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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나의 이름, 당신의 이름 (3/148)

03화 나의 이름, 당신의 이름

텅 빈 접시를 치운 뒤, 셰릴이 나직이 말했다.

“으음, 그러니까 모르가나. 다들 너를 모르가나라고 부르지만, 또 다른 이름이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그 이름은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이 아니었다.

“모건 르 페이, 또는 모르가나라고, 네 이름을 지어 준 마법사가 특별히 신경을 썼단다. 뭐라더라? 너는 물의 힘을 받아 천부적으로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했었나.”

“물….”

물이라고?

순간, 모르가나는 오싹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루비 펜던트를 부순 뒤 왠지 모르게 개운해진 느낌과 몇몇이 귀에 대고 속닥이던 이상한 말들. 그때의 기분은 꼭 포근한 물에 전신이 몽땅 잠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누구든지 제발 내가 그레이스 수도원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그러고 나서 온 게 이 큰비잖아!

과거에는 전혀 내리지 않았던!

콰르릉.

모르가나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요란한 우레가 들려오고 빗줄기가 흙과 나무를 강타하는 소리가 거세졌다.

셰릴은 눈의 깜빡임도 멈춘 모르가나의 머리를 상냥하게 쓸어 주었다.

“네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수녀원장님이 알려 주지 않다니, 너무했네. 난 지금껏 네가 마법 대신 성직에 봉헌하길 바란 줄로만 알았단다. 돌아가는 대로 내가 다시 얘기해 보마. 네가 혹시 원한다면, 마법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 그 마법사분 존함이 무어죠?”

셰릴의 표정이 약간 어색해졌다.

“그게… 으음, 모르가나. 우리는 수도원 근처를 빙빙 도는 삶을 살기에 먼 곳의 일은 잘 모르잖니. 그렇지?”

“네.”

“그분은 자기 이름이 바로아라고 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 일 년 정도 마탑주로 있던 마법사와 이름이 같더구나. 활동했던 시기와도 일치해, 동일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아… 님이요.”

바로아란 이름, 그녀가 평생을 산 제국에선 거의 쓰지 않는다.

낯설면서도 새 삶을 살게 된 지금 비로소 알게 된 은인의 이름이라니.

왠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모르가나는 청량함이 가득한 남의 이름을 한동안 입술로 곱씹었다. 그분이 뭔가 단서를 더 알고 계실 텐데 만나긴 좀 어렵겠지?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셰릴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억지로 웃었다.

“저를 구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네요. 바로아 님, 어디에 계시든 행복하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호호, 그러니. 역시 모르가나다워.”

비는 차츰 멎기 시작했다.

모르가나가 마음의 갈등을 내려놓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 아스라이 정해 뒀을 때.

잠시 나갔다 온 셰릴이 혀를 내둘렀다.

“휴, 비가 멎었어도 우릴 데리러 올 짐마차가 오늘이나 내일은 절대로 못 오겠어. 땅이 좀 마르면 삽을 들고 나가서 앞이라도 좀 정비해 둬야겠구나.”

“네. 사흘째 되는 아침나절 즈음에 수도원으로 돌아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제가 딸기하고 청포도는 무르지 않았는지 다시 살펴볼게요.”

셰릴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넌 늘 일에만 열심이야.”

“에이, 아니에요.”

“도트 일까지 자청해서 떠맡지 말고 앞으로는 너 자신을 좀 챙기렴. 난 네가 너무 말라서 안쓰러울 때가 많단다.”

막 과일 저장실로 향하려던 모르가나의 발길이 갑자기 멎었다.

그녀는 몇 초 후 간신히 대답했다.

“…네. 꼭 그럴게요. 오늘부터는요.”

* * *

같은 시각, 그레이스 수도원.

드디어 방해꾼 모르가나를 처치하고 화려한 공녀의 삶, 내일의 황태자비를 노렸던 도트는 입을 쩍 벌린 채로 굳어 있었다.

‘뭐… 뭐야!’

진짜 딸로 인정받고 드디어 입었던, 날개처럼 가볍고 감촉 좋은 실크 드레스.

천장까지 뻗어 올라갈 기세였던 황금빛의 우람한 침대 기둥.

도트가 연약해 보인다며 공작 부인이 늘 챙겨 줬던 맛있고 고급스러운 귀족식 요리들.

그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도트는 클라인 공녀가 아닌 초라한 도트로 돌아와 있었다.

그레이스 수도원의 골칫덩이, 늘 게으르다고 뒷말을 듣는 억울한 도트리샤 시절로.

“이게 무슨…!”

벽에 걸린 달력의 연도는 이 년 전을 가리켰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방 바깥으로 나가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뒷골목의 용병들을 매수해 불을 질렀던 수도원의 서편 기숙사가 멀끔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도트가 들어앉은 방도 딱 거기였다.

중앙 홀까지 달려서 나오자, 분명 죽었다고 보고를 받은 베릴 수녀원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스쳐 지나가기까지 했다.

“쯧. 멀뚱멀뚱 있지 말고 기도방으로 가서 성서를 읽든지 빨래 걷는 일이라도 도와라. 모르가나는 여름 과일을 수확하러 자청해서 일하러 갔는데 너는 늘 방에 틀어박혀서 놀기만 할 테냐?”

안 그래도 느닷없이 이 년 전으로 돌아온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도트는 악에 받쳤다.

당신이 뭔데 감히 명령해!

나는, 나는 클라인 공녀란 말이야. 너희들이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 마지못해 수도원에 기부하러 오면 뛰쳐나와서 굽실대야 할 그런 위대한 존재라고!

망했어, 이 모든 게 꿈이어야 하는데…!

몇 시간을 먹지도 울지도 않은 채,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있던 도트가 몸을 번쩍 일으켰다.

‘가만. 여름 과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끔찍한 악몽을 꾸는 중이 아니라면, 이 년 전의 모르가나가 공작저로 불려간 여름날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고?

도트는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을 문지르며 다짐했다.

‘정신 차려, 도트. 아니,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 넌 영민한 공녀잖아? 이건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어.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과거를 바로잡고 완벽한 나로 나아갈 큰 행운이야. 이 년이 아니라 더 빨리 공녀가 될 수 있어!’

도트리샤는 주먹을 꽉 쥐고 감격으로 부르르 떨었다.

멍청한 모르가나를 졸라 공작저로 입성한 뒤의 이 년간, 그녀는 통 편하게 지내질 못했다.

얼굴은 공작 내외와 모리스를 위해 늘 웃고 있었으나 늘 두려웠다.

필요에 의한 에이나도 아닌 자신이 언제 쫓겨날지 누구도 모르기에.

애초에 멀쩡한 가족이 있는 도트가 수도원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존속 살해로 인한 도망침이었다.

그녀는 본디 제국 시골구석에 있는 카리스 자작가의 여식.

말만 귀족일 뿐, 가문은 몰락 직전에 다리가 불편한 둘째 오라비 루민트까지 있으니 돈 들어갈 투성이라 늘 골치가 아팠다.

그 오빠를 죽여 약값을 줄이려는 게 도트의 무서운 계획이었다. 그래야만 가난한 집에서 지참금을 모아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 줄 테니까.

하지만 절름발이 루민트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원래는 바닥이 마른 위치에서 밀려고 했는데 거리가 상당히 벗어나 강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도트의 가슴도 무섭게 두근거렸다.

두려워, 무서워. 혹시 그가 죽지 않았으면 어떡하지?! 그에게 산책 가자고 일부러 꼬드겨서 나온 게 난데. 만약 안 죽었으면 내가 한 일을 가지고 살인죄라며 증언할 거 아니야…!

더럭 겁이 난 도트가 거의 몇 주를 도망쳐서 간신히 숨은 곳이, 바로 이 그레이스 수도원이었다.

이곳에서 멍청하고 유순한 모르가나를 만나고….

그 뒤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당장 되돌릴 수 없는 것 중 한 가지 후회가 있다면, 그때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수도원에 들어와 성만 숨겼고 가명 대신 본명을 덜컥 말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태어난 직후 떠돌이 사제에게 ‘도트리샤’란 이름을 받았는데, 이 이름은 가족들만 간간이 불렀고 고향의 다른 사람들은 보통 ‘트리샤’로 불렀다.

도트리샤란 이름은 너무 눈에 띄어 수도원에 오기 전에도 트리샤로 불렸는데, 수도원에 도달했을 당시 침착하게 굴기만 했어도….

시간이 좀 더 앞으로 되돌려졌으면 완벽하게 일을 꾸밀 절호의 기회인데!

‘아니야,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공녀 자리는 원래 내 것이 옳아, 제 밥그릇도 못 챙기는 모르가나 것이 아니라고. 이번 생엔 제대로 한번 해 보는 거야!’

기억 속 그때와 모든 일이 같이 흘러간다면. 곧, 잃어버린 딸을 수년 내로 되찾으리란 신탁을 품에 안은 클라인 공작이 올 것이다.

도트는 허겁지겁 나가 베릴 수녀원장이 자주 다니는 복도에서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비질을 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흠.”

밝았던 하늘이 거의 노을이 질 때가 되어서야 베릴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팔이 빠지도록 무성의한 비질을 하던 도트는 속으로 화가 치솟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공손한 척 굴었다.

‘어떻게든 나 혼자 클라인 공작저에 입성해서 에이나가 되자. 그래야 누구의 방해도 눈치도 안 받고 나만의 찬란한 삶을 영위할 수 있어!’

일단은 그게 가장 큰 숙제였다.

애초에 잃어버린 딸을 위해 데려온 모르가나의 교육이 주축이 된 공작저.

곁가지인 도트는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해야만 했다.

지금 도트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공작가에 혼자 들어가서 예법을 중점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해야지. 예법 선생의 칭찬을 토대로, 그들에게 신뢰와 사랑을 쌓는 게 첫걸음이다.

‘신전에서 친자 감식을 받을 때까지 모르가나는 살아 있어 줘야지? 그때쯤이면 내 말 한마디에 그들이 껌뻑 죽을 테니 슬쩍 데려와서 똑같은 방법을 쓰면 돼.’

모르가나를 살려 둬야 하는 이유는 자명했다.

이전 생에서 훔쳤던 루비 펜던트와 실크 로브는 그저 낡은 증표에 불과했다.

진짜 관문은 신전에서 거행하는 진실의 판독 석상.

거길 반드시 넘어서야 했다.

과거엔 모르가나와 신전까지 어렵사리 동행해, 교묘한 술수로 모르가나가 질문을 받게 하여 간신히 성공했었다.

‘후우….’

사실 도트는 모르가나가 했던 것처럼 끔찍하게 많은 양의 에이나 공부를 다 할 생각은 없었다. 그 미련퉁이는 자기가 친가에 돌아온지도 모르는 채 공부만 하다 헛되이 죽지 않았나.

무조건 이쁨과 신뢰를 받아서 진짜 공녀로 빠르게 인정받아야 한다.

설마 딸이 된 도트에게 그와 똑같은 공부를 시키려 들 리는 없으니까.

‘좋아!’

자기 딴엔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한 도트의 귀에 베릴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도트리샤, 비질은 그만하고 잠깐 들어와라.”

“네!”

정말이지 바라던 바였다.

고요한 응접실로 들어온 베릴은 단정한 자세로 앉더니 얕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네가 그래도 생각을 바꾸어 주신 아래서 헌신과 겸손함을 배우려는 자세를 갖춰서 다행이구나. 언제까지 철이 없을 줄 알았더니 과연 오래 두고 볼 일이다.”

‘빌어먹을…! 그딴 쓸모없는 훈계나 하려고 불렀어?’

도트는 배알이 뒤틀려 죽을 지경이었으나, 눈을 조신하게 내리깔았다.

그와 같은 모습에 베릴은 혀를 찼다.

“뭐, 됐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하는 법이지.”

“저어, 수녀원장님. 혹시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을까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도트는 은근히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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