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실라스의 부름 (18/148)

18화 실라스의 부름

며칠 후, 그는 밖으로 나가기 싫다는 모리스를 기어이 연무장으로 끌어냈다. 나름대로 동생의 자존심을 위해 기사들은 싹 물려 둔 채였다.

“형님, 저는 됐습니다.”

“모리스.”

카셀이 오고 나서 그간 얌전하게 굴었던 모리스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 블루 로즈 기사단의 부단장이나 되는 형님이 어떻게 저를 직접 가르칩니까, 됐습니다.”

“…내가 널 두들겨 패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러나?”

모리스는 자기 앞에 던져지는 날 없는 검을 떨떠름한 얼굴로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알면서 왜 이러십니까, 저는 검에는 재능이 통 없습니다. 어떤 스승을 들이대 봐야 다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입니다.”

“모리스!”

기사는 검의 성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훌륭한 인격, 인내심, 기마술, 통찰력과 창술 등. 단지 검 하나에 익숙지 않는다고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카셀이 보기에 모리스는 자기 마음가짐 하나만 바꿔 먹으면 충분한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기사의 명예를 걸고.

모리스는 형이 던진 검을 차마 발로 차진 못했으나, 원래 성질대로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대신 속으로 늘 감춰 뒀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뱉고 말았다.

“뭐, 항상 그러지 않습니까. 나란 놈은 형보다 늘 키도 작고 체력도 부실하고 같은 나이가 되어도 성취가 항상 부족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기대요? 하, 그건 실종된 티아나에게 더 가 있을 겁니다.”

“모리스!!”

“하지만 소용없을 겁니다! 들어맞지도 않는 신탁을 계속 내놓는 성녀한테 그딴 거나 받아 오다니.”

“모리스, 진정해라.”

카셀이 설득하려 해도 음울한 눈동자에 들어차는 빛은 나태함을 넘어선 체념, 환멸뿐이었다.

“어차피 나란 놈은 때가 되면 여기서 쫓기듯 나갈 사람입니다, 형님. 그러니 그전까진 좀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모리스!”

“만에 하나 티아나가 돌아오면 결혼하는 모습까진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 후엔 내가 걸인이 되든 고주망태가 되든 내버려 두십시오. 멀리 가든지 해서 가문 이름에 구정물을 묻히진 않겠습니다.”

손을 휘적휘적 흔들고 돌아서서 가 버리는 모리스의 등을, 카셀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티아나의 결혼식을 보고 싶다는 말이 단순한 핑계로 들리진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진짜겠지.

모리스의 말마따나 허황된 신탁과 축복의 말을 줄곧 늘어놨던 카피아 성녀.

그 성녀를 부정적으로 말하면서도 티아나에 관련해서는 믿고 싶어 하는 동생의 마음이 측은했다.

‘모리스…. 네게도 티아나의 일은 상처였겠지. 미처 살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카셀이 여동생의 아픈 일을 잊어버리길 택한 것처럼, 모리스 역시 그 일을 가슴에 계속 품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현재 조사하는 일과 더불어 알아봐야 할 건이 두 가지나 더 생긴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남모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노랑 낙엽이 바닥에 촘촘하게 쌓이는 계절.

페이는 요즘 마법 실력의 정체를 느끼고 있었다.

‘음….’

운디네 퀸까지 부르게 된 시점이라 그런 말을 섣불리 하면 흘겨볼 마법사들이 많긴 하지만.

그녀 자신이 느끼는 한계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슬그머니 7서클 마스터로 승급한 루키우스 혼자였다. 이 일만큼은 홀트데인과 의논하기도 곤란했다.

“네 이름답게 물하고 얼음만 잘 다뤄서 그런 거야.”

“으응….”

페이가 너무 쉽게 수긍하자 루키우스의 표정에 한껏 짜증이 담겼다.

“너는 왜 이렇게 사람이 물러 터졌어? 물을 잘 다룬다고 성격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루키우스 님은 가만히 있다가도 꼭 필요한 말만 하시잖아요.”

마탑 측에서 처음에 했던 제안이 옳은 걸까?

워터 스페셜리스트.

일단 그 길을 걷게 되면, 두 번 다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페이의 마력 전체가 하나의 속성에 완벽히 동화되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을지….

‘홀트데인도 그렇고, 루키우스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이스 마스터가 되는 길은 확정이라고 했어. 내 노력의 여부에 달성 시기가 조율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민되네. 내겐 정말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자냐?”

루키우스의 빈정거림이, 페이에겐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처음부터 그랬다.

기사 리온 님과 기분 좋았던 첫 만남이 두 번째의 조우로 이어졌던 것처럼, 루키우스와의 만남도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 정해진 것만 같았다.

그는 늘 투덜대고, 페이는 웃으면서 받아 주는.

그렇다고 루키우스가 그녀를 매사 업신여기는 건 아니었다.

현재 마탑에서 루키우스는 페이에 한정하여 가장 좋은 상담자였다. 남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도 그는 먼저 알고 찌르듯 은근한 답을 내주었다.

“아니요.”

“뭐 어떡할 건지 생각은 해 봤어?”

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요. 제가 마법을 일찍 수련한 것도 아니고, 고작 두 계절 만에 운디네 퀸을 부르는 것도 엄청난 성과라고 하는데요. 거기에 대고 실력 느는 속도가 줄었다고 투덜대면 제가 노력을 덜 했다는 증명밖에 더 되겠어요?”

“줄줄이 옳은 말만 하네. 자기 객관화 하나는 참 성실해.”

그녀는 의자 뒤로 팔을 쭉 펼치며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제가 어디 가서 눈먼 드래곤 하트를 구해 올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는 일이죠.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던데 없는 방법을 찾느니 마법서 한 권을 더 보겠어요.”

“드…래곤 하트?”

페이는 생각이 나는 대로 말했다.

“네. 그거 원래는 검성들의 꿈이라면서요? 그런데 홀트데인의 말로, 드래곤 하트하고 궁합이 잘 맞는 마법사들이 좀 있대요.”

“…….”

“저도 그 안에 들어간다던데요? 마탑주 네이아 님도 그렇고요. 어디 땅에 똑 떨어진 드래곤 하트 없을까요?”

루키우스는 갑자기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페이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그럼 너 새로운 방면으로 시도해 볼 생각은 있어?”

“새로운 방면이요?”

마탑에선 정해진 마법 체계만을 두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가르치지 않았다.

새로운 마법을 개발하거나 마법을 보조할 학문 연구도 늘 진행 중이었다. 예를 들면 연금술이나 약초학, 그를 이용한 치료술 등이었다.

페이도 관련 학문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고는 있었다. 딱히 이거다 싶은 거나 뛰어난 재능 발견은 못 했지만.

“모모 있잖아.”

석쇠에 정성껏 구운 사슴 고기를 잘 먹고 자던 모모가 느닷없는 말에 악몽을 꾸는지, 몸을 바둥댔다.

“모모는 왜요?”

“넌 그냥 마법사가 아니야, 페이. 드라칸 라이더라고. 그러니까 그 강점을 살릴 도리를 해.”

“제가 어떻게….”

“당분간 마력 증폭 연습 좀 하고, 마법 운용은 운디네 퀸에게 일괄적으로 맡겨.”

“네?”

“그런 다음 모모를 타고 공격할 지점까지 무사히 날아가서 마법을 날리고 유유히 돌아오면 승리는 네 것 아니야?”

말은 간단했으나 가능하다면 엄청난 전략이었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완전히 집중하는 게 최우선이라, 그동안 이동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이동 수단을 쓴다면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그다지 선호되지 않았다. 정신 집중이 말이 집중이지, 주문을 외우는 동안 가만히 있어야 마법이 성공적으로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법은 운디네 퀸을 통해 쓰고 마력과 마나만 고스란히 제공한다면?

웬만한 정령사보다 페이의 마법이 더 파괴적일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같은 정령을 소환했다 할지라도, 정령사의 정령과 마법사가 불러낸 정령은 차이가 난다.

친화력을 기반으로 한 정령사와 철저한 마력의 논리는 다를 수밖에.

대가가 없는 친화력보다 지배력이 성향상 월등한 건 당연한 이치라, 루키우스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으음,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디 전쟁 나갈 사람 같지도 않고요.”

“나가든 안 나가든 뛰어난 실력을 갖춰 놓는 건 좋은 일이야. 뭐, 정 부담스러우면 모모만 써. 모모한테 목표까지 날아가라고 한 다음에 추락하듯이 내리꽂아서 땅을 불바다로 만들면 돼. 너는 너 하나만 보호 마법 쓰고. 쟤 비늘이랑 피부 꽤 튼튼하거든.”

모모는 자다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며 ‘엣취’ 하고 재채기까지 했다. 자기의 끔찍한 앞날을 예언하듯이.

그 모습에 페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으음, 또 조용한 곳으로 데려다주시면 모모를 타는 연습은 꾸준히 할게요. 그렇지만 진짜 드라칸 라이더가 된다고 해도 제가 그걸 바탕으로 싸울 일은 없지 않을까요?”

“무슨 근거로?”

“누가 저를 안다고 나서 달라고 하겠어요? 그냥 사람이 드라칸 한 마리만 탄 거잖아요.”

“모든 용사는 무명에서 시작해. 처음부터 이름을 날리면 그게 기사지 용사겠어?”

“제가 용사는 무슨요! 마탑에 안 왔으면 용사님들이 여행 중 먹을 브리오슈나 만들고 있지 않았을까요?”

페이는 그냥 웃고 말았다.

마탑에 들어오고 익숙해진 지금의 일상이 정말 소중했다. 딱히 바깥에 나가 뭔가를 거창하게 이루거나 사회에 섞이고픈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뭔가를 꼭 해내야만 하는 때라면, 그땐….

도트의 마수가 뻗쳐 올 시점이 아닐까?

그러나 사람과, 또 사회와 섞여야 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마탑에 은밀하고 중대한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마탑은 원래 의뢰를 상시로 받지도 않으며, 비밀이 보장된다는 암흑 길드에도 못 맡길 일이 정말 어쩌다 가끔 들어오기도 했다.

물론 웬만한 의뢰는 거의 다 쳐 내기 때문에 무척 드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의뢰인 쪽에서 꼭 일을 맡아 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페이였다.

“꺼림칙한데.”

“그러게요. 누가 저를 알고 지정 의뢰를 맡겼을까요?”

페이는 바짝 긴장했다.

클라인 공작저로 간 도트가 벌써 공작 내외를 구워삶아 무슨 수라도 쓴 게 아닐까?

그녀가 모르가나에서 이름을 페이로 바꾼 것쯤이야 알아내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도트에게 모르가나의 또 다른 이름, 모건 르 페이를 말해 준 적은 없으나 베릴 모녀는 뻔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페이의 생각으로는, 도트라면 이 시점에 소소한 마수를 뻗치고도 남을 사람이므로.

그런데 공작저로 보낸 운디네와 대화한 결과론, 좀 뜻밖의 결과가 날아왔다.

도트가 본채가 아닌 외딴 하우스 한 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게 아닌가?

마탑과 공작저의 거리가 상당하여 운디네는 거기에 딸린 연못에서 멀리 움직이기가 힘들다지만, 이걸 알아낸 것만도 꽤 큰 수확이었다.

‘에이나 역할 수행에 지장이 있다는 거겠지? 아마 약이 바짝 올랐을 거야. 당장 공녀로 인정받지도 못했는데 외딴곳에 유배된 처지니 어떻게든 활로를 찾으려 들 게 뻔해. 방심하지 말자.’

그녀는 거절하려 했으나 마탑의 고위 마법사인 벤이 설득하면서, 비밀 하나를 살짝 알려 주었다.

이 의뢰를 내건 쪽은 황실, 그리고 직계란다. 마탑주 네이아가 직접 확인하고 승인 문서까지 내려 준.

“…….”

황실 직계에서 나를 찾다니?

페이는 에이나일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