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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드라칸의 주인 (13/148)

13화 드라칸의 주인

“모모라고 했잖아. 왜 귀찮게 이름을 다 불러 줘? 드라칸들은 욕망이 강해서 잘해 주면 한없이 기어오른단 말이야.”

“모… 목소리 낮춰 주세요. 네? 그리고 인간이 드라칸을 부리는 게 쉽지도 않다면서요.”

마탑 안에서 뭘 기르고 연구하든 괜찮았다. 거긴 마탑 전체에 강대한 마법이 걸린 터라 웬만한 폭발이 터져도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득시글한 이런 곳에, 드라칸을 덜컥 반입했다가 본체로 돌아가면 사람들이 놀라 기절할 것이다. 경비병들도 마구 쫓아오고.

그중에 리온 기사님도 있는 건 역시 싫어! 나한테 실망하시면 어쩌라고!

루키우스는 얼굴색이 마구 바뀌는 페이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빈 꼬치를 흔들다가 땅에 푹 꽂았다.

“이 녀석 마탑에 있었다며?”

“네, 네. 사육실에서 먹이를 받아먹었다고 해요.”

“까짓것 그럼 먹은 값은 해야지. 너 사는 동안 모모 마음껏 한번 부려 봐라.”

“저….”

“왜?”

페이에게 사육실로 가라고 안배를 한 사람은 마탑주 바로아 님.

그리고, 눈앞에 있는 루키우스란 남자는 아무리 봐도 그녀가 상상한 바로아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뭣보다 십수 년 이상 흘러간 세월을 생각하면 이런 소년의 모습일 리가 없는 것이다. 마법사들이 유독 덜 늙는다고는 하지만 이름이 루키우스라고 했지 바로아라고는 안 했으니까.

‘에잇, 됐어. 바로아 님이었으면 나한테 장난은 안 쳤을 거야. 어디선가 잘 보고 계셨겠지.’

페이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럼, 루키우스 님이 이 드라칸을 잡아서 길들인 건가요?”

“어.”

“언제요? 어디서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혹시 이 루키우스라는 분, 종족이 엘프일까.

엘프가 마법을 연마하는 경우 평균적으로 인간보다 실력도 성취도 월등했다.

그들은 변신 마법도 무척 잘 쓰는데, 인간 모습으로 화한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엘프가 아닐 수도 있는데.

다르게 생각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모이는 이런 곳에서야 인간 모습으로 바뀌는 게 움직이기 편할 테니까 가능성이 또 없진 않고….

페이는 말문이 터진 김에 연이어 물었다.

“그럼, 저한테 모…모 타는 법을 가르쳐 주실 건가요?”

“음?”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요.”

“꼬치 하나 더 주면.”

페이가 봉투에서 소고기 꼬치 하나를 꺼내 건네자 드라칸, 모모의 눈이 흔들렸다.

혼자서 세 개는 다 먹을 수 있는데 뜬금없이 옛 주인이 나타나서 죄다 강탈당할 위기라니. 그의 옛 주인도 무섭긴 한데 맛있는 걸 못 먹고 허무하게 뺏기는 것도 싫었다.

“삐이….”

“조용히 안 해?”

“너도 먹어, 자.”

아직 따뜻한 소고기 꼬치를 모모 앞에 먹기 좋게 대어 주자, 루키우스가 먹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너 말이야, 마음 여리게 굴면 당한다. 얘가 지금까지 조용히 지냈어도 언제까지 그러진 않아. 상대가 순해 보이면 마음먹고 뒤통수치는 거, 세상 이치인데 몰라?”

“…알아요.”

페이의 말은 짧았으나 온갖 경험의 씁쓸함을 내포했다.

당해 봤으니까 알지.

만약 도트를 죽여야 할 순간이 온다면 죽일 것이다, 반드시.

“…….”

페이는 신경이 온통 루키우스에게 쏠려서 미처 보지 못했지만.

루키우스가 다 먹고 땅에 꽂은 나무 꼬치에서 그녀의 눈빛을 닮은 연둣빛 새싹이 조심스럽게 돋아났다.

이윽고 둘이 자리를 비우자 그것은 작은 묘목처럼 자라났다.

그가 범상치 않은 존재란 뜻이었다.

그날, 루키우스와 짤막한 이야기를 나눈 페이는 둘이서 마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말을 들어 보니 루키우스도 정확한 서클은 말해 주지 않지만, 마법을 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축제 때문에 방이 다 차서 루키우스가 따로 잘 숙소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어떡하죠?”

“어쩌기는? 너 원래 자던 데서 자. 내일 아침에 여기 1층에서 보자.”

“앗!”

“잘 자라. 이놈은 교육할 게 있으니 하룻밤 실례하지.”

루키우스는 모모의 날개 한쪽을 냉큼 들더니 손을 흔들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모모가 끽소리도 못하고 붙들려 가는 걸 보면 진짜 주인이 맞나 보다.

그나저나 안 쫓아가 봐도 되려나? 제도에서 노숙하면 경비병들이 와서 잡아간다던데.

페이는 불안한 눈으로 텅 빈 골목 너머를 보다가 할 수 없이 홀로 잠을 청했다. 마음은 불편하게, 몸은 꽤 편하게.

“…….”

한편, 그녀가 잠든 시각 루키우스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을 하고 벽에 기대 있었다. 모모는 동공을 굴리지도 못하고 차렷 자세로 그의 어깨에 붙었다.

‘드디어 만났군.’

인간의 시각으로 최대한 안전한 만남을 만들기 위해 그는 나름대로 노력했다. 페이의 행태를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루키우스는, 고대에 태어난 드래곤 중 최후의 생존자였다.

교활하고 배신을 잘하는 드라칸을 굴복시켜 부하로 만든 것도, 그가 세상에 유일무이한 고대 드래곤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안 그랬으면 모모는 진작 페이의 품을 벗어나서 제도 일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틀림없어. 저 여자아이는 그 녀석의 후손이다.’

루키우스는 지금은 몰락한, 고대 샤르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론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봉인되고 말았다.

거의 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고 오늘 만난 페이를 두 눈으로 보게 된 후 비로소 깨달았다.

가까이서 보기 전엔 막연히 짐작만 했으나, 페이는 카론의 후손에서 핏줄을 이어 온 존재가 확실하다.

‘…자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는 건가? 이름은 모르가나에서 페이로 왜 바꿨지? 설마 모건 르 페이? 둘 다 물과 연관된 이름이긴 한데.’

오래된 봉인이 깨진 후, 루키우스는 지독한 원한에 이끌려 클라인 공작저 근처에 나타났다. 그들이 카론의 피를 가장 강하게 이은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우습게도 클라인 공작가의 수많은 기사들은 그의 본체에 흠집 하나 남기지 못했다. 카론의 명성은 자손만 남겼을 뿐, 땅에 떨어지다 못해 스러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루키우스 그도 생각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모르가나의 존재였다.

고대 마법은커녕 자기 몸 하나 지킬 힘도 없는 그 소녀가, 자기 피에 잠든 어마어마한 힘으로 루키우스와 대치했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그로 인해 큰 내상을 입은 루키우스는 쓰러져 죽어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맞을 찰나였다.

남은 탈출구는 단 하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불쾌하군.’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썼고, 그 대가로 불멸자에서 필멸자로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최후의 보루인 드래곤 하트는 무사했으나, 육신에 천부적으로 감도는 마력은 상당 이상 줄었다.

그나마 마법을 쓴 당사자라 기억이 온전하게 남고 봉인도 풀린 상태로 다닐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전에는 죽여도 죽일 수 없는 존재라 카론과의 패배로 힘이 다하여 봉인되었다지만.

그의 목숨은 단 하나만 남았으니 이젠 정말 주의해야 한다.

까딱 잘못하면 애먼 인간에게 드래곤 슬레이어란 칭호를 떡하니 주고 또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닌가?

죽는 거야 두렵지 않다지만 루키우스란 이름 위에 그런 비웃음을 두 번씩이나 덮어 둘 순 없었다. 절대로!

어쨌든 저 페이, 모르가나가 과거와 다른 선택을 내렸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때의 소녀는 단 하나의 마법도 쓰지 못했거늘.

‘…뭐, 과거와는 상황이 좀 달라지긴 했는가. 전생엔 마법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피에 잠든 힘만으로도 날 완벽하게 쓰러트렸지. 그러니 이번 생엔 세상을 뒤흔드는 마법사가 되어야 마땅해. 어디 나 말고 다른 놈에게 당하기만 해 봐라.’

루키우스는 입술 끝을 비틀고는, 모모를 데리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꿍꿍이는 드래곤답게 깊고 은밀했다.

* * *

이튿날, 파란 나비 여관.

“루키우스 님!”

“어.”

루키우스는 페이의 부름에 덤덤한 표정이었으나 속내는 영 좋지 못했다.

옛날엔…! 그의 무시무시한 이름을 온 대륙이 알 적엔 루키우스의 ‘루’ 자만 나와도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나 때는 말이지…! 그중 겁 없는 인간 여자들은 자기 이름을 루키아, 혹은 루키아나로 개명해서 드래곤의 신부라며 날을 맞춰 제사까지 올리고 그랬는데.

이젠 그를 한번 ‘죽였던’ 인간 여마법사한테 감기 걱정이나 받아야 하는 신세라니!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잘 잤어요? 감기는 안 걸렸고요?”

“난 튼튼해.”

억울하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녀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 궁금하기에 좀 지켜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자신이 페이 앞에서 본체로 돌아가지 않으면 괜찮다. 그러면 페이의 핏속에 흐르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힘이 요동치지 않을 테니까 다시 겨룰 확률도 없다.

‘아마도 그러겠지.’

지금까지 괜찮은 걸 보면 그럴 거다.

“마탑에 가서 서클 측정하고, 같이 마법 공부해요. 마법 공부는 정말 재밌어요!”

페이는 무척 순진한 소리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

“…하, 그래.”

루키우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 고룡 루키우스는 당연하게도 본체든 인간화든 10서클의 마법 모두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던 몸이었다.

물론 불멸자 시절의 이야기고, 모르가나와의 대치 후 힘을 상당히 잃었기에 지금은 어떨지 몰랐다.

본체로 돌아가면 10서클 마법을 쓸 수야 있겠지만 페이와 같이 있는 한은….

‘에잇, 몰라.’

그는 찜찜함을 덮어 두고 모르가나, 페이와 함께 마탑으로 가는 뚜껑 없는 마차에 올랐다.

“이 시간에 마차가 예약되어서 천만다행이에요. 축제 기간이라 다 안 된다고 하면 곤란했는데.”

“흥.”

심사가 꼬인 루키우스가 단답형이라 그런지, 대화는 잠시 끊겼다.

“어? 잠깐만요. 마부 아저씨, 저기로 좀 가 주세요.”

“뭐?”

심란한 생각을 하던 루키우스를 무시한 채 페이는 좀 먼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눈엔, 다른 쪽에서 제도로 오는 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보였다. 과연 페이의 느낌대로 마차 한 대가 살짝 기울어진 채 길가에 멈춰 서 있지 않은가?

마부는 손님이 원하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난색을 보였다.

“아이고, 아가씨. 아무래도 저기 길은 옆이 진창이 되어서 바퀴가 빠진 모양인데요?”

마부는 혀를 쯧쯧거렸다.

“빠져나올 수는 없나요?”

“크기는 좀 작아도 귀족 가문의 마차 같은데, 꽤 깊이 빠진 모양입니다.”

귀족의 마차라면 일이 생겨도 곧 해결하지 않을까?

페이의 눈동자는 곧 무심해질 뻔했으나, 그쪽의 말이 괴롭게 히힝대는 소리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저것…. 아저씨, 저는 여기에 내려 주시고 목적지까지 가 주세요.”

“또 왜.”

루키우스는 고작 하루 봐 놓고서 원래 알았던 사람처럼 퉁명스레 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이의 눈은, 방금 발견한 마차의 표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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