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루키우스
페이가 상대라서, 추운 국경지대에서도 고장이 나지 않은 이 비싸고 귀한 회중시계를 건네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두고 무슨 마음이라 칭하지?
모르겠다, 하지만 애틋해. 무엇이든 페이 양에겐 챙겨 주고 싶다. 그게 카셀의 본심이었다.
“…….”
“페이 양?”
“이건, 괜찮아요. 그냥 마음만 받을게요. 다음부터는 약속을 해 둔 상태에서 정신을 팔고 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거절을 말하는 입술도 밉지 않았다.
카셀은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던 그의 첫 마음을 담백하게 접어 뒀다.
“알겠습니다. 공연히 부담을 주어 미안합니다. 그럼, 갈까요?”
“네!”
얼음 저장소 바깥으로 나온 페이는 깜짝 놀랐다.
시간이 꽤 흐른 거야 기사님의 말을 들어 알았지만, 사람이 바깥에 이토록 많이 나다닐 줄은 몰랐다.
“우와…!”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기… 여길 잡아요.”
카셀은 페이의 조그마한 손을 잡아 자기 팔목을 잡게 했다. 이 작디작은 손이 축제 때 쓸 얼음을 몽땅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얼음 마법을 특별히 잘 쓰는 모양인데 추천장 한 장만 쓰면 황궁 마법사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마탑에 가고 고작 한 달 된 페이 양이 황궁에 불려 가면 더욱 혹사당할 거다. 나중에 전하께 보고를 올릴 때도 지나친 관심이 쏠리지 않게 유념해 둬야겠어.’
그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생애 최초로 황실의 입장보다 사적인 관계의 누군가를 더 중시했다.
“으으, 네. 사람들 진짜 많네요.”
“…내 이름, 리온입니다.”
카셀은 망설이다가 중간 이름의 끝을 떼서 알려 주었다.
“네! 리온 기사님!”
“그냥 리온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 무뚝뚝한 카셀이 한 명의 소녀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공작저의 가족들은 물론 그를 잘 아는 황태자까지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릴 것이다. 너도 이럴 줄 아냐면서.
사실 그도 자신의 이런 행태가 좀 낯설었다.
다소 뻔뻔하게 군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휘적휘적 걷다가 부쩍 많아진 인파 때문에 페이를 잃기라도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우습군.’
그는 방금 자기가 해낸 생각이 어처구니없다고 여겼다.
페이는 마탑의 마법사 아닌가? 설령 길을 잃는대도 알아서 파란 나비 여관으로 돌아갈 거고, 혹은 마탑으로 아예 귀환해도 무방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러한데….
아무튼, 페이를 놓치면 그는 평생토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녀를 있는 힘껏 보호하고 싶었다.
“와, 저쪽으로 가 봐요!”
“좋습니다.”
그는 페이가 가리킨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페이는 기사 리온과 꽤 오래 축제를 즐겼다.
과일 축제는 무척 성대했다.
사과나 딸기를 꿰어 달콤하게 굳힌 과자가 너무 맛있어서 세 개나 먹었다.
원래 리온과 하나씩 샀는데, 그는 페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자기 것을 한 입도 안 먹고 준 다음, 다시 사 주기까지 했다.
또 여름에 가득히 피는 꽃으로 장식한 그네도 타 보고, 꽃을 띄워 만든 인공 개울 놀이터에 발도 담가 봤다.
‘제도 사람들은 이러고 놀았구나.’
뭐 축제니까 매일 이토록 성대하게 놀진 않겠지만, 페이는 그간 전혀 몰랐던 행복을 하나씩 되찾아 가는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셰릴 사제님과 먹은 달콤한 청포도 한 송이.
베릴 수녀원장님의 품에 와락 안겨 마음껏 울었던 기억.
그리고… 기사 리온 님과의 소중한 만남.
사소하지만 이 모든 순간을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언젠가 시간이 흘러 리온 님이 나를 까맣게 잊는 순간이 오더라도.
기사 리온 님은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페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둘은 제도 안에 있으니까, 언제라도 또 우연히 만나게 될 것만 같았다.
“꼭 다시 보지요, 페이 양.”
“네.”
그녀는 마법사가 되고 나서 자유라는 단어의 뜻이 무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리온의 말대로 그와 그녀는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강한 예감이 들었다.
“슬슬 돌아갈까?”
황궁의 의뢰도 완수했고, 파란 나비 여관의 체크아웃은 축제 마지막 날 하면 되긴 하는데.
페이는 워낙 마법을 익히는 일상에 푹 빠져서 그런지 축제에 미련이 더 남진 않았다.
그냥 하루 동안 즐긴 걸로 충분했다.
“흐응.”
그녀는 침대 위에 발라당 누웠다.
“삐삐익!”
남의 베개를 빼앗아 둥지로 삼고 자던 드라칸이 비키라며 삑삑댔으나, 페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모이테트라 바누스는 너무 많이 자면 야행성으로 돌변하기에 슬슬 잠을 깨워 둬야 한다. 그래야 밤에 잘 테니 말이다.
한편 페이의 손에는 리온이 만남의 기념으로 사 준 거울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것만큼은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안 받겠다고 하면 거울과 회중시계를 같이 마탑으로 보내겠습니다.”
그가 거의 막무가내로 권하는 터라 할 수 없이 받고 말았다.
“…예쁘네.”
과일 축제를 기념해 파는 거울이라 그런가? 둥근 거울의 뒷면을 포도 넝쿨로 성대하게 장식한 문양도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비치는 자기 외모를 보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그런데, 왜 나는 그들과 전혀 닮지 않았지? 일을 저지른 도트가 잘못 알았을 리는 없잖아?’
클라인 공작은 옅은 금발에 짙은 청안, 공작 부인은 도트와 비슷한 연갈빛 머리칼에 녹안을 지녔다.
장남인 카셀의 외모는 보지 못해 모르지만, 차남인 모리스 역시 색감은 조금 다르나 갈색 머리칼에 청안이었다.
반면 페이의 외모는 연핑크빛 머리칼에 선명한 연둣빛 눈이다. 좀 억지를 부려서 눈만은 공작 부인의 녹안 계통이라고 쳐도 머리색은 아예 안 닮았는데.
‘…모르겠네. 선대에 나 같은 색깔이 또 있었나?’
셰릴 사제님의 말씀으론, 페이의 머리 색깔이 상당히 희귀해서 나중에 소문을 듣고 부모가 찾아올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지 않았지.
심지어 페이를 눈앞에 버젓이 두고도 딸인 줄 알아보지도 못하고.
솔직히 페이도 짐작조차 못 할 만큼 그들은 가족으로서 외모가 거의 닮지 않았다. 윗대의 초상화라도 좀 본다면 또 모를까.
‘혹시 내가 더 어릴 때 머리색이 지금하고 전혀 달랐었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온당한 의문이 생겨났다.
클라인 공작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친딸을 잃었는지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면….
‘아니야. 관계를 끊기로 결심하고 목걸이도 부쉈잖아. 그쪽을 들여다보면 공연한 미련이 생겨날 수도 있어. 나도 그 일만큼은 나 자신을 믿어선 안 돼.’
그쪽에 미련을 가져 봤자 이득될 게 하나 없었다.
그저 꾸준히 실력을 쌓아 언젠가 도트가 일을 치려 할 때 저지하면 그만.
도트의 악행을 막고 나중에 뭐가 어떻게 되든 그들에게 돌아갈 생각은 절대 없다. 그들이 진짜 딸을 찾지 못해 평생 울고 산대도 알 바 아니었다.
그만큼 페이는 모르가나 시절의 기억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리온 님이나 귀염둥이 드라칸, 홀트데인 앞에선 잘만 짓는 웃음이 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사라졌다.
그녀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이테트라 바누스, 우리 야간 축제에 놀러 갈까? 밤에는 등을 켜 놓고 구운 과일이랑 고기를 판다고 했어. 나는 토마토 꼬치구이를 먹고 네 건 소고기 사 줄게.”
“삐이이이!”
그래, 딱 이것만 하고 마탑으로 가는 거야. 그렇게 마음먹은 페이는 여기까지 따라 나온 드라칸에게 맛있는 간식을 사 주기 위해 거울을 집어넣고 자리를 떴다.
낮의 제도와 밤의 제도는 분위기가 한층 달랐다.
낮보단 사람이 적긴 한데 밤공기도 부드럽고 기분도 스르르 풀려 갔다. 밤이라고 키워서 화분에 내놓은 달맞이꽃도 눈에 띄었다.
‘흐… 흐응. 꽤 낭만적이네, 제도 사람들.’
늘 무덤덤하게 굴던 페이도 느슨한 풍경에 긴장이 옅어졌고 입가에는 자연스러운 미소도 살아났다. 아마 이 모습을 ‘기사 리온’이 봤다면 놀랐을 것이다.
왠지 느긋하게 산책하고 싶어졌다.
“삐이이!”
어림도 없지, 훈제된 고기 냄새를 맡고 흥분한 드라칸이 목청도 크게 소리를 질러 댔다.
“아, 저기 있다. 알았어.”
꼬치구이 가판대를 발견한 페이는 토마토는 포기하고 고기를 파는 쪽의 줄을 섰다. 드라칸의 숨결이 자꾸 거칠어져서, 빨리 안 먹여 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잠시 후.
“삐이익! 삐이이!”
그녀가 기르는 솜뭉치 새가 빨리 달라고 야단을 쳤다.
“알았어, 저기 가서 줄게.”
넉넉하게 소고기 꼬치 네 개를 산 페이는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구석을 찾았다.
조그마한 새한테 비싼 고기를 준다고 눈치가 보인단 건 아니었다. 다만 맛있는 것 앞에선 드라칸의 먹성이 포악해지는 게 문제였다.
이 작은 새(?)가 소고기 꼬치를 두 개, 세 개 이상을 흡입하는 모습을 보면 다들 놀랄 것이다. 어쩌면 새가 아니라고 의심받을지도?
흑마법사라고 제보라도 들어가면 어떡해…. 더구나 여기는 제도였다.
“이쯤이 좋겠네.”
길에서 좀 벗어난 곳의 덤불을 발견한 페이는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잘 익은 꼬치구이를 꺼냈다.
막 모이테트라 바누스에게 한입 먹이려고 내밀었을 때.
“냠.”
“……?”
우물우물.
페이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사람이 먹는 소리로 보아 허상이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드라칸한테 줬는데 왜 다른 소리가 난 거람?
“모이테트라 바누스?”
“음, 우물우물. 왜 그렇게 힘들게 불러? 끄읍, 그냥 모모라고 불러.”
“삐… 삐이….”
페이가 내민 꼬치를 받아먹은 건 드라칸이 아니라, 웬 은발의 남자였다. 페이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더 큰.
남자라기보단 소년다운 싱그러움이 넘쳐흐르는 자였다.
“당신은 누구시죠?!”
페이는 기겁해서 물었다.
그건 그거고,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을 분명히 못 느꼈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모 주인.”
물방울을 탁 튀기는 듯 맑고 경쾌한 음성이었다.
“모모라니….”
“삐, 삐이익.”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곁을 내주면서도 나름대로 고고하게 굴던 드라칸이 이 은발 남자 앞에서는 날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걸어가서 얌전히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가.
귀여워도 나름 위풍당당한 날개까지 완전히 접어 버리고. 정말이야? 혹시?
페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설마 그쪽 분 성함이 루키우스인가요?”
“어.”
드라칸을 사육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페이의 뇌리에 그런 말을 남겼더랬다. 제 주인은 바로아 님이 아니라 루키우스라는 존재라고.
페이의 눈썹이 살짝 처졌다.
“음…. 그랬군요. 안녕, 모이테트라 바누스….”
진짜 주인을 만났으니 드라칸과는 아쉽지만 이별이었다.
사육실에서 데려온 이래로 본체 모습의 등 위에 한 번도 타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지. 나중에 플라이트 마법을 열심히 배워서 하늘을 나는 걸로 서운함을 달래 보자.
나름대로 정들었는데 벌써 이별이라니 좀 섭섭하긴 하다.
그녀가 애써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꼬치 하나를 홀라당 다 먹은 루키우스가 투덜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