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두 가문의 다툼
랏셀 가문이 여태 공작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마뉴엘라만 이름뿐인 공녀로 불리게 하는 것은, 랏셀 가문이 앞으로도 제국에 뿌리를 내리게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사실을 페이가 아는 이유는, 똑같은 방식으로 현 황제의 황비가 된 라냐의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라냐 황비 역시 델피어 왕국이 멸망한 뒤 공녀 칭호를 받고 그를 바탕으로 황비 자리에 올랐다.
‘잠깐.’
공손히 앉아 있던 페이의 얼굴이 굳었다.
황태자가 유하게 대해 주긴 하지만, 그는 엄연한 의뢰자다.
그가 공연히 자기 파혼 이야기를 꺼낼 리도 없다. 뭣보다 의뢰 관련 이야기 도중이었잖아? 설마….
“…제가 해야 하는 일이 황태자 전하의 과거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랏셀 가문은 말만 공작가일 뿐 거의 명예직이었다.
황실에서 지원한 저택에서 살고, 매달 지급되는 녹봉을 받았다. 파혼한 지금도 재정의 사정은 똑같다고 들었다. 영지도 농노도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마뉴엘라가 있는 랏셀 공작가에서 수상한 일을 꾸밀 가능성은 무척 적다. 이미 그 저택의 사용인들 상당수가 황실에서 보낸 자들일 테니까.
만약 낌새가 이상하다면?
‘이젠 약혼녀도 아니니까 멸문당하기에 더 가까워진 조건…?’
페이의 등줄기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고, 그 순간 루키우스의 손이 팔을 툭 건드렸다. 정신 차리란 뜻이었다.
아. 나는 안심해도 되는구나.
기묘한 안도감을 느낀 페이를 향해 황태자가 말했다.
“내 결혼은 신분 탓에 정략결혼일 수밖에 없지. 랏셀 공녀와의 약혼도 그러했고 거기에 대해 난 불만을 토로해 본 적이 없었네. 그거야 랏셀 가문도 마찬가지였겠지.”
“네.”
“그리고 파혼을 제의한 쪽은 랏셀 가문이었네.”
“…네?!”
믿을 수 없는 말.
도대체, 왜?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황실의 공문 한 장이면 랏셀 가문은 당장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왜 그랬을까? 무슨 사정 혹은 뒷배가 있었기에?
상식적이지 않았다.
“놀랍지만 사실이네. 이후 오랜 시간 조사한 결과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오를레앙 공작가의 술수가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정황이 포착되었지.”
“오를레앙 공작가에서요?”
“파혼 직전까지 그쪽의 사람과 꾸준하게 접촉한 흔적이 간신히 드러났거든, 내용은 모르지만.”
“하지만… 그곳엔 공녀님이 없는 걸로 아는데 무슨 이득을 위해서….”
“내가 의뢰할 사람을 잘 골랐어, 페이 양. 그대가 사교계의 일에 밝아서 다행이야.”
‘앗! 너무 의심스럽게 행동했나?’
페이가 귀족 가문의 동향 및 가족관계를 줄줄 외우는 까닭은 뻔했다.
자신의 에이나 역할.
하루가 멀도록 들들 볶이면서, 밤에 서러운 눈물을 훔치면서 외웠던 그 지식이 본의 아니게 중요한 장소에서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페이의 출신이 그레이스 수도원의 평범한 고아란 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다행히 그는 큰 의심은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대의 말마따나, 오를레앙 공작가에선 내 약혼을 파하고 그쪽에서 황태자비 후보를 내세울 생각 같진 않아. 그들의 친척 가운데도 마땅한 연령대의 영애는 없거든. 양녀를 들이려는 움직임도 물론 없고. 한데 황실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한 적도 딱히 없단 말이지?”
“아….”
“단지 그들이 휘안테 후작가와 물밑으로 신경전을 벌인다는 첩보를 얻어 냈네. 일단 그쪽을 긁어 봐야 뭐라도 잡히겠다는 판단이 섰지.”
“그럼 제가 폭발을 일으켜서 건드리는 쪽도 그 공작가인가요?”
“맞네. 오를레앙 공작가와 휘안테 후작가의 세력이 대기하는 장소에서 일을 벌이게 되겠지.”
‘휘안테 후작가….’
휘안테 후작 부인, 즉 조나 휘안테는 클라인 공작 부인과 친분이 있으면서도 페이를 사사건건 괴롭혔다.
그리고 클라인 공작 부인은 페이의 고민을 알면서도 후작 부인과의 만남을 단 한 차례도 막아 주지 않았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워낙 권위적인 분이라 내겐 말도 잘 안 거셨는데. 가만, 그런데 휘안테 후작가가 오를레앙 공작가와 완전히 날을 세운 장면을 내가 봤었나?’
둘 다 모르가나 시절의 그녀에게 썩 우호적이지 않다는 공통점만 가졌지, 서로 싸운 정황은 없는 걸로 아는데.
‘한데 사고가 터지면 서로를 의심하게 될 거라고? 물밑 신경전을 이 시점에 벌이고 있었어? 역시… 내가 모르는 일은 어디서든 일어나는구나.’
그 사고를 벌일 때 페이가 클라인 공작가 사람들과 직접 안 엮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보게 되겠지만, 도트가… 나올까, 그 자리에.
상념을 거둬 낸 페이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찰했다.
실라스 황태자의 진정한 목표는 오를레앙 공작가의 음모 파악과 분쇄에 있었다. 좋아, 무슨 사유가 있었는지 알아보는 거야.
페이는 그의 진정성을 보았다고 여겨, 의뢰를 꼭 완수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차를 타고 황태자궁을 나오는 길에, 루키우스는 둥근 돔 형태의 큰 건물을 가리켰다.
“시간 남았는데 저기로 가 보자.”
“어… 괜찮을까요?”
황궁인데 함부로 돌아다녀도 되나.
페이는 황궁에 왔을 적에 응접실과 다과 모임이 열리는 아카드니아 홀만 주야장천 다녔기에 지리는 잘 몰랐다.
“너 그거 있잖아.”
“어떤 거요?”
“부절.”
황태자가 앞으로의 곤란을 미연에 방지하란 의미로, 황실의 맹약이 담긴 브로치 말고도 직사각형의 패를 하나 건넸다.
빛을 비추면 약한 오렌지빛이 감도는, 와인색의 큰 가넷 보석이 박힌 물건이었다.
황태자는 이것이 있으면 황제궁과 닫힌 황후궁을 비롯해, 일부 금지구역을 빼고는 다 돌아다닐 수 있다고 했다.
루키우스는 이것이 부절이라고 했다. 신분을 증명하는 패라고 했으니 적당한 장소라면 통과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절…이라면, 음, 하지만 저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받은 날부터 덜컥 써도 괜찮나?’
“저기서 책 냄새가 나. 가서 뭣 좀 찾아봐야겠어.”
고민하던 페이의 표정이 환해졌다. 마법사가 책을 좀 밝혔다고 해서 추궁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뭐야, 그런 거였어요? 저는 여기선 종이 냄새 같은 건 안 맡아지는데요.”
“네 코가 둔한 거야.”
루키우스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약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황궁의 도서관에 가면 위대한 드래곤인 그가 잠든 사이 일어난 일의 공백을 낱낱이 알 수 있지 않을까.
모르가나의 일은 차치하고라도, 지식에 대한 무한한 욕구가 그를 찔렀다. 그는 드래곤답게 그간 일어난 수많은 역사의 재보를 모조리 외워 버리고 싶었다. 그게 진실이든 날조든 간에.
그의 말마따나 둥근 건물은 황궁 도서관이 맞았다. 이름을 적고 안으로 무사히 입성한 페이는 벌써 책 몇 권을 빼든 루키우스에게 물었다.
“오늘 내로 나갈 수 있겠어요?”
“…….”
“루키우스.”
“아, 왜. 아직 오전이니까 좀 괜찮잖아.”
“사서한테 물어봤는데 오후 다섯 시쯤엔 모두 퇴실해야 한대요. 그때 데리러 오면 괜찮겠어요?”
“어.”
페이는 책에 은빛 머리칼을 푹 파묻은 루키우스를 보고 웃었다.
평소 그가 잘난 척하다가 가끔 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적엔 퍽 즐거웠다.
동질감인가? 독서에 열중하는 모습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그냥… 마탑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 중에 시선이 자꾸만 간다. 그와 나름대로 친한 사이인 걸 차치하고라도 그랬다.
“알았어요. 나가는 길에 루키우스 먹을 점심 식사 신청해 두고 갈 거니까 거르지 말고 카페테리아에 꼭 가세요?”
“너는 네 일이나 열심히 하고 남 좀 그만 챙겨.”
“…루키우스는 남 아니에요. 그럼 이따가 봐요.”
마법사면서도 황궁 도서관에 미련을 두지 않고 나가 버리는 페이.
그녀의 걸음걸이는 멀어지는 동안에도, 누군가의 시야에 낱낱이 들어오고 있었다.
샤르프 제국 멸망 후의, 왕국 난립 시기 역사책을 읽던 루키우스의 눈이 책장 너머를 흘깃거렸다.
‘혼자 다녀도 괜찮겠지? 알아서 잘하겠지, 뭐. 안 그러면 너한테 실망이다.’
그의 까만 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에 도로 파묻혔다. 오늘 내로 급하게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았다. 뭐, 마탑으로 돌아가고 나서 사념체를 보내어 읽는 수도 있긴 하지만.
이왕 온 김에 최소한 열 권쯤은 서둘러 해치우고 싶었다.
마탑의 어엿한 마법사가 황궁에 왔다가 홀로 남겨졌다고 곧바로 위기에 빠지면, 그것도 문제잖아?
광포한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몸에서 슬쩍 빠져나간 마력의 일부가, 페이의 조그마한 심장을 든든하게 보호했다.
루키우스를 도서관에 두고 나온 페이의 발걸음은 잠시 방황했다.
‘어디로 가지…. 어디서 시간을 조용하게 보내면 좋을까?’
고심 끝에 황태자의 의뢰를 받아들인 뒤라 그런지 마음 어딘가가 허했다. 루키우스는 위정자 놈들을 함부로 믿지 말라고 투덜댔으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페이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그의 기준으로 ‘작은 사고’를 일으킨 다음 할 일이 무언지 말해 주지 않았지?
수확제에서 두 가문의 반목을 일으키고, 그가 얻을 명분으로 뭔가를 거하게 저지르겠지. 의뢰를 완수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다.
‘이상하긴 해. 황태자 정도 되는 사람이면 나 말고 다른 마법사를 섭외하기 쉬울 텐데…. 왜 과거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지? 이 년 전의 수확제는 조용히 지나갔잖아. 오를레앙 공작가를 다른 쪽으로 건드려 봤던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황태자를 붙잡고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냐며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페이는 무심하게 걷다 말고 자기가 어디에 도착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허무한 실소를 흘렸다.
그녀의 다리에 달린 발이 무슨 죄가 있겠어?
생각 없이 찾아온 사람이 잘못이지.
“하하….”
구두 밑창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아카드니아 홀의 테라스 너머로, 늘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황궁에 내방한 손님들을 위해 화려한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화원.
그리고 그쪽에 아담하게 지어진 녹음의 홀이었다. 큰 나무가 드리워진 그 작은 홀은 한 번에 한 명 혹은 그쪽을 따르는 추종자들만 쏙 들어갈 수 있었다.
말이 홀이지 그곳은 사실상 귀인을 위한 쉼터였다.
모르가나는 녹음의 홀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녹음의 홀은 대개 신분이 높은 귀부인과 영애들이 무도회의 번다함을 피해 잠시 쉬는 곳이란다.”
클라인 공작 부인은 그 설명만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더랬다.
미숙한 모르가나를 하이에나 같은 귀부인들이 득실거리는 아카드니아 홀에 던져 놓고 혼자 녹음의 홀로 쉬러 간 적이 많았다.
심지어 황궁에 처음 온 날도 그랬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공녀님의 에이나’로서 쏟아지는 숱한 질문과 질시를 받아 내느라 너무 고생했다.
그때… 얼마나 암담하고 두려웠는지.
페이의 두 눈에 서글픔이 어렸다.
일부러 그랬겠지? 내 능력의 끝을 시험하기 위해서, 당신의 소중한 딸 곁에는 무슨 일이든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을 두려고.
누구의 딸인지도 모르는 나를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지…. 나, 내가 그렇게 살리란 걸 알았으면 곱게 갔었을까?
그녀의 팔에 분노의 냉기가 조용하게 휘감겨 들려 하자 페이는 진정하려 애썼다.
‘괜찮아, 다 끝났어. 부디 침착하자. 이 홀 자체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