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루키우스의 음모
피로한 상태여도, 운디네 하나쯤은 소환이 가능하다. 아니, 소환을 넘어 공작저에 도사리고 있을 도트의 주변에 맴돌게 할 수 있지.
‘영원히는 힘들고, 짧으면 하루에서 길어 봤자 한 달? 그 이상은… 내 능력으로 무리일 거야.’
에이나 때 얼핏 들은 적이 있다.
클라인 공작저 내부에서도 특히 본채에는 부정적인 마법과 정령의 침입을 막는 결계가 걸려 있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도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건 안 될 거지만, 뭐라도 해야 해. 작은 단서 하나라도 줍게 보내 보자.
본채의 결계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맴돌게 하면 될 거야.
운 없으면 하, 하루 만에 쫓겨나거나 소환이 해제되겠지?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어렴풋이 가늠하고 있었다.
친화력을 기반으로 한 정령사가 자기 정령을 남에게 오래도록 보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물의 마법에 있어 독보적인 능력을 보이는 페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순수한 마력으로 운디네를 유지해야 하기에 부담이 없진 않지만.
“…좋아. 운디네 소환!”
그녀의 손 안에서 날개 달린 조그마한 운디네가 소환되었다.
정신감응으로 ‘클라인 공작저에 있는, 도로테아란 이름을 가진 에이나’에게 가란 명령을 내린 페이는 일시에 긴장이 탁 풀렸다.
“으….”
운디네가 창문을 넘어 공작저로 날아가는 뒷모습을 지켜볼 기력도 없다.
비틀비틀 침대로 걸어간 그녀는 곧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페이는 잠을 자고 일어나서 코트만 대충 걸치고, 루키우스의 성화에 엉겁결에 발을 디뎠다.
어제 운디네를 소환해 공작저로 보낸 터라 피로해서 좀 더 자고 싶기도 한데.
거기에 뭐가 있고, 혹시 도트를 보았는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그리고 텔레포트가 냉큼 시전되어 공간 이동을 하고 말았다. 공기가 확 달라진 느낌에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여긴…!”
“이쯤이면 괜찮지?”
잠이 확 달아난 찰나, 루키우스는 퍽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꽤 널찍한 고원 너머로 희미한 산맥의 향연이 즐비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긴 대체 어디고요?”
“이름은 모르고 내가 옛날에 대충 알던 지형이야. 산 위잖아. 흠, 여기서 해 보자고. 모모! 원래대로 돌아가라.”
오랜 세월의 흐름 탓인지, 지형의 침식이 조금은 일어나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옛날의 기억을 되살릴 만했다. 루키우스의 눈으로 보자면 그러했다.
이곳은 옛날, 샤르프 제국 상 시대에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키려고 온 힘을 다해 도주했던 바로 그 고원이었다.
‘그때 놈들을 초반에 도와주고 죽어라고 싸우는 장면을 구경하는 게 재밌었는데.’
루키우스는 고룡임에도 다른 드래곤과는 달리 인간의 삶에 관심이 꽤 있었던 특이한 종자였다.
그래서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지금 하는지도 몰랐다.
페이의 곁에 머무르는 바로 이거. 이놈의 망할 호기심.
“가아아아!”
“타야 되니까 얼른 고개나 숙여. 네가 드래곤이냐?”
오랜만에 드라칸의 본체로 돌아간 모모가 우렁찬 고함을 내지르자 루키우스가 곧바로 경고를 주었다.
어쩐지 모모가 깨갱, 하면서 머리를 수그리는 것 같아 페이는 웃었다.
“후후.”
그 포악하게 생긴 모이테트라 바누스의 본체가, 루키우스 앞에선 한낱 뾰족하게 생긴 강아지 같아 보인다니.
설마, 루키우스는 진짜 드래곤인 걸까?
아니야. 엘프 마법사님이 맞을 거야.
“웃어?”
그가 살벌한 표정을 지어도 페이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루키우스 님, 정말 재밌는 마법사님이세요. 그런 말 어디서 안 들어 봤어요?”
“그럴 리가? 나를 눈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웃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페이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돼요. 홀트데인도 루키우스 님을 굉장히 좋아하던 걸요?”
“사내놈의 관심은 필요 없다. 웬만한 여자도 마찬가지야! 인간들은 왜 이렇게 눈치도 없고 무모해?”
겁도 없이 그의 신부라고 칭하는 고대적 인간 여자들을 볼 때마다 기가 찼다. 그 멀고 먼 옛날의 기억이, 천진난만한 페이를 보고 있으니 돌아오려 했다.
“루키우스 님이 오래도록 혼자 산 게 아니라면 다들 똑같이 생각할 것 같아요. 그것도 아니라면 뭐… 너무 무섭게 구는 바람에 루키우스 님 앞에서 아무도 말을 안 한 거 아닐까요?”
“…둘 다 맞긴 하네.”
그는 유희를 하며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찮은 감정 따위에 휘둘리다니, 그러면 드래곤이 아니지, 암. 그건 루키우스에겐 은근한 자존심이요, 훈장이었다.
“네?”
“됐고, 어서 타자.”
루키우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얌전히 땅 위에 내려앉은 모모의 등 위에 마법으로 된 안장이 형성되어, 쇠사슬 소리와 함께 철컹하고 얹혔다.
“와, 정말 대단해요! 저는 세심한 마법은 아무래도 무린데 이런 것도 하시네요.”
“알면…!”
그는 울컥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알면 뭐 어쩌라고? 알아서 날 모셔? 아니면, 네가 날 죽인 과거를 온 힘을 다해 떠올려 봐라. 너는 그 뒤에 뭐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봐?
‘젠장.’
시간 회귀 마법밖에 방도가 없었다곤 하지만, 막상 성공하고 나니 지나간 일을 따져 묻기도 곤란했다.
뭣보다 ‘모르가나’는 자신이 누구 후손인지 틀림없이 몰랐을, 무의식 상태이지 않았는가.
클라인 공작저를 습격할 당시 그가 오래 본 건 아니라지만, 모르가나에게 거만한 귀족의 낌새는 안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페이 앞에서 그의 자존심이란 조각조각 부서져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도 이 여자 앞에서 절대 본체로 돌아가지 말아야지, 라고 세뇌적인 다짐을 하고 다니지 않는가, 망할.
“됐어, 얼른 타기나 해.”
그는 공연히 호통을 쳤다.
“루키우스 님도 같이 타 주는 건가요?”
“흥. 너 고꾸라지는 꼴은 보기 싫다.”
루키우스는 투덜대며 페이의 손을 잡고 안장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 드라칸이 그들 외 어떤 인간도 없는 창공을 마음껏 누볐다.
페이는 드라칸의 발이 땅에서 뜨자마자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와아!”
“윈디 실드! 너, 네가 인간 마법사란 자각은 있는 거냐?”
여긴 고원. 안 그래도 산소가 희박한 지역인데 페이가 대기 마법을 제 주변에 두를 생각도 하지 않자 루키우스는 후다닥 마법을 쓰고 소리를 빽 질렀다.
드래곤인 그야 인간화한 상태여도 당연히 괜찮지만 얘는 아니지 않은가?
뒤늦게, 페이의 특기가 물 마법이란 걸 떠올렸지만 그게 중요한가? 제 몸이 가만히 있다가 호흡이 모자라 앞으로 고꾸라질 위기인데 그것도 모르고 신기해하기만 하다니!
‘얘는 혼자 못 두겠어. 천방지축 인간이라 자기 혼자 쏘다니다가 죽기 딱 좋으니까. 그… 그래. 그런 거다! 오래전에 꺾였던 내 자존심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세세한 관찰이 필요한 것뿐이야!’
드래곤의 신분으로 일개 인간, 그것도 회귀 전 자길 쓰러트렸던 인간과 같이 다니는 일의 변명이 막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페이는 그것도 모르는 채 탁 트인 절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것 봐요, 루키우스 님! 엄청나게 뾰족한 산들이 있어요. 산봉우리에서 김도 나오고 있는데 혹시 화산인가요?”
“야, 모모! 방향 제대로 안 맞춰?! 나보고 화산재로 목욕하라는 심보냐? 내 옷깃에 먼지 한 톨이라도 묻는 순간 알아서 해라.”
루키우스의 구박에 모모는 다른 곳으로 홱 날아가며 눈물을 흘렸다.
인간 가운데도 꽤 순하고 상냥한 여마법사와 단둘이 지냈던, 평화로운 한때를 추억하며….
방향을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포악하고 까다로운 드래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저긴 산양 떼가 있어서 냄새나니까 다른 데로 가란 말이다! 이 멍청한 도롱뇽아! 어떻게 된 게 너는 학습 능력이 없어? 머리통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억울한 드라칸의 눈에서 굵직하고 뜨끈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가 누구더러 종족 지적인지…. 나름대로 비슷(?)한 외향이니까 좀 더 잘해 주진 못할망정.
페이와 드라칸 비행을 즐기고 마탑으로 돌아온 그날, 루키우스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페이를 잘 키워서 9서클 마법사로 만들자. 그리고 나도 인간 모습으로 대등하게 싸우는 거야. 하…. 그래서 처절한 패배를 맛보게 해 줘야지. 제까짓 게 백날 노력해 봤자 내 아래라는 걸 깨달아야 해…! 흠, 그래. 그거라고!’
정작 페이를 패배시킨 이후엔 뭘 어떻게 할지 아무것도 안 정한 루키우스는 무척 뿌듯하게 잠을 청했다.
뭐…. 슬슬 상황 봐서, 페이에게 고대 드래곤 일람 같은 고서적을 보라고 눈치 좀 주면 되지 않을까. 그럼 이 위대한 나의 존재에 대해 눈치챌 거 아니냐고. 내가 무서워서 벌벌 떨겠지?
“후후후후.”
달콤한 상상을 하며 잠이 드는 그의 입가가 기분 좋아져 씰룩였다.
* * *
제도를 한동안 들썩이게 했던 과일 축제가 끝이 났다.
축제를 즐긴 것보다도, 클라인 공작 부인이 무성하던 뜬소문을 자기 입으로 확정했기에 사교계는 난데없는 후폭풍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어릴 때 실종되었다는 클라인 공녀의 귀환 임박 소식에, 향후 몇 년간 신나게 물고 씹고 뜯을 거리인 공녀의 에이나 후보까지.
생김새도 모르는 공녀보다, 앞으로 공녀가 무사히 약혼과 결혼을 마칠 때까지 돌볼 에이나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하게 떠돌았다.
도로테아란 이름의 그녀는 평민이기에 말에 살을 붙이고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너무 쉬웠다.
어린 영애들과 귀부인들 사이에선 요즘 ‘공작가의 에이나’가 최고의 화젯거리였으나, 폭풍의 눈이란 말 그대로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지역도 있었다.
다름 아닌 클라인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오늘은 그레이스 수도원에 다녀와야겠구나.”
“호위하겠습니다.”
“네가?”
“예. 간만에 아들 노릇 좀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나야 사양할 생각 없다. 어서 출발하자꾸나.”
공작은 깍듯하게 구는 큰아들을 기특한 눈으로 보았다.
카셀이 돌아오고 나서, 차남인 모리스도 정신을 조금 차리고 다시 수련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여러모로 그의 맏아들은 복덩이, 대들보, 마음의 지주, 그 이상이다.
그간 드문드문 만난 황태자 실라스는 카셀에 대해 특별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카셀이 제도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는 잘 모르나 이대로 있다가 은근슬쩍 약혼이나 결혼을 시키면 더는 국경지대로 되돌려 보내지 않겠지. 그게 공작, 그리고 공작 부인의 간절한 희망 사항이었다.
내년 봄쯤에 슬슬 간을 보면 좋으려나.
‘애초에 블루 로즈 기사단도 황실 기사단의 한 갈래였지 않은가. 제도로 재편성을 받든, 아니면 가문으로 들어와서 슬슬 인계 작업을 하든 카셀에게 내 자리를 넘겨줘야 타향살이가 끝날 게야. 우리 티아나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내가 앉아 있고 일이 잘 해결되면 물러나야지.’
카셀이 수도원행을 택한 공작을 따라나선 건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제도를 비운 사 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간 정보의 공백을 메우느라 너무 바빴기에, 도로테아가 왔다던 그레이스 수도원까지 미처 손을 뻗을 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