 담아내는 능력은 하늘과 땅 차이. 더군다나 이것은 사용 후 말끔하게 녹아 사라지는 고품질의 물건이었다.
페이의 의뢰 완벽 맞춤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키우스는 뿌듯해서 자기 딴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미소를 씩 지었다.
‘후, 이쯤이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슬슬 눈치를 채겠지? 쟤는 다른 건 몰라도 책은 열심히 읽잖아. 스크롤을 만드는 능력! 그건 마법사 중에서도 고위급이나 되는 거라고. 암, 그렇지.’
스크롤이 진품임을 알아본 페이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루키우스!”
“흠.”
뻐기려고 잔뜩 폼을 잡고 있던 드래곤의 귓가에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역시 루키우스는 대단해요. 이런 물건을 만드는 능력자 마법사님과도 친분이 있는 건가요? 정말 감격했어요!”
“…뭐라고?”
루키우스는 원통할 지경이었으나 페이의 시각으로 보면 당연했다.
‘이 몸이 그걸 만들었다는 생각은 못 해 보는 거냐!’
그는 마탑에 7서클의 마법사로 들어왔고, 7서클의 마법을 스크롤로 만들려면 최소한 8서클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게 마법 세계의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현재 루키우스는 공식적으로 7서클 마스터.
당연히 페이로선 루키우스가 만들었으리란 생각을 꿈에도 하기 어려웠다.
‘제길. 페이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게 굼떠? 이쯤 되었으면 눈치를 채야 하는 거 아니야? 네 말마따나 그 포악한 드라칸을 굴종시켜 남을 따르게 하는 건! 이 세상 누구보다 월등한 종족인 드래곤 말고는 없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