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새로운 나날들
전생에서도 모리스가 가끔 형 카셀의 이야기를 하며, 그의 발끝이라도 따라가고 싶네 마네 하며 중얼거렸었는데. 과묵하다는 대공자의 실체가 이럴 줄이야! 너무 음흉하고 못됐잖아!
약간의 눈물로 환심을 사려 했던 도트가 새침한 표정을 짓자 공작 부인이 다시 지적했다.
“그렇게 입술을 씰룩거리는 버릇도 좋지 않단다. 음, 조만간 부채를 쓰는 법을 가르쳐야겠구나.”
“네….”
“포셰트 학자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부터 중심 시가지에서 과일 축제를 연다고 하니 사흘간은 푹 쉬십시오.”
“알겠습니다, 공작 부인.”
카셀에 이어 눈엣가시 2호인 포셰트 학자까지 가 버리자 도트의 조급함은 더욱 불타올랐다.
‘계획을 변경하는 게 나을까? 일단 실크 로브부터 증거물로 보이고…. 루비 펜던트는 친구가 무단으로 가져갔으니 신전으로 함께 가서 검증을 하자면….’
이 년보다 더 빨리 클라인 공녀로서 인정받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기회가 좀처럼 오질 않았다.
‘아니야. 검증하기 전에 베릴 모녀부터 처치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아직 내가 힘도 돈도 인맥도 없어. 아아, 귀찮아!’
“…테아, 도로테아?”
“네!”
사악한 생각에 골몰하던 도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는 속으로 기겁했다.
엄한 표정의 공작 부인이 그녀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전 생에서 총애를 얻지 못한 예전의 모르가나를 보듯, 너무나도 차가운 눈빛으로.
“방금 네 태도에 관해 지적을 했는데 왜 집중하고 있지 않은 거지?”
“죄송합니다.”
도트는 깍듯이 사과했으나 공작 부인의 뒤틀린 심기는 얼른 나아지지 않았다.
“여기서 수도원보다 편한 생활을 한다고 풀어져 있으면 안 된다. 도로테아, 너는 에이나로서 차후 우리 공녀의 말벗이자 친절한 선생이 되어야만 해.”
“예. 공작 부인.”
“네가 포셰트보다 설명을 더 잘할 자신이 있는 거냐?”
“네, 물론입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공작 각하의 은혜에 보답할 길임을 잘 압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자 공작 부인의 표정이 그나마 누그러졌다.
“당연히 그래야지. 네 입으로 하겠다고 말했으니 다음부터는 포셰트 학자께서 네 성취가 낫다는 말을 해 주셨으면 하는구나. 그러지 않고선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그분이 황궁에서 칭찬을 할 정도는 되어야 우리도 수고로움을 감수한 보람이 있겠지?”
‘으…!’
도트는 당차게 대답하였지만, 전생과 다른 선택을 하면서 한 달간 전혀 몰랐던 고역을 치르는 중이었다.
전엔 모르가나가 에이나 자격으로 모든 공부를 도맡았다.
그러기에 도트는 따분한 공부 말고, 원래 알던 예의범절과 어깨너머로 슬금슬금 배운 새 예법을 선보이며 환심을 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모르가나가 에이나로서 나서는 모임에 모조리 따라다녀 인맥 쌓기에도 열중했었다.
‘망할…! 내가 왜 건축물 각도 계산법이며 각종 영지의 역사와 온갖 잡동사니 가문 명칭까지 외워야 하는 건데. 사교계에서 그런 사소하고 따분한 일에 관심을 갖는 귀부인은 아무도 없어!’
그런데 지금은 모르가나가 하던 역할을 죄다 떠맡아서 하려니 죽을 맛이다.
‘심지어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영식 영애들도 마찬가지잖아. 하아…. 제도권의 정세만 대충 알면 그만인데 왜 이런 쓸데없는 공부에 시간을 쏟아야 해?’
어깨너머로 봤던 공부의 양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대공자가 떠나기 전, 두 달 정도야 넉넉히 할 줄 알았단 말이다.
모르가나를 너무 만만하게 봤던 도트의 패착.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
주신전에서 내가 성공적으로 친딸로 인정받은 뒤 공부를 시키기는커녕, 사치에 젖게 만들어 준 게 당신들이었잖아!
그 어려운 공부를 다 시킨 모르가나도 같이 지내기가 꺼려진다고 하니 냉큼 내쫓아 줬고!
완벽한 성공을 눈앞에 두고 회귀한 도트는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으나 일단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예.”
“후우.”
도트는 사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분명… 포셰트 선생과 말할 때 그랬어, 과일 축제라는 게 성대하게 열린다고. 내가 그 자리에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과거엔 수도원에 처박혀 날 초청하란 편지만 줄기차게 쓰느라 잘 몰랐지만.
이렇게 제도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축제면, 도트가 알았던 귀족 부인들도 나와서 행차할 가능성이 컸다.
‘내가 그들을 우연히 만나서 관계를 잘 다져 놓는 모습을 보여야 되는데. 아아, 답답해.’
에이나인 모르가나보다 도트와 더 친했던 영애와 귀부인들이 꽤 있었다. 도트는 클라인 공작을 꼬드겼던 때와 똑같이 이번에도 성공할 자신이 충분했다.
‘먼저 말해도 괜찮을까?’
“오, 그리고 내일이 시가지에서 과일 축제가 열리는 날이지. 포셰트 학자께도 휴가를 주었으니 너도 외출 준비를 하렴.”
“혹시 축제에 참가해서 다른 귀족분들과 만남을 갖게 되나요…?”
도트가 조심스럽게 묻자 공작 부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니? 넌 아직 에이나로서 기본 소양을 다 갖추지 못했어. 우리 가문의 명예가 달린 일인데 공식적인 자리에 내세울 순 없다. 포셰트 선생에게 인정부터 받아!”
“…네.”
“내일이나 모레쯤 나가려는 건 내가 아는 부티크에서 네 옷을 좀 맞추려는 거다. 요즘 유행이 어떤지도 보고 말이지.”
공작 부인은 조만간 도로테아를 선보일 작정이긴 했으나, 들뜨게 만들지 않으려고 호령을 하고 물러갔다.
‘아아, 재미없어.’
도트는 공작 부인이 셀피아 하우스에서 나가자 뭐라도 뻥 걷어차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빨리 클라인 공녀로 인정받아 사치와 권력을 누리고, 더 높은 자리인 황태자비로 올라가고 싶은데.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계획은 한가득 넘쳐나도 실행할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참자, 도트. 아니, 티아나. 어차피 황태자는 이 년 뒤에까지 다른 정략결혼 말이 나오지 않잖아. 우우…. 참는 게 이기는 거야. 난 반드시 황후가 되고 말겠어!’
그러나 그녀는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시간이 과거로 되돌려진 뒤 전과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 이상, 그녀가 알았던 모든 경험과 일들이 똑같이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도트는 오로지 한 치 앞만 전전긍긍하며 내다보느라 전혀 몰랐다.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난 페이는 잠에 취해 중얼거렸다.
“모오….”
“삐이! 삐이이이이!(물! 무우우울!)”
아기 새로 변한 드라칸이 하는 말은 신기하게도 무슨 뜻인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실컷 자다가 페이와 함께 깨어난 드라칸이 격렬하게 요구한 사항은 하나였다.
“알았어. 모이테트라 바누스. 물 달라 이거지?”
페이가 손을 내젓자 허공에 동그랗게 말린 물의 형상이 생겨났다. 마법이 아닌, 물의 마력에 친화력이 있는 그녀만의 특기였다.
드라칸은 고개를 쑥쑥 빼어내 물을 여우같이 먹고는 입맛을 다셨다.
별로 중요하진 않은데 모이테트라 바누스는 수컷이었다.
“삐이익!”
“알았어, 먹을 것도 있나 살펴볼게. 그리고 난 오늘 나갔다가 좀 늦게 돌아올 거거든? 넌 어떡할래?”
어제 봤던 병사는 페이에게 꽤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심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바를 꼼꼼하게 검수할 작정이었다.
얼음 저장소에 아침부터 갈 필요는 없었지만 굳이 가려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일단 가서 정오 직전까지 얼음 내가는 양 좀 보고, 괜찮으면 여관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기사님이랑 같이 가야지.’
그러고 보니 흑발의 기사님은 자기 이름을 또 알려 주지 않았다. 그게 기분 나쁘지 않다는 점이 더욱 신기했다.
기사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생판 남인데 이상하지? 우리가 그레이스 수도원에서 스치듯이 만난 기억도 없는데.
“삐이이!”
“어, 놀겠다고? 알았어. 이따 주인아저씨한테 돼지고기 얻어다가 모이통에 둘 테니까 배고프면 먹어.”
“삐익!”
일단 드라칸을 얻은 만큼 드라칸 라이더가 되긴 했는데, 과연 언제 그 등에 타게 될는지.
사실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페이에겐 배움을 거듭할수록 강력해지는 마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그녀에게도 비로소 여유란 게 생겨났다.
얼굴을 말끔하게 씻고 준비를 마친 페이는 얼음 저장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흠, 아직 조용하네.’
과일 축제가 열릴 거리 곳곳은 예쁜 꽃장식과 모형 과일 장식을 달아 두어 눈길을 끌었다. 클라인 공작저의 웅장함이나 화려함과는 또 다른 재미에 페이는 살포시 웃었다.
‘…좋네. 곧 여기가 활기 넘치는 장소로 변하겠지?’
예전엔 알지도 못했던 축제가 열리는 제도에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녀 자신이.
곧이어 얼음 저장소로 향한 페이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쉴 새 없이 얼음을 나르는 병사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파인 에코들은 페이의 곁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그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오늘 특별히 휴가를 내줬다. 물에서 비롯된 그녀들은 신난다고 여기저기에 흩어졌겠지? 분수대에서 낄낄대고 놀고 있으려나.
“…이, 페이?”
“어!”
냉기가 한층 가신 얼음 저장소 구석에 있던 페이는, 한참 후에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흑발의 기사를 발견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 일이세요?”
“지금은 정오가 조금 지났습니다. 파란 나비 여관에 갔다가 주인이 없다길래 찾던 참이었습니다. 축제에 쓸 얼음양이 충분한데 병사들이 여기서 나가지 말라고 한 겁니까?”
시간이 벌써 그렇게나 됐단 말이야?
그가 단단히 화난 것처럼 보여 페이는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오,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제가 아침 일찍 왔다가 병사님들 일하는 모습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것도 잊었나 봐요.”
흑발의 기사는 꽤 걱정했는지, 치켜 올라간 눈썹을 간신히 누그러뜨렸다.
“그랬습니까.”
“약속 잊어서 죄송해요. 제가 원래 시간 약속은 근처에 시계가 있으면 잘 지키는 편인데…. 여긴 해가 없어서요.”
“받으십시오.”
“네?”
카셀은 다짜고짜 외투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긁힌 흔적 하나 없이 잘 세공된 회중시계였다. 얼른 보아도 비싸 보이는 게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깜짝 놀란 페이는 황급히 거절부터 했다.
“괜찮아요! 어… 실은, 제가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느라….”
“받아 주십시오, 페이 양. 내 마음입니다.”
“어째서요?”
선연한 연둣빛 눈이, 평생 누군가에 먼저 손을 내민 적이 드문 남자의 동공을 찔렀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주고 싶었습니다.”
카셀은 솔직하게 답했다.
그가 기사 생활을 하면서 여성 마법사를 대한 적이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또, 로지아 국경지대에 가기 전 숱한 영애들과 예의를 차려 만난 적도 많았다. 물론 공작 내외의 긴한 뜻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해지지 않은 감정을 정제하여 상대방에게 건네게 한 건 이번이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