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모르는 길을 걷는 소녀, 과거를 답습하는 소녀
무엇보다도 클라인 공작 부인은 뒤돌아 있어도 방심할 수 없다. 머리 뒤에 눈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잖은가.
‘아아, 몰라! 됐어! 그래…. 과거로 돌아온 걸 아무도 모르는데 쟤만 알 리가 있어? 베릴도 셰릴도 다 모르고 있잖아.’
도트는 급한 김에 편하게 생각해 버렸다.
‘내가 쟤 귀에 대고 그간 속앓이했던 말을 죽기 전에 시원하게 다 저질러 놨는데 기억이 났으면! 제정신이면 이미 날 쫓아왔겠지. 수련원에서 열흘이나 허송세월 안 하고 말이야.’
옛 기억이 머리를 스치자 도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끝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입을 다물고 있을 걸 그랬나? 아니야. 난 무려 이 년을 멍청한 모르가나 때문에 고생했어. 모든 걸 다 폭로했던 그때만큼 강렬했던 쾌감도 없었다고!’
다시 한번 사악한 목적을 품은 도트는 눈을 얌전하게 내리깔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좋아, 이번 생에도 그때와 똑같이 널 짓밟아 주겠어, 모르가나. 네 장렬한 최후를 기대하렴! 네 껍데기는 내가 감사히 써 주겠어!’
가을의 귀한 장미를 꺾어 들고 오는 저 귀부인들이, 홀 안에 들어가서 공작 부인에게 도트의 몸가짐이 괜찮다고 속삭여 주기를 바라며.
“…후우.”
뜻하지 않게 도트를 마주한 페이는 생각보다 가슴이 후련했다. 약간의 연기를 곁들여 속을 긁으려고 했는데 잘 된 것 같았다.
도트가 그녀와는 달리 아카드니아 홀 바깥에 쫓겨나 있어서 잘됐구나, 싶어 조소한 게 아니었다.
머리보다 발끝이 먼저 움직인걸.
‘역시, 과거의 은원을 바로잡지 않고선 안 돼. 다 버리겠다고 생각했지만 복수만큼은 놔둘 수가 없구나, 도트….’
마주침을 피하지 않았으니 그 뒤의 일도 오롯이 감당해야만 한다지만.
앞으로 닥쳐올 시련이 두렵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의 조우는 속 시원했다.
‘그래, 네가 저지른 현란한 거짓말 위에 계속 거짓말을 쌓아 보렴. 네가 어디까지 달려가는지 꼭 지켜볼게.’
실크 로브를 도둑질한 일을 뉘우치기는커녕 동고동락한 원생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다니. 과연 도트는, 다시 살아나도 도트였다.
기억을 지닌 둘 다 자신의 과거를 변화시켰지만 도트가 걸어가는 방향은 한결같았다.
‘고대어로 도트는 오점인데 이름다운 행태네, 정말.’
페이는 루키우스를 닮아 버린 싸늘한 미소를 짓고는, 아카드니아 홀을 지나 황궁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카페테리아 점심 식사를 2인분으로 바꿔서 신청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과거에 알았던 사람을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누구든지.
* * *
간 떨어지는 황궁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온 도트는 숨 돌릴 틈 없이 클라인 공작 부인의 내실로 들어섰다.
‘피곤해….’
“그래, 오늘 네 태도는 무난하니 좋았다. 가서 떨지도 않고 제법이더구나.”
생애 최초로 간 걸음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모르가나의 멍청한 얼굴을 미처 떠올리기도 전에 공작 부인의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지난번 살롱에 갔을 때도 느꼈겠지만, 황궁은 거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엄한 곳이다. 네 교육의 성취가 모자라 홀 바깥에 세워 뒀는데 너를 지켜본 이가 몇이나 되는 줄 아느냐?”
“네 분 귀부인께서 지나가셨습니다….”
“그보다 열 명은 더 된다. 하긴 어린 네가 어찌 다 파악하겠니? 나도 못 하는 것을. 황궁엔 벽에도 눈과 귀가 있으니 앞으로 가게 되면 오늘처럼 항상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
“네.”
칭찬은 칭찬인데, 거의 경고성의 말.
‘포셰트!!’
자신의 성취에 전혀 만족하지 않는 거만한 학자를 떠올리니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가 내준 어떤 과제를 다 해도 포셰트는 도트를 늘 한심하게 쳐다보기 바빴다.
모르가나는 시간을 되돌려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데 자신에게는 하필 그 꼬장꼬장한 학자가 붙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잖아!
도트는 치밀어 오른 화를 꾹 참고는 공손하게 말을 올렸다.
“제가 조금이나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렸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하지만,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무어지?”
도트의 푸른 눈에 애처로운 글썽거림이 담겼다.
“오늘 저를 지켜보신 그 귀부인들께서 지나가며 제도의 이야기를 하던데, 솔직히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만약 홀 안에 있었더라면 배움이 모자라 큰 곤경에 처할 뻔했습니다.”
“흐음….”
“포셰트 학자님께서 워낙 대단한 분이라 제 머리로는 따라가기 힘이 듭니다.”
기분이 꽤 좋았던 공작 부인이 물었다.
“요즘 무엇을 배우고 있지?”
“제국 형성 전 고대 부락 시기입니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흠, 좀 과하구나. 네가 무슨 역사가가 될 것도 아니고 당장 필요한 지식은 아니거늘. 일단 알았으니 물러가서 몸부터 물에 담그거라.”
“예.”
“손은 다른 통의 미지근한 물에 따로 담가 놓는 것 알지? 손끝이 고와야 다들 널 쉽게 보지 않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도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클라인 공작 부인의 명령으로 드디어, 그 악마 같은 포셰트 학자가 공작저에 더는 오지 않게 되었다는 게 아닌가!
그동안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오갔을 뿐이나 주고 가는 숙제가 엄청났기에 늘 고통을 받았다. 이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쓸데없는 공부를 할 시간에 다른 요긴한 일을 할 수 있잖아? 정말, 큰 산을 하나 넘었어. 도트는 잠시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돼… 됐어. 그래, 생각보다 시기가 좀 늦어졌어도 잘 되고 있잖아? 내가 두려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대로만 쭉 가면 될 거야.’
아직도 셀피아 하우스에서 머무르고는 있으나 요즘 본채로 불려 가는 일이 잦았다. 특히 첫 황궁 나들이를 가기 며칠 전엔 거의 매일 갔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카셀 대공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절도 가을로 접어들었고, 예전과 같은 식이라면 그는 소리 소문 없이 로지아 국경지대로 다시 가야 맞는 이야긴데 왜 안 갈까.
‘제길, 혹 나와 마주친 바람에 안 간 건가? 아니겠지. 쳇, 귀찮게! 공작가의 대공자가 일개 에이나 때문에 할 일을 제쳐 둔다는 건 말이 안 돼. 신경 쓰지 말고 난 내 일을 하자.’
눈엣가시 같은 포셰트를 물리친 뒤라 내심 카셀도 멀리멀리 가 줬으면 싶은데. 행운이 두 번 연달아 오지는 않아 아쉬웠다.
도트로선 처음부터 호통을 듣게 한 카셀이 보기 싫어 죽을 지경이었으나, 티를 내긴 곤란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공작가의 후계인 그를 함부로 건드려? 어떤 사달이 날지 뻔히 아는데!
그러기에, 도트의 다음 먹잇감은 만만한 모리스였다.
그는 한층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도 불구하고 달랑 한 겹의 셔츠 차림으로 잎이 다 떨어진 나무에 기대 있었다.
앙상한 나무가 그의 처량한 꼴과 똑 닮은 것 같아, 남의 눈만 없다면 마음껏 비웃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안녕하셨어요, 모리스 공자님. 꽤 오랜만에 뵈어요.”
도트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려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인사를 안 받아 준다고 해서 무안할 필요는 없었다. 도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청승을 떠는 그의 심리가 무엇인지 꿰뚫고 있었다.
‘후후, 전엔 카셀 대공자가 공작저에 없어서 덜했는데 이번엔 반항기가 더 심하게 왔나 보네.’
제국에서 단둘, 내로라하는 공작가의 영식.
여기까지만 보면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겠지? 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모리스의 처지와는 퍽 달랐다.
자기 형이자 카셀이란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모리스는 이전에도 종종 반항기를 보였다.
그야 공작의 칭호와 영지 상속을 못 받는 차남이라 그런가? 싶겠으나, 도트의 생각은 달랐다.
젊은 나이에 한 기사단의 부단장씩이나 맡은 카셀의 그늘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기에 모리스가 이렇게 된 것이다.
형이 너무 잘났으니. 모리스가 무슨 성과를 내든 카셀보다 늘 뒤처지는 신세가 되는 것 아닌가?
그 카셀이 난데없이 공작저로 돌아와 온 사람들의 관심을 다 가졌기에 화가 났겠지. 여동생이 실종되고, 맏형은 국경지대로 불려 가서 혼자 부와 영예와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잖아?
그거… 곧 나한테도 슬금슬금 빼앗길 텐데 말이야.
그녀가 썩 물러가지 않자, 모리스는 내내 무시로 일관하다 갑자기 말을 걸었다.
“왜.”
“날씨가 추운데 감기 드실까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부집사에게 받아 온 외투이니 이것을 덮으시어요.”
“됐다. 너도 내가 그렇게나 약해 빠진 놈으로 보이는 거냐?”
모리스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으나 노기는 없었다. 도트는 그를 둘째 공자님, 이라고 불러 카셀을 떠올리게 만드는 우 따위는 범하지 않았다.
‘좋아.’
남의 비위 맞추기라면 이골이 났기에 그녀는 무척 자신 있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공작저에 처음 왔을 때 모리스 공자님의 훤칠함과 당당함에 몸가짐을 더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흥.”
“…그렇지만, 카셀 대공자님은 역시 어렵습니다. 제가 배우고 또 배워도 그분의 비위를 맞추기란 어려울 듯싶습니다.”
모리스는 상대방이 내민 외투는 여전히 받아 들지 않았으나, 말대답은 해 주었다.
“형님은 여간내기가 아니지. 태어났을 때부터 다들 장군감이라고 했는데 그 젊은 나이에 국경지대로 덜컥 부단장이 되어 떠나갔어.”
“역시 대공자님이십니다.”
“남들은 좌천된 기사단이란 이유로 험담하려고들 난리지만 제 얼굴에 침 뱉기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저는 처음 뵈었을 때 대공자님께 미움을 산 눈치라 너무 두렵습니다. 그분의 대단한 권위에 짓눌려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렵답니다.”
모리스는 카셀을 어려워하는 초보 에이나를 빤히 보았다.
흠….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어야 옳았다.
아버지인 클라인 공작도 기사 서임 직후엔 곧바로 어른 대접을 해 주었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으며 남동생인 모리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저 도로테아란 에이나가 그런 생각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괜히 공작가의 대공자가 아니다.”
“모리스 공자님만 계실 적에는 그래도 제가 노력하면, 시간이 지나가며 두루 예쁨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은근히 카셀의 존재를 내돌리는 말로 환심을 사려 했다.
‘이것 봐라?’
모리스의 생각에 도로테아가 한 말은 꽤 건방졌다.
제가 뭔데 감히 카셀의 존재를 두고 어렵다느니, 다른 사람들에게 예쁨을 받느니 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단 말인가?
카셀이 클라인 공작저에 있든 로지아 국경지대에 있든, 그는 늘 클라인 공작가의 대공자였다.
모리스는 형의 존재감을 어디서든 항상 느꼈고 거기에 짓눌려 있을망정, 카셀을 함부로 여긴 적이 없었다.
그럼 제가 편히 살도록 형님이 여길 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소린가?
모리스의 입술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얼마 전 카셀에게 뱉어 낸 못된 속마음은 여전했으나, 공작저에서 형에게 그와 비슷한 말을 할 사람이 또 나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고 아직은 클라인 공작가의 차남인 모리스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티아나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또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