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또 다른 에이나 후보
‘그 일을 황태자 전하께 의논해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카셀, 너는 그레이스 수도원에는 오랜만이지?”
“예, 아버지.”
클라인 공작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 단 둘뿐인 공작가의 가주였다.
오를레앙 공작가는 공신 가문이고 클라인 공작가는 역사가 그보단 짧긴 하나, 나름대로 권위와 막대한 재력을 지녔다.
그리고 공작은 산더미 같은 재물을 제법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허허, 베릴 수녀원장은 조금 늙었을 뿐 여전하단다.”
“그랬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 내 앞에서 떨지도 않고 와 줘서 감사하다고 또박또박 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사람이 참 변치 않는 푸른 나무와도 같아!”
“…….”
카셀도 베릴 수녀원장을 만난 횟수는 단 두 번이나 그녀를 좋게 보고 있었다.
단, 도로테아를 에이나로 이쪽에 보낸 후엔 마음으로 무척 꺼렸지만. 아버지와의 여행길에 굳이 부정적인 말을 꺼내 초를 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전에 수도원에 들러서 도로테아를 데려갈 때, 약조했단다. 가을께에 와인을 모두 사 줄 것이니 준비해 놓으라고 말이다.”
“예.”
“수녀원장은 입에 발린 말을 잘 못 해, 허허. 남들 같으면 내 말을 듣고 다른 데서 값싼 와인을 몽땅 사다가 눈속임으로 팔 테지만 아마 안 그럴 거다. 나와 내기할 테냐?”
카셀은 시시한 내기 따위엔 관심 없었으나,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미약한 미소를 띠었다.
“알겠습니다. 만약 좋지 않은 와인이 한 병이라도 있다면 제가 무엇을 할까요?”
“모리스 녀석과 시원하게 대련 한 판 해 주렴. 그놈이 정신 번쩍 들게 말이다. 네가 이기면… 으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동생을 위한 대련쯤이야 내기가 아니라도 해 줄 수 있었다.
다만, 카셀과 모리스의 실력이란 하늘과 땅 차이라 하기에도 너무 민망한 수준. 그러기에 카셀은 목검을 들고라도 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즉 진짜 대련을 해 달라는 것보다, 모리스를 달래 반드시 기사로 서임되도록 깨우치란 이야기겠지.
카셀은 큰 생각 없이 말했다.
“일단 아껴 두겠습니다. 저야 뭐, 요즘 하루하루가 좋습니다.”
“나도 소피아도 그렇단다. 네 존재가 가까이에 있어 줘서 말이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겠지. 카셀은 그를 짐작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예.”
도착한 그레이스 수도원은 까마득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어릴 때 봤던 바로는 웅장하기 그지없었는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군.
여전히 이곳이 꺼림칙한 카셀은 클라인 공작과 베릴 수녀원장 및 헤센 수도원장을 보러 갔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잘 있었소이까. 약속대로 와인을 사러 왔으니 수레에 전부 싣도록 하시오, 값은 일괄로 치러 주리다.”
“감사합니다.”
헤센은 여전했는데, 베릴은 살짝 늙은 것 이외에도 얼굴에 왠지 모를 수심이 떠올라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넋이 나간 듯 기이한 모습이었다.
‘왜 저러지? 혹 아픈 곳이라도 있는가.’
카셀은 부정적인 생각을 떠올렸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클라인 공작이 헤센 수도원장과 잠시 대화하러 나간 틈을 타 그녀에게 접근했다. 파리한 얼굴에 애써 온화한 표정을 떠올린 베릴이 인사를 건넸다.
“소공작께서 훌륭하게 장성하여 험난한 로지아 국경지대까지 가셨다죠? 블루 로즈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역임하시고요.”
“그렇소.”
“대단하십니다. 앞으로도 클라인 공작가에 무궁한 영광이 깃들기를 늘 기도하겠습니다.”
사교계의 인사치레처럼 매끈한 말투에, 카셀은 다시금 위화감을 느꼈다.
도로테아의 삐걱거림을 두고 이쪽에서 먼저 추궁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왜 베릴 수녀원장은 자기가 골라서 보낸 에이나 후보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단 말인가?
마치 이곳에 없던 사람처럼 무시하고, 사 년 전에 떠난 카셀의 안부를 먼저 꺼내는 이유가 뭐지?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기서 도로테아란 여아를 골라 에이나 후보로 보내셨더군요.”
“…오, 소공작님. 실은 제 판단으로는 모르가나라는 아이를 보내려 했답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성년에 근접했고, 늘 얌전하고 성실했죠. 그런데 공작께선 도로테아…를, 선택하셨습니다.”
카셀은 눈썹을 찌푸렸다.
“원장께서 골라 둔 에이나 후보가 다른 사람이었단 말입니까?”
“선택이야 공작 각하의 재량에 달린 일이니 저희가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긴 어렵지요. 당시 상황은 그러했습니다. 도로테아도 잘 지내고 있겠지요?”
그녀에 대해 말하기 싫었던 카셀은 아까 나왔던 다른 여성의 이름을 물었다.
“또 다른 에이나 후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수녀원장께서 직접 낙점할 정도라면 재원임이 틀림없을 터인데 궁금하군요.”
“돌아온 후에 자기 할 일을 찾아 수도원을 나갔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나이가 성년에 근접했으니까요. 저와 같은 늙은이가 앞길 창창한 아이의 선택을 막을 순 없었지요.”
베릴로선 모르가나의 이야기는 짧게 줄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마탑으로 갔다고 말했다가, 혹 싫어하는 눈치를 보일까 우려가 되어서였다.
제도의 귀족들은 마법의 기질을 타고난 가문이 아닌 이상, 마법사를 우대하면서도 은근히 두려워했다.
클라인 공작가에서 마법사가 태어난 역사는 거의 없으므로 베릴 수녀원장의 넘겨짚기는 실상 잘못되지 않았다.
또,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수녀원장으로선 목이 멨다.
클라인 공작은 계절이 바뀌자 약속대로 찾아와서 와인을 수매해 주었다.
그때 생각한 것처럼 마탑으로 간 모르가나에게 벨벳 머플러와 장갑을 전해 줄 기회가 있을는지.
마탑은,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의 방문을 웬만해선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나 주신전에 딸린 경건한 수도원의 방문객이 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뭣보다 모르가나가 베릴의 관심을 기꺼워할지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는 잘해 줘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떠나 버린 가엾은 아이.
나의 비겁한 침묵을 알게 되면 후에라도 원망하지 않을까?
‘모르가나야….’
선물만 꾸려서 보내면 마지못해 받아 주겠지, 가엾고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
“그렇습니까.”
카셀로선 나갔다는데 어디로 갔냐면서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말을 마쳤다. 그는 나오면서 막연하게 생각했다.
‘모르가나라.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어쩐지 슬프게 들리는군.’
그 이름을 그림으로 형상화하자면, 뿌연 물안개가 깔린 호숫가에 나룻배를 대어 놓고 물을 손으로 휘젓는 가녀린 여인과도 같을 것이다.
물가에서 이리 오라고 소리쳐 부르면 안개 속으로 휙 사라져 버리겠지. 아련한 전설 속에나 있을 희귀한 이름이야.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부디 행복하길.
마음이 꽤 가라앉은 카셀은 클라인 공작이 아직도 헤센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간만에 정치를 떠난 외출을 하셨으니, 시간을 좀 더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이 목가적인 수도원을 향한 베풂이 공작에게 위안을 준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리저리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사람들이 보였다.
‘흐음.’
지하 저장고에서 조심조심 옮겨지는 와인통과 병 뒤편에서 수녀와 원생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는 괜히 일을 방해할까 싶어 더 다가가지 않았으나, 귀가 밝은 편이라 속닥이는 말이 일부 들려왔다.
“이거, 다 클라인 공작저로 가는 거야?”
“어.”
“도트는 안 왔대?”
‘도트?’
처음 듣는 낯선 이름. 그러나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일지 카셀은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런가 봐. 하…. 도트 진짜 부럽다. 나도 클라인 공작가의 에이나가 되면 잘할 자신 있는데.”
“맞아. 그분이 공작님일지 알았으면 나도 도트리샤처럼 주변을 맴돌면서 말 좀 붙여 볼걸. 걔가 방문 손님을 너무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후회된다.”
“그러게, 나도 인사라도 한번 드려 볼걸 그랬어.”
“대체 도트는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알아챈 거야?”
“우리 고모님이 제도에 사시는데 도트리샤가 공작가의 마차를 같이 탔대! 도로테아란 이름으로 귀족들의 살롱에 나갔다던데?”
“부럽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도트리샤?
‘그게 도로테아의 원래 이름인가.’
도로테아란 이름은 여자의 것으로 퍽 흔하나, 도트리샤… 그 이름은, 완전히 처음 들어 본다. 적어도 제도와 로지아 영지 내에서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수도원에서 붙여 줬을 이름 같진 않다. 왠지 모르게 희귀하니 좀 더 알아봐야겠군. 모르가나란 이름도…. 일반적이지 않아. 둘 다 조사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눈을 가늘게 뜬 카셀은 공작에겐 그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고, 그날은 아들답게 끝까지 효도를 다 했다.
공작의 말대로 수도원의 와인은 한 병도 빠짐없이 완벽했다. 그의 기분 좋은 패배였다.
베릴 수녀원장에 대한 오해도 풀어서 다행이었다.
모든 게 다 온당하다.
단 하나, 공작저에 옳지 못한 욕심을 품고 있는 그 아이만 제외하면.
‘셀피아 하우스에 있다고 했나?’
카셀의 발걸음은 외진 그곳으로 향했다.
마침 수업 중인지, 도로테아와 포셰트 학자가 문답을 나누는 말소리가 창문 바깥까지 넘어왔다.
“그리하여, 아칸 제국의 초창기에 상업이 빠르게 발달하기는 힘들었고….”
“원인!”
“…그게. 어… 그러니까, 도로의 정비가 느려….”
“제도로 통하는 도로와 하수구의 복구는 어렵지 않았다! 이런, 책을 다시 봐야겠구나.”
대충 들어도 그다지 신통치 않은 수업 내용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될 정도였다.
‘음?’
미약하나 수상한 기척, 아니, 느낌.
카셀은 그의 감각을 어지럽힌 쪽으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운디네 아닌가?’
셀피아 하우스의 정원에 딸린 작은 연못 근처.
물 위로 떠오른 채,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고 낑낑대는 운디네 한 마리가 있었다.
정령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은 드물다.
뭣보다, 이곳은 클라인 공작저.
수상쩍은 존재가 머무르게 둘 수는 없지, 싶어서 칼을 뽑으려고 든 순간 운디네의 조그마한 몸이 축 처져 물에 뜬 연잎 위로 폭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여기에 머무르기에는 힘이 통 없는 눈치였다.
때마침 셀피아 하우스 내에서 문답을 나누던 말소리도 뚝 끊겼다.
포셰트 학자가 도로테아에게 책 읽기를 다시 시켰으리라.
“…….”
그는 운디네와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기운이 없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여기로 온 목적이 저 도로테아의 감시인 건가?
목적이 오로지 전자라면 당연히 쫓아내야겠으나 혹시 후자에 속한다면.
‘…흠.’
어차피 하급 정령인 이상 본채로는 못 들어올 것이다.
창문으로 바짝 다가가지 못하고, 연못에만 머무르는 운디네의 모습을 안쓰러워할 카셀도 아니지만.
‘잠시 그냥 둘까.’
그는 왜 자신이 이런 변덕을 부렸는지 이해할 틈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부디 저 운디네를 데려와 도로테아의 주변에 붙여 둔 이가 훗날 뭐라도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