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제도로 향하다
수도원에만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면 언젠가 도트가 또 마수를 뻗쳐 올 거란 점이었다. 남은 루비 펜던트까지 강탈해서 자기가 진짜 클라인 공녀라고 우기기 위해서겠지?
그 꼴을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클라인 공작저로 가지 않더라도 자신을 보호할 힘을 기르려면, 그레이스 수도원에 도트가 다시금 지를 위험한 불길을 막으려면.
‘내가 여길 떠나야 해.’
모르가나는 이정표가 없는 길을 걷는 여정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나날이 그녀에게 가져다줄 앞날이 궁금하고 기대되었다.
“모르가나야…. 잠시, 잠시 기다리렴!”
베릴은 모르가나의 손을 꼭 잡고는 자기 침실로 대뜸 데려갔다. 그러곤 귓속말로 모르가나를 처음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는지 낱낱이 다 말해 주었다. 셰릴이 말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이.
단 하나, 딱 한 가지만 달랐다. 아마 이것은 셰릴도 몰랐던 사실이 아니었을까?
“네?”
“그 바로아라는 마법사가 만약, 네가 나중에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 이 소개장을 가지고 마탑으로 오라고 했다. 혹시 생각이 있니?”
뜻하지 않은 말에 놀란 모르가나가 눈을 크게 떴다.
“하, 하지만… 바로아란 마탑주는 일 년만 존재했다가 종적도 모르게 사라졌다면서요. 마탑에서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어떡해요?”
“괜찮을 거다. 만약 거기서 널 받아 주지 않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돌아오렴.”
“수녀원장님….”
늘 엄했던 베릴의 눈시울이 꽤 붉어져 있었다.
“그래, 모르가나야. 네게도 너의 삶을 오롯이 선택할 시간이 필요한데 내가 너무 무지했구나. 내가 좋은 대로만 하면 너도 좋을 줄 알았다….”
솔직히, 좀 의외였다.
모르가나가 클라인 공작의 친딸이란 정보를 수녀원장이 알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그토록 많고 많은 원생 중 모르가나를 골라 보냈을까.
그 이유를 모르가나는 지금 가슴으로 깨닫고 있었다.
수녀원장님은 내가 거기에 가서 잘살리라 여기고 보낸 거였어.
“꼭, 다시 돌아올게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오, 모르가나!”
‘제가 반드시 지켜 드릴게요.’
모르가나는 베릴을 껴안으며 그녀 자신도 엉엉 울고 말았다. 전생에선 깨닫지 못했던 타인의 따스함, 그게 우르르 밀려오고 있었다.
수녀원장은 제 사비를 보태서 모르가나에게 줄 수 있는 돈을 넉넉히 챙겨 주었다. 안 받으려고 했으나 무작정 짐가방에 쑤셔 넣는 데는 장사가 없었다.
이튿날.
별로 있지도 않은 짐을 꾸리던 모르가나는 망설이다가 부서진 루비 펜던트도 챙겼다.
버려도 상관은 없으나, 도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놔두는 것만은 찜찜해서라도 안 되었다.
‘후.’
그나저나 대뜸 마탑행이라니? 수녀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엔 생각지도 않은 행보였다.
그녀는 마탑으로 향하는 짐마차를 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바로아 님께선 내게 물의 마법에 재능이 있다고 하셨댔지? 인간에겐 잘 적용되지 않는 속성이라던데 신기하네.’
그레이스 수도원은 워낙 정숙한 곳이라, 도서관에도 마법 관련 책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베릴이 적극적으로 찾아 줬기에 어젯밤에 잠깐 읽어 볼 수나 있었다. 아마 혼자선 찾아볼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후…. 난 마법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데 괜찮으려나.’
마법에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어린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다지.
모르가나는 제가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닌지 은근히 걱정되었다.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하겠지만 그게 좋은 결과를 항상 보장해 주진 않는다.
그녀는 어제 종이에 베껴 온 마법의 기초 수식을 읽느라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이쿠!”
“꺄악!”
평탄하게 한참을 잘 굴러가던 짐마차가 급작스럽게 덜컹거리며 멈췄다.
멍하니 있던 모르가나의 엉덩이가 가볍게 들썩이다 바닥에 쾅 하고 부딪혔다.
“흐… 아야….”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는 사이, 마부가 허겁지겁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짐마차 마부와는 오래도록 아는 사이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싶어 황급히 내린 모르가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
“아이고, 이거 미안하구나, 모르가나야. 내 분명 마차 바퀴가 이상 없는 걸 확인하고 출발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길 줄이야.”
나무로 된 마차 바퀴의 왼쪽에 균열이 생겨 완전히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낭패였다.
“마차를 더 몰면 안 되겠네요.”
“여분의 바퀴가 있기는 한데 나 혼자 수리하기엔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무겁기도 하고 좌우 균형을 정확하게 맞추려면 오래 봐야 하거든.”
“아…!”
“작업을 여기서 다 마치고 나면 해가 저물어서 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 같구나.”
그녀는 길 너머, 언덕 아래에 찬란하게 펼쳐진 제도를 바라보았다.
저기엔 도트도, 친부모인 클라인 공작 내외가 사는 공작저도, 마탑도 모두 다 있다. 저 넓고 넓은 대지 위에.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이거 어떻게 하지? 제도가 코앞인데…. 차가운 길 위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도 그렇지만 제도 외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도 경비병들이 허락하지 않을 테고.”
“그야 그렇겠죠.”
“역시 시간이 걸려도 마차를 고친 다음 수도원으로 돌아갔다가 하루 더 쉬고 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 모르가나야?”
마부의 말에, 모르가나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까지 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면, 베릴 수녀원장님은 마음을 바꿔 그녀를 붙잡고 주저앉히려고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셰릴 사제님도.
힘들게 온 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편이 낫겠어.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 아니에요, 아저씨. 어차피 제도의 성벽이 눈에 보이니 저는 여기서 짐가방을 가지고 걸어갈게요. 아저씨 혼자 남겨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요.”
“너 혼자서 말이냐? 아이고, 너무 무겁지 않겠….”
마부가 걱정하는 음성은 갑작스럽게 요란해진 말발굽 소리에 묻혔다.
짐마차를 다그닥 다그닥 몰고 가던 익숙한 말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활기와 힘이 가득한 무수한 말발굽 소리. 깜짝 놀란 모르가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흐…!”
“아이쿠쿠, 제도 근방이라 그런지 기사님들이 지나가시는구나. 이리 오렴.”
기사라.
모르가나는 마부의 품에 안겨 얼굴을 수그린 채 추억에 잠겼다.
클라인 공작의 둘째 아들인 모리스는 제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기사단에 입부를 실패한 남자였다.
그가 모르가나와 같은 핏줄임을 안 지금도 불쾌함이 가시지 않았다. 도트의 일을 제외하고라도. 그건 단지 모리스가 재능이 없다는 시시한 이유가 아니었다.
‘어느 날인가, 위스키를 잔뜩 마신 공작이 했던 말이 있었지. 장자인 카셀은 능력이 너무 출중해서 소공작인데도 변방으로 불려 가고, 모리스는 차남이라 어떻게든 기사가 되어야 하는데 본인의 의지가 통 없다고.’
모리스 클라인은 무려 공작의 둘째 아들이다.
그러면, 능력이 좀 부족해도 지원이나 다른 점을 고려해서 남들보다 입부하기가 더 쉬웠겠지.
뭐, 연신 탈락의 고배를 마신 거야 넘어가더라도.
제도 내 기사단에 못 들어가면 한미한 지방 영지의 기사 자리라도 기웃거려야 할 게 아닌가?
취한 클라인 공작은 비틀거리면서 이런 말을 이었다.
“못난 놈! 제도 바깥으로는 한 걸음도 하기 싫다고, 쯔읏. 야만적인 동네는 기웃거리기도 싫다는 한심한 말이나 하고… 에휴.”
“각하, 많이 취하셨습니다.”
“제 눈에 안 차는 여건의 지역이라면 결혼도 기사도 싫다는데 그게 제 입장에서 할 소린가…! 내 자식이니 품는 게지….”
“어서 들어가시지요.”
공작을 부축한 집사는 모르가나에게 험한 눈짓을 해 보였다. 지금 들은 이 말을 다른 데 옮기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
예전의 일을 떠올리고 마음이 도로 차가워진 모르가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클라인 공작저는 그곳에 난 풀 한 포기도 싫어. 내가 완벽한 단절을 선택한 이유는 도트보다도, 당신들이 초래한 거야. 내게 마음을 붙일 무언가를 단 하나도 주지 않았잖아?
저 기사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고 한참 뒤에나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공연히 저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오해는 위험하고 또 싫었다.
괜히 억세거나 못된 기사들의 눈에 띄면 곤란해져.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소심한 뜻과 반대로 흘러갔다.
“흠.”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서 멎더니 누군가가 내리는 소리가 났다.
그 남자가 내리자 뒤따라오던 기사들도 일제히 내렸다. 마부는 품에 안았던 모르가나를 황급히 뒤에 숨기고 굽실댔다.
“아이고, 기사 나리.”
“무슨 일인가? 마차 바퀴가 부서진 것처럼 보이는군. 혹 누군가의 소행인가?”
남자의 목소리는 퍽 다부졌다.
말로만 내가 제국 최고의 기사라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모리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남자다운 매력이 넘쳐흘렀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정비를 제대로 못 해 뒀더니 먼 길을 오는 와중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쇤네 혼자서 고칠 수는 있는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어디에서 왔는가.”
“그레이스 수도원입니다.”
기사는 기사구나.
다행히 문답은 정상적이었다.
마부의 등 뒤에 숨은 모르가나는 용기를 내어 눈을 살짝 들었다.
‘젊네…?’
번쩍이는 은빛의 갑옷보다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남자의 짙은 흑발이었다. 그는 키가 커도 너무 커서, 마부 뒤에 숨은 모르가나를 다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레이스 수도원이라.”
잠시 생각에 잠긴 남자는 마부에게 다시 물었다.
“그 뒤편에 있는 아가씨도 수도원에서 왔는가?”
“아이고, 그렇습니다요.”
“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짐마차를 수리할 사람을 제도에서 보내 주겠다. 빠르면 두 시간 이내로 오겠군.”
기사가 낯모르는 사람에게 저런 친절을 베풀어?
모르가나는 두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기사도를 발휘할 때는 귀부인 앞이나 귀족을 위해서만 하는 게 아니었나. 나도 그렇고, 마부 아저씨 역시 누가 보아도 평민인데.
‘혹시 내가 생각했던 전형적인 기사와는 다른 사람일까? 기사를 꿈꿨으면서도 제풀에 포기해 버린 모리스하고 다르게 말이야.’
다시 살아난 이후 모르가나는 베릴 모녀의 상냥함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기사님도 그간 모르가나가 생각한 거만한 기사들과는 혹시 다를지 모른다. 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모르가나의 고개가 살짝 위로 들렸다.
“제도로 가는 길이었나?”
“예, 예.”
“…자네는 마차 수리를 기다려야 하겠고. 다만 이 아가씨가 마음에 걸리는군. 여름이어도 요즘 이 지역에 비가 크게 내려 서늘한데 길가에 오래 둬야 하다니.”
두근두근.
이유는 모르겠는데, 심장이 또 빠르게 뛰었다.
하늘에 맹세코 이 낯모르는 남자에게 반해서는 아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의 강한 예감이 들었다.
“부단장님.”
부단장?
“괜찮다면, 이 아가씨는 내가 제도로 데려다주지. 행선지가 어딘가? 마부는 짐마차 수리를 기다렸다가 돌아가든지, 나중에 약속 장소로 다시 가서 아가씨의 도착을 확인하든 하게.”
“그, 그렇게까지야…!”
기사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마부는 크게 당황했으나 모르가나는 자기 입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이젠, 내가 말할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