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우연이 계속되면
가짜 공녀와 그간 행복하게 살았던 공작저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허탈해하든 말든 내 알 바도 아니고. 알아서 마음을 추스르든가, 뭐.
페이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후우, 그 사람들은 내가 자기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겠지.’
에이나로 지내면서 황궁 혹은 귀족 가문의 기사들과는 의외로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이 드물었다. 오로지 공작 내외가 소개해 주는 이들과만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애초에, 홀트데인이 가져온 요청에 응한 것도 제도의 거리에서만 일한다는 단서가 붙어서였다. 만약 황궁에 방문하라고 했으면 페이는 절대로 안 갔을 것이다.
클라인 공작….
클라인 공작 부인….
당신들의 거만하고 차가운 얼굴을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난 당신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차디찬 얼음을 삼킨 듯이 냉정해질 수 있거든.
“알았어, 네 말대로 전해 둘게.”
“부탁해요.”
* * *
시간은 흘러 과일 축제 하루 전.
카셀은 오랜만에 갑옷도 기사단의 제복 차림도 아닌 평범한 귀족 복식을 택했다. 말이 ‘평범한 귀족’이지 공작가의 장자가 입는 옷이라 광택이 흐르고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은근슬쩍 하인이 붙여 주는 장신구를 밀어냈다.
가문의 상징인 사자를 상감한 금 브로치였다.
“이것은 떼라.”
“카셀, 브로치 하나쯤은 달 만하잖니. 네 위치를 생각하렴.”
“이거면 됐습니다.”
그는 보타이에 꽂은 반짝이는 은제 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조차도 금이 아닌지라 못마땅하기 그지없었으나 공작 부인은 발끝을 들어 아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나름 수수하게 차려입었어도 카셀의 용모는 훌륭하기 이를 데 없어 절로 자랑스러워졌다.
소중한 첫아들이 제도에 돌아온 이후 한 달간 귀환의 말을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행여 말하면 돌아간다고 할까 싶어 매일 살얼음판이었다.
“시내에 다녀오겠다고?”
“네. 내일이 축제 시작 당일이니 가볍게 점검만 하고 돌아오려고 합니다.”
“그래, 다녀오렴. 눈에 띄는 곳이 있으면 구경도 하고.”
공작 부인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늦여름이라 때가 좀 안 맞긴 하지만, 황궁에선 과일 축제를 열기로 결정을 내렸다. 여전히 사교계에만 두문불출하는 황태자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카셀은 공식만 아닐 뿐, 그 축제 관리에 일을 적정량 떠맡은 눈치였다.
이렇게라도 해서 아들이 제도에 마음을 좀 더 붙여 보길 바랐다.
“딱히 관심이 가는 구역은 없습니다. 어머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클라인 공작저를 떠나는 카셀의 표정엔 은밀한 통쾌함이 서려 있었다.
그가 돌아오고 거의 한 달째, 셀피아 하우스로 쫓겨 간 그 도로테아란 여자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선생 노릇을 하러 온 학자 포셰트는 하루 만에 고개를 저었다.
예법을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 건 사실이나 거의 수박 겉핥기식의 행위라고. 정확하게는 여기의 선생에게 배워서 쓰는 게 아니라 전에 알았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다고 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포셰트의 매서운 눈은 피하기 어려울 테다.
‘그리고 포셰트 선생이 새로 가르쳐 주는 지식엔 관심도 없다지.’
같은 귀족이라도 제도의 귀족은 함양해야 할 지식과 상식이 무척 많다.
포셰트는 도로테아가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의지보다는 자기가 관심 있어 하는 쪽만 알려고 아등바등한다는 평을 내렸다.
예를 들면 사교계의 동향 가운데도 누군가의 결혼과 약혼, 나아가선 칩거 중인 황태자의 신변잡기 등. 그런 쪽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어둠 속 승냥이처럼 빛낸단다.
더불어 진귀한 보석, 어떤 가문의 몰락과 부흥, 연애와 결혼 등 가십거리 부류의 이야기가 아니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곧바로 바뀐다고 했다.
말하자면, 클라인 공작가에서 요구하는 완벽한 에이나가 되긴 마음가짐부터 글렀다. 그야말로 흔히 부와 권력에 들떠 있는 인간 군상 중 하나 아닌가.
‘상류층에 속하고 싶어 잔머리만 굴리려고 든다는 건데 그냥 둘 수는 없어. 만에 하나 티아나가 돌아온다 한들 저런 약아빠진 여아가 부모님 곁에서 살살거리면 소외감을 느낄 거다.’
카셀은, 순진한 성격이라 얕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혹독한 국경지대에서의 나날은 그가 제도를 떠나기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고도 남았다.
공작 부인의 속내야 잘 모르나 아버지, 클라인 공작은 포셰트가 얼마나 대단한 학자인지 잘 알았다. 그러기에 그가 도로테아에 대해 늘 혹평을 하자 마음이 좀 떠난 상태로 보였다.
시간이 더 흐르면 도로테아는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말 테지.
우리 티아나는, 에이나 따위 없어도 돌아오기만 하면 잘 지내게 해 줄 거다.
“여긴가.”
말을 달려 축제 준비가 막바지인 얼음 창고 구역으로 순식간에 온 카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앗…!”
사복을 입은 카셀을 알아본 병사가 경의를 표하자 그는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오늘은 가볍게 점검하러 온 거다. 하던 대로 해.”
“옛.”
“얼음은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나?”
“그렇습니다. 마탑에서 온 인간 마법사가 차곡차곡 쌓는 중입니다. 얼굴은 앳된 티가 나는데 능력은 확실해 보입니다.”
“흠.”
그토록 황실 측에서 협조를 요구했는데 고작 한 명, 그것도 가장 수가 많은 엘프는 요청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지.
카셀은 미간을 좁혔다.
인간 마법사는 보통 모든 속성을 향유하지 않고 하나, 드물게 두 가지를 골라 배우길 택한다. 그중에서도 물 속성의 특기를 타고나는 이는 드물어 마탑에서도 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혹 대단한 능력자인데 마탑의 강요로 원치 않는 걸음을 억지로 한 것인가?
‘가서 격려라도 건네야겠군. 저긴가?’
크게 지어진 창고 문틈으로 냉기가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쉬이익-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냉한 소리와 함께, 검은 로브를 입고 두 팔을 벌린 마법사의 눈앞에서 얼음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창고 관리를 맡은 병사가 그 마법사에게 공치사를 잔뜩 건네는 중이었다.
“이야-아, 마법사 아가씨, 대단합니다. 혹시 백조나 독수리 같은 모양도 만들 수 있습니까?”
절레절레.
카셀의 시야에 보이는, 고개 젓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아뇨. 전 마탑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렇게까지 세밀한 작업은 못 해요.”
“내일 오전까지 얼음 보관 상태를 보고 괜찮으면 마법사 아가씨도 자유의 몸이니 좀 놀면서 하십쇼. 난 이만 가 볼 거니 수고하고요.”
“네.”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 같은데.
아까와 마찬가지로, 문으로 나오던 병사가 깜짝 놀라 경례를 올리려 했다. 카셀은 제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 조용하란 시늉을 하고선 산더미처럼 쌓인 얼음을 향해 다가갔다.
햇빛도 비치지 않는 어둑한 창고.
동그란 얼음, 네모난 얼음, 판처럼 얇은 얼음과 두꺼운 것까지 이 얼음 마법사 아가씨가 준비한 얼음은 꽤 다양했다.
그중 가장 작고 동글동글한 얼음은 음료수 컵에 따르면 많은 이를 즐겁게 할 것이다.
그보다 기대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듣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목소리군.’
특별한 만남이 되리라는 기분 좋은 예감.
카셀은 입을 열었다.
“마법사 아가씨, 실례합니다.”
“네?”
뒤를 돌아본 마법사의 청량한 연둣빛 눈동자가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콱 찔렀다.
그때처럼, 화려한 연핑크빛 머리칼은 뒤늦게 시선에 들어왔다.
누군지 모를 리가 없다.
설마 한 달 전 마탑까지 배웅해 줬던 그 아가씨인가? 이런 인연이 생기다니!
카셀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어머나?”
그리고 저쪽도 알아본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마법사 페이 님.”
카셀은 여간해선 남에게 ‘님’ 자를 붙이지 않았으나 이 귀여운 마법사 아가씨에겐 예외였다. 잘 쓰지도 않는 존댓말이 냉큼 살아났다.
페이는 자기 등 뒤의 얼음 냉기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얼른 거길 가리켰다.
“기사님! 안녕하셨어요? 이 얼음, 제가 다 만들었어요.”
그는 언제 미소를 띠었냐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얼음의 양을 보니 너무 혹사당했군요.”
“혹사라뇨, 괜찮아요. 전 물의 마법에 조예가 좀 있거든요…. 후후!”
그녀는 꽤 자랑스럽게 말했다.
누가 알 것인가? 이 귀엽고 야무진 여마법사가 한 달 전 마부 뒤에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수도원의 소녀라고.
“그렇습니까.”
“기사님도 내일 축제 때 동원되나 봐요?”
카셀 데우플리온 클라인이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 창고로 와서 얼음을 확인하는 작업도 사실 안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는 작은 거짓말을 했다.
“예, 뭐. 자잘하게 경비를 보고 다닐 예정입니다.”
“안됐네요. 저는 정오까지만 얼음 현황을 보고 재고가 넉넉하면 자유의 몸인데.”
“페이 님은 마탑에서 파견되었나 본데 따로 묵고 있는 장소는 있습니까?”
“네. ‘파란 나비’란 여관에 있어요.”
그곳은 또 어디일까?
카셀은 대귀족답게 제도에선 최고급 인사만 모시는 호텔만 전전해서 거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이 완전히 생경한 걸 보아, 규모가 너무 작거나 그가 없는 사이 새로 생겨난 곳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혼자서 괜찮습니까? 다른 마법사는 도와주러 오지 않았고요?”
그가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페이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괜찮아요! 제가 마탑에서 친구, 음, 홀트데인이란 친구를 사귀었는데요. 걔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일하러 가면 황궁에서 나온 기사들이 거만하게 굴 수 있으니까 혼내 주라고요.”
공작가의 대공자답게, 카셀은 이런 식의 돌려차기 욕설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그의 앞에서 기사의 본질을 두고 모욕하려는 미친 짓은 안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처음으로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페이 양이라서 그런가? 기분이 전혀 상하지 않은 카셀은 씩 웃었고, 페이는 웃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앗,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아닙니다. 그보다 내일 정오 무렵이 지나면 나와 함께 구경 다닐 생각 없습니까, 페이?”
그는 은근슬쩍 그녀를 꼬여 냈다.
“으음…. 글쎄요. 저녁 즈음엔 마탑으로 귀환할 예정이라 그때까진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그 여관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네!”
페이와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 약속을 받아 낸 카셀은 피식피식 웃으며 다른 장소를 점검하러 떠났다.
그 무렵, 셀피아 하우스에선 카셀만은 못해도 기분이 약간 나아진 한 사람이 있었다.
“흐흑, 공작 부인.”
“도로테아, 숙녀는 우는 모습을 함부로 보이지 않는단다. 넌 어느 때든 고상한 에이나가 아니냐?”
“네, 네.”
그야말로 오랜만에 클라인 공작 부인이 셀피아 하우스에 행차했다. 솔직한 말로 하자면, 본채에서 도트가 쫓겨난 이후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게 다 카셀 대공자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