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황태자의 의뢰
모르가나로 에이나일 시절 이 년간, 황궁에 간 일은 숱하나 정식으로 황제 또는 황태자를 알현한 적은 없었다. 그건 클라인 공작 내외의 뜻이기도 했다.
그녀 자신도 그런 자리가 만들어졌다면, 무척 부담되었을 것이다.
다만 라냐 황비와 그 소생인 아스테인 황자와는 안면이 있었다. 황비는 전쟁에 패해 시집온 델피어 왕국 출신으로, 꽤 온화한 성격이었다.
황자 역시 까다로운 귀족들과는 달리 아량이 넓은 편이라 생판 남보다는 낫다.
‘직계라고 아예 못을 박은 걸 보면 그들은 아니겠네. 황제… 황태자… 둘 중 한쪽? 어디든 다 부담스러운데.’
황태자의 모후인 베시아드네 황후는 일찍 서거했으니 외가 측에서 나섰다면 직계라 했을 리가 없다. 귀족가의 의뢰로 들어오거나 해서 마탑 측에 거절당했겠지?
도트가 있는 클라인 공작가 쪽도 크게 꺼려지는데 여우 굴을 피해 호랑이 굴이라니.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뛰어들기는 내키지 않았다.
페이의 안색이 썩 좋지 않자 벤이 다시금 설득했다.
“으음, 페이 양. 황실의 의뢰가 부담되리란 점 우리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쪽에서 굳이 페이 양을 지정해서 원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전에 과일 축제 때 페이 양이 나서서 얼음의 재고량을 넉넉하게 채워 줬잖습니까?”
“네.”
“그때 의뢰도 아닌데 진창에 빠진 귀족의 마차도 하나 구해 주고요?”
“어… 그걸 어떻게….”
벤이 사람 좋은 웃음을 띠었다.
“하하, 아무도 안 보는 것 같아도 그런 일은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마법 성취가 나날이 발전하는 만큼 페이 양도 그런 일에 선뜻 나섰잖습니까. 아마 그 평판도 약간 영향을 줬을 겁니다.”
“…….”
“황궁에 가서 의뢰 내용을 자세히 들어 보고 거절을 원한다면, 망각의 물을 마시고 없던 일로 할 수 있습니다.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페이 양의 안전은 당연히 마탑과 황실 모두 보증합니다.”
“음….”
“걱정하지 말아요. 망각의 물 역시 마탑에서 만든 것으로 제공할 겁니다.”
단순히 그 두 건의 일만 보고 황제 혹은 황태자가 페이를 찾았을까? 황실에 속한 마법사들도 있고, 실질적인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황실 기사단도 있다.
그러니 굳이 페이가 나서야 하는 속성의 일이라면.
‘남들 앞에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일이란 뜻일까?’
페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이상으로, 루키우스의 안색이 험상궂게 변했다.
“의뢰자도 내용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맡기는 의뢰라니, 그런 건 하지 마라, 페이. 뒤끝이 틀림없이 안 좋아.”
“루키우스 님.”
“왜?”
“원한다면 루키우스 님도 동행이 가능합니다. 그쪽에서 페이 양이 원할 경우, 마탑 내부의 단 한 명에 한하여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를 허락했습니다.”
“해 보자.”
페이는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꾼 루키우스를 째려보지 않았다.
그녀 혼자 황궁에 가는 것보다 루키우스가 같이 가 주면 당연히 안심이 된다. 남은 문제는 자신의 판단이었다.
‘잘 생각해 보자, 페이. 정말 너 혼자서도 황궁에 가서 정체불명의 의뢰를 맡을 자신이 있어? 가서 만에 하나 도트 혹은 클라인 공작가의 사람들을 만난대도 의연할 수 있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어? 네 원한보다 수도원의 안전을 우선할 거야?’
벤은 갈등하는 페이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나는….
할 수 있어.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도트는 일을 꾸밀 거잖아?
시작하자, 내가 죽음에서 돌아와 선택을 달리했던 뜻밖의 그날처럼.
그녀는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궁으로 가는 길은 이상하리만큼 길게 느껴졌다.
페이는 창가에 턱을 괴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제도 중심부의 면면에 마음을 빼앗겨 있었다.
역시 화려하고 생동감 넘쳐.
“무슨 생각해?”
“루키우스, 루키우스는 황궁과 혹시 관련이 있나요?”
“아니. 실낱같은 연이라면 황궁보다는 너하고 훨씬 더 많을 거야. 난 이 제국의 황궁에 발을 들인 적이 없어.”
루키우스로선 솔직하다 못해 무서운 복선을 말해 줬으나 알 리 없는 페이는 무감각하게 대꾸했다.
“그렇겠죠…. 저도 황궁하고는 연결된 고리 같은 게 없네요. 그래서 더 궁금해요. 마탑에 많고 많은 마법사가 있는데 왜 하필 날 불렀을까, 누군가를 얼음 안에 가둬 죽이라는 의뢰 같은 게 아니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요.”
“단순히 누구를 죽이는 일이라면 너 말고 뛰어난 암살자를 고용했을 거야. 좀 더 복잡한 일이겠지.”
페이가 생각해도 루키우스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과연, 누가 그녀를 불렀을까?
페이의 궁금증은 황궁 깊숙한 곳에 마차가 도착하고, 그곳이 에이나 모르가나로서 전혀 와 보지 못한 장소임을 깨닫고, 화려한 금발을 가진 젊은 남성을 눈앞에 두고서야 풀렸다.
클라인 공작저에서 책으로만 봤던 황가의 남성 제복을 멋들어지게 입은 자.
이 사람은, 과거에서 사교계의 일에선 늘 칩거를 거듭했던 수수께끼의 황태자 실라스야!
페이의 품에 고이 둔 망각의 물병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어서 오게.”
“…마탑의 마법사 페이입니다. 이쪽은 제 동료 루키우스입니다. 황…태자 전하시죠?”
실라스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그렇다네. 황실 직계의 의뢰라고 했을 때 나 아니면 황제 폐하의 것이라고 짐작했겠지?”
“…네.”
루키우스는 딱히 말이 없었으나, 실라스는 지적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떠한 일을 반드시 일으켜야 하고 그게 황실에서 시작된 불씨란 건 모든 사람이 몰라야 하네. 그래서 마탑에 이 일을 은밀하게 의뢰하게 되었지.”
“저 말고도 뛰어난 마법사님들이 숱하게 계십니다.”
실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재능으로 따지면 물 마법에 있어선 페이 양을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다면서?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대가 마탑에 입문하고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마법사란 점이야.”
“……?”
“즉 마탑 내부에 자자한 명성은 아직 이쪽에 알려지지 않았어. 그대만큼 이 일에 적임자는 없다는 게 내 단독 판단이네.”
“아….”
황태자는 과연 무엇을 하려는 걸까?
페이의 궁금증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가 과거에 무엇을 꾀하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짐작해 보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사교계에 몸을 오래 담은 귀부인들도 황태자를 몇 년째 구경도 하지 못했잖은가.
클라인 공작은 가끔 보는 눈치였으나, 공작 부인은 일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든 사람이 황태자 실라스라고 투덜댔었다.
그녀가 모르던 과거의 이면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황실의 의뢰라니,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란 건 알지만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어.’
“이번 수확제에 부속된 모의 전투 대회가 열릴 예정이네. 페이 양, 그대는 거기서 작은 사고를 일으켜서 모인 세력들의 마찰을 종용하면 돼.”
“그런 짓을 하면 인간의 법도대로 페이에게 큰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대뜸 입을 연 루키우스의 말투가 너무 차가워서, 페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답하는 말은 존댓말인데 그녀가 다루는 얼음보다 더 냉랭한 한기가 몰아닥치는 기분이었다.
황태자는 추호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진지하게 답했다.
“아니, 페이 양이 그 자리에 가지 않아도 부정한 움직임은 시작될 걸세. 언젠가는 말이지. 그 바람을 앞으로 일찍 끌어오는 것뿐이고 페이 양은 절대로 다치지 않아.”
“작은 사고라면….”
“그 자리에서 페이 양의 신상이 낱낱이 드러난다면 오히려 더 안전할 걸세. 내가 페이 양에게 원하는 건 지정된 장소에 마법으로 살짝 불을 붙여 주는 행위이네.”
“불이요?”
“그 불로 폭발이 일어날 테지만 소리만 요란하고 파괴력은 미미한 화약이라 사실상 다치는 사람은 없어. 다만 거기에 모인 두 세력은 서로가 범인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겠지.”
황태자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미궁에 더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수확제에 부속된 모의 전투라면, 결국엔 귀족 가문 간의 싸움이잖아? 그런데 그들의 마찰을 종용해야 하는 이유가 뭐가 있지?’
혹시…!
그녀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황태자 전하. 그게 혹시, 전하께서 칩거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까?”
만난 이후로 내내 온화하게 굴던 실라스의 표정이 느리게 변화했다.
그의 따스하던 눈빛에 서늘한 심연이 들어차는 모습은 꼭 어둠 속에 잠긴 광포한 바다를 보는 것만 같았다.
참 신기하다.
옅은 금안을 보면서 바다를 떠올리다니.
아무튼, 페이는 정답을 맞췄다고 직감했다.
“여기서부터 더 듣고 싶다면 의뢰를 정식으로 맡아 주게, 마법사 페이 양.”
“의뢰를 성공하면 저는 무엇을 받을 수 있죠?”
그녀는 꽤 대담하게 물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빠트린 출생의 비밀조차 꼭꼭 파묻기를 선택한 페이였다. 그런 그녀가 돈을 바라고 의뢰 따위에 연연할 이유는 없었다.
“그대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신분 보호는 반드시 해 줄 생각이네. 차후 중대한 위협을 당했을 경우 황실의 힘을 동원할 수 있는 증표를 주지.”
실라스는 자기 외투에 달린 브로치를 떼어 내고 손을 위에 올렸다. 그러자 아칸 제국의 문양이 붉게 빛났다가 서서히 점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길 수 없는 황실의 맹약!
“아….”
“그대의 대답은?”
진심이구나.
눈을 크게 뜬 페이는 품에 든 망각의 물을 꺼내 내려놓고 답했다.
“하겠습니다.”
“좋군.”
망각의 물 두 병이 치워지고, 실라스의 브로치를 받는 내내 페이는 실소를 금하려고 노력했다.
이 상황 자체가 웃겨서가 아니었다.
‘내가 싫다고 다 뿌리치고 마탑으로 달아나 놓고 결국엔 내 발로 그들에게 가까워지고 있어. 이건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은, 내가 만든 운명이야.’
무슨 말로, 어떻게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황태자의 의뢰를 받아들인 이상.
언제고 클라인 공작가의 사람들을 보게 될 가능성은 무한하게 커졌다. 그 위험하고 고된 길을 페이 스스로 발길을 내디디고 말았다. 도트와의 싸움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선택이라니.
누군가가 모든 사정을 안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그녀는 실라스의 앞에서 어떠한 말도 섣불리 꺼내지 않으며 대화를 경청했다.
“페이 양, 그대는 방금 나의 칩거에 대해 운운했지?”
“죄송합니다.”
의뢰를 받아들인 직후라 그런가, 실라스의 표정은 다시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아닐세. 진실에 대한 의문은 마법사에게 중요한 소양인데 어찌 탓할 수 있겠나? 그보다 내가 누구와 파혼하였는지 아는가?”
페이도 페이였다.
남들 같으면 이쯤 되어 황태자의 눈치를 보느라 쩔쩔맸을 텐데 그녀는 아는 그대로 냉큼 대답했다.
“마뉴엘라 드 랏셀 공녀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칸 제국의 제대로 된 공작가는 단둘, 클라인 공작가와 오를레앙 공작가다.
그리고 마뉴엘라 드 랏셀은 패망한 랏셀 왕국의 왕녀.
그들은 제국에 끌려와 영지 없는 허울뿐인 공작가로 격하하였으며 왕족은 공녀 한 사람만이 남았다.
즉, 왕녀가 자손을 남기지 못할 경우 랏셀 가문은 이름뿐인 공작위도 잃는단 뜻이었다.
랏셀 공녀가 황태자와 예정대로 결혼한다면, 랏셀 가문은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게 수순.
그러나, 파혼으로 말미암아 해당 계획이 중지되었음에도 랏셀 가문은 여태 공작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