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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 지친 소녀의 새로운 선택 (2/148)

02화 지친 소녀의 새로운 선택

수도원에서 잇달아 화재와 사고가 일어났어도 가지 못한 모르가나.

그리고 황태자도 데뷔탕트에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뜬소문에 여럿이 헛되게 놀아난 꼴이었다.

그때의 모르가나는 한없이 슬퍼했을 따름이지만 지금 생각하니 뭔가가 이상했다.

‘설마?’

먼저 불을 질렀다가 수도원의 구조에 익숙한 그분들이 무사히 탈출하자, 도트가 모르가나에게 그랬듯이 손을 써서 죽이고 붕괴 사고로 위장한 거라면?

증거가 하나도 없이 추측일 뿐이나 현실은 이보다 더 지독할 수도 있었다.

누가 알았을까,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 도트가 모르가나를 속여 죽게 만들다니.

‘가만. 내가 이 년 전으로 돌아왔다면 곧 신탁을 품에 안은 클라인 공작이 올 시기잖아?’

과거와 일이 똑같이 진행된다면, 공작은 베릴 수녀원장에게 직접 물어 조용하고 무던한 여아를 에이나 후보로서 내달라고 청하겠지.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고 한들 다 무슨 소용이지? 그들은, 나와 도트를 저울질하며 아프게 했어. 도트를 진짜 딸로 인정하지 않았던 때조차 내게 무정하게 굴었다고.’

모르가나는 앞으로 닥칠 일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게… 시간의 흐름이 달라졌다고 해서 없어지고 바뀔 일이야? 설령 앞날이 달라진다고 해도 내가 입은 상처는 여전해! 난 죽었잖아. 당신들이 딸과 여동생이라고 믿은 도트에게!’

사람들은 늘 그녀 주변에 들끓었으나 모르가나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는 우정을 나눈다는 제도 ‘에이나’.

그것은 모르가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몰아붙였다.

클라인 공작저라….

진실을 깨닫고 다시 살아난 지금, 거기가 친부와 친모를 비롯하여 진짜 가족이 있는 행복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정했던 그들은 모르가나를 항상 숨 막히게 하고 도트의 존재 역시 그녀를 꾸준하게 괴롭혔다.

거기서 이 년간 제일 많이 들었던 말.

‘네 주제를 알라고 했었나.’

모르가나를 한 명의 사람으로 보았다면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공작저의 사용인은 무수히 많았다. 그런 하녀들 앞에서조차 공작 부인은 모르가나를 향한 아픈 말을 그만두지 않았다.

심지어….

진짜 공녀로 인정받은 도트가 모르가나를 수도원으로 쫓아내기 전날, 그녀를 불러내서 뭐라고 했더라.

“앞으로 수도원에서 사는 네 남은 인생은 첫째도 입조심, 둘째도 입조심, 셋째도 입조심이다. 이 공작저에서 네가 한때나마 우리 티아나와 무슨 관계였다고 나불대는 순간!”

“네?”

“앞으로도 도움이 많이 필요한 수도원은 물론 너도 이쪽과의 모든 끈이 끊기는 줄 알아라. 티아나의 옛 이름도 모두 잊어버리고. 알겠니?”

오갈 데가 수도원밖에 없는 모르가나에겐 정말로 무서운 협박이었다.

어쩌면 도트보다 공작 부인이 더 잔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가짜 딸을 옆에 끼고, 말리는 척 자기 품에 안겨 드는 도트에게 상냥한 웃음을 지어 주며, 나를 죽음으로 가는 길에 내몰면서 끝까지 매정한 말을 서슴지 않았어.

심지어 그 무뚝뚝한 공작도 그간 수고했다면서 금화 주머니를 내줬는데!

내가 클라인 공녀의 에이나라고 했잖아.

분명 데리고 올 적에 내가 한 만큼 보상을 충분히 지불하고, 그레이스 수도원에도 온정을 한없이 베풀겠다고 했었잖아!

거짓말쟁이!

“됐어, 다 필요 없어!”

한껏 울분이 차오른 모르가나는 목에 걸린 루비 펜던트를 거칠게 잡아챘다.

모든 진실을 일부라도 들춰 본 이상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없애, 없애 버려! 나와 그들의 유일한 연결 고리를 그들이 원했던 것처럼 전부 다, 모조리 끊어 버리겠어!

금줄로 된 펜던트가 쉬이 끊기려 들지 않자, 그녀는 손이 빨개지도록 고리를 풀어 벽에 내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고개를 홱 돌렸다.

침대 하나, 책상과 비루한 옷장뿐인 검소한 방.

이런 방에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준비된 납작하고 값싼 대리석이 하나 있었다. 일하러 온 수도원생과 수녀들을 위해 없는 살림에 수도원에서 준비한 것이다.

당신들은 내게 이만큼의 호의도 베풀지 않았잖아.

분노로 눈이 돌아간 모르가나는 대리석을 들어 바닥에 던져진 루비 펜던트 위로 치켜들었다.

제발 부수지 말라는 듯 붉은 보석이 처절하게 반짝였으나 더는 필요치 않았다. 이것과 함께 클라인 공작 가문과의 모든 인연이 무참하게 부서지길 원했다.

당신들은 나를 버렸어.

이번 생엔 내가 당신들을 먼저 버려 주지, 영원히.

콰직!

그러나, 대리석은 본디 루비를 이길 수 없는 광물.

방에선 한동안 대리석 끝만 갈려 짓찧어지는 소리만이 연신 들려왔다.

돌을 아프도록 쥔 그녀의 손목이 위로 휙 치켜 올라갔을 때, 대리석 끝이 문득 고요한 물빛으로 물들었다.

드디어! 

붉은 보석의 가운데가 ‘쩍’ 하고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를 쾌감을 느낀 모르가나는 루비를 향해 대리석을 연신 내리쳤다.

그게 시작이고, 또 끝이었다.

쿵, 쿵, 쿠웅.

헐떡이는 숨소리와 돌에 보석이 짓찧어지는 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분노의 돌팔매질을 당한 펜던트 가운데의 루비는 처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토록 잔인한 면모를 보일 수 있는지 처음 깨달았다.

“하… 하아… 하아아….”

티아나 마리에타 클라인 공녀의, 출생의 비밀을 오롯이 품었던 루비 펜던트는 완벽하게 망가졌다.

‘통쾌해.’

모르가나는 엄청난 해방감으로 떨었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에 온몸을 내던진 느낌이었다.

“휴….”

분풀이를 했으니, 이젠 뒤처리할 시간이었다. 돌을 내리치느라 빨개진 손은 안중에도 없었다.

‘셰릴 사제님이 혹시 펜던트에 대해 물으면 어디 넣어 뒀다고 해야지.’

발견 당시에도 베릴 모녀는 이것이 귀한 물건임을 알았고, 모르가나의 나이가 꽤 찬 시점에야 실크 로브와 함께 건네줬다.

실크 로브는 어차피 어렸을 때의 것이라 입지도 못하기에 펜던트와는 달리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다.

“우선 돌가루부터 치워야겠어.”

대리석을 치우고, 부서진 루비 펜던트도 가방 안에 넣어 둔 모르가나는 침대에 반듯이 누웠다.

아프고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리고 나니 졸음이 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고된 에이나의 삶도, 클라인 공녀의 영광된 자리도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 시간 후엔 셰릴 사제님이 수도원으로 귀환할 짐마차가 왔다면서 부르러 오실 텐데.

싫어, 싫어, 싫어. 오지 말아 줘.

그게 되지 않는다면 내가 클라인 공작저로 불려가지 않도록, 공작이 내가 없는 수도원으로 와서 도트를 대신 데려갈 때까지만 누구든지 좀 막아 줘.

제발 막아 줘!

눈을 감은 모르가나의 눈가에서 슬픈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방금 깨진 루비 펜던트의 보석보다 강렬하게 빛나더니, 곧 무수히 속삭이는 소리를 자아냈다.

「…디어, 때가 됐….」

「스스로 부쉈…. …특하기도 하….」

「모…의 의사가… 중요….」

「…가 원하… 걸… 먼저 이뤄….」

‘뭐지?’

귀를 메우듯 몰려오는 환청에 놀란 모르가나가 눈을 번쩍 뜨자, 때마침 창 바깥에서 ‘쿠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졌다.

소나기인 줄 알았던 비는 십 분을 꼬박 기다려도 그치지 않고, 뇌우로 바뀌어 물벼락을 마구 토해 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람?’

과거에선 비가 전혀 오지 않았는데. 그리고 내가 들은 이상한 소리는 뭐지?

잔뜩 긴장한 모르가나는 귀를 기울였으나, 아까의 낯선 속삭임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모르가나! 괜찮니?”

“네…?”

죽었던 셰릴 사제님이 문을 열고 뛰쳐 들어와 모르가나를 와락 껴안았다.

“다행이야,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구나.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걱정했단다. 짐마차는 아마 출발을 포기했을 테니 여기서 하루 더 묵어야 할 것 같구나.”

“하루 더요?”

“이쯤 되면 비가 그쳐도 길이 진흙탕이 되어서 바퀴가 빠지거든.”

“아….”

“과일은 무사히 갈무리해 뒀으니 밖에 나가지 않아도 돼. 실내에 웅크리고 있는 편이 가장 안전하단다.”

다정하게 구는 셰릴을 보자, 왠지 목이 메었다.

셰릴 사제님…. 이번엔 돌아가시면 안 돼요.

베릴 수녀원장은 엄격한 면이 있었으나, 딸인 셰릴 사제는 아이들에게 자비롭게 대해 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모르가나의 친구인 도트만은 썩 내켜 하지 않았다.

그것도 통찰력에서 기인한 걸까.

“여름이라 비가 오나 봐요.”

“그러게. 후후, 우리 모르가나가 열심히 따 둔 청포도 한 송이, 같이 먹을까?”

죽기 전의 모르가나였다면 됐다고 거절했을 것이다.

그녀는 늘, 엄격한 베릴 수녀원장이 가르친 대로 얌전하게 굴고 음식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과거에선 손이 거칠어지도록 딴 딸기와 청포도도 모두 양보하고 시큼한 채소 피클만 먹었었다.

그게 도덕이고 옳은 일인 줄 알고 미련하게 살아왔다. 맛있는 음식을 모두 양보하는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하지만 이번엔 달라, 순간의 짧은 추억을 소중하게 하겠어.

“네. 사제님하고 같이 먹을래요.”

“그러자꾸나. 가장 큰 것으로 가져올게.”

셰릴과 함께 먹는 청포도는 참 달았다. 한 알씩 먹을 때마다 아까 흘렸던 눈물이 말라 가는 듯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런데, 눈썰미 좋은 셰릴은 그 짧은 시간에도 뭔가 달라진 점을 눈치챘다.

“모르가나, 목걸이는 따로 빼 뒀니?”

“네…? 네.”

“그래, 뭐. 비가 오는데 혹시 보석에 물이 들어가면 좋지 않으니까.”

모르가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어, 사제님. 보석이 달린 펜던트라서 목에 늘 걸고 다니면 좋지 않은 거겠죠?”

“원래 보석이란 건 땀이나 물이 닿으면 좋지 않거든. 너를 처음 발견했을 때 실크 로브도 흙투성이였는데 펜던트만 유독 깨끗해서 나도 어머니도 놀랐단다.”

“펜던트만요?” 

“보통 보석은 거친 일을 겪으면 손상되기 쉬운데 말이지.”

모르가나는 뜻밖의 이야기에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런 이야기, 죽기 전에는 따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다쳤던 너를 데려다주고 이름도 지어 줬던 마법사가 그랬단다. 네게 그 증표들을 너무 빨리 전달하지 말고 나이가 좀 차면 따로 불러서 주라고 했었지.”

“제… 이름을 지어 준 마법사가 있었다고요?!”

셰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수녀원장님이 펜던트를 주실 때 같이 말 안 해 주셨니?”

“네.”

“하아, 그랬구나. 하긴 그분은 마법과 마법사란 존재를 싫어하시니 그럴 만도 해. 내가 널 더 챙겼어야 했는데 일이 밀려서 무심했구나. 나중에 너한테 넌지시 물어라도 볼 걸 잘못했다.”

무심이라뇨, 아니에요. 셰릴 사제님이야말로 저를 가장 챙겨 주신 분인데요. 저는 그걸 몰랐어요. 정말 바보같이 말이에요.

달고 시원한 청포도를 먹는데도 목이 또 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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