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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135화 (135/138)

135화

“뭘 그렇게 봐?”

“아, 나무들 잎사귀들이 가느다란 것들밖에 없는 게 좀 신기해서.”

테사는 공작령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들의 잎사귀의 형태가 점점 좁아지는 게 몹시 흥미로웠다. 그녀가 살아왔던 곳들의 나뭇잎은 넓적한 형태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테사는 비죽비죽 자라난 커다란 나무들을 보며 새삼 자신이 왕도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비가 적게 내려서 그래. 유실되는 수분을 막기 위해 진화하다보니 잎사귀 면적이 적어진 거지. 그보다, 곧 도착이야.”

헤르트가 저 너머로 보이는 성 하나를 가리켰다. 거대한 성이 희미하게 깔린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공작부인. 공작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칼리아스 공작가의 영원한 종, 제노바가 인사드립니다."

대대로 칼리아스 공작령을 관리하고 지켜온 가신, 제노바 백작 노부부가 나와서 테사와 헤르트를 극진히 맞이했다.

“먼 길 달려서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시지요? 바로 여독을 푸실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방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인들이 마차에서 짐을 풀어 정리하는 동안 네 사람은 성안으로 들어섰다. 조금은 쌀쌀했던 바깥과는 다르게 성안은 훈훈한 열기가 돌고 있었다. 그들은 현관을 지나쳐 회랑 쪽으로 걸어갔다.

“어………”

헤르트와 함께 앞서 걷는 노부부를 따라 움직이던 테사는 회랑에 걸려 있는 어느 한 초상화를 보고 멈칫했다. 역대 가주 중 한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는 헤르트와 무척 많이 닮아 있었다.

“카일 드 숀 칼리아스 님이십니다. 각하의 조부 되시는 분이시지요. 공작부인께서도 보시기에 많이 닮으셨지요?”

테사의 시선을 알아챈 제노바 백작이 친절한 목소리로 초상화의 주인이 누군지 알려주었다.

“………네.”

테사는 헤르트와 초상화의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답했다. 헤르트가 나이가 들어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그제야 테사는 헤르트가 공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사생아라 할지라도, 그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전전대 공작과 닮아 있었다.

“왜 조부님이랑 닮았다고 말 안 했어?”

“나도 본 적도 없는 사람이야. 저 사람도 나 같은 핏줄이 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걸.”

“그래도, 헬…………. 네 조부님이신데…

저 사람이라니…………

테사는 혹여나 헤르트의 발언이 제노바 백작부부에게도 들렸을까 싶어 눈치를 봤다.

‘들으셨을까………??

“하하, 괜찮습니다. 각하께서 충분히 그리 느끼실 만하지요. 그럼 계속 가보실까요? 아 참, 초상화는 언제든지 오셔서 구경하셔도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니까요."

‘들으셨구나………….?

다만 제노바 백작은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헤르트의 발언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기며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공작령에 있는 성은 왕도 내 지어진 공작저에 비하면 크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대대로 물려 내려온 물건들과 오래된 가풍 때문인지 여러모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공작저가 유행을 선도하는 상점이라면, 공작성은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오래된 상점 같았다.

이곳이 침실입니다. 오시기 전에 일러두셨던 대로 모든 준비를 마쳐놓았지요."

제노바 백작이 보여준 침실은 온통 두터운 모피로 한가득이었다. 그 덕분인지 다른 곳보다 열기가 더 오래 머물러 후끈하기까지 했다. 공작령이 왕도보다 기온이 낮다는 것을 유의해, 헤르트가 사전에 모피를 아끼지 말고 침실을 따뜻하게 꾸며놓으라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는 테사를 위한 배려였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두 분을 성심껏 모시는 것이 저희의 본분이니까요.언제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이만 여독을 풀라며 노부부가 물러가자 방 안에는 테사와 헤르트만 남게 되었다. 테사는 창가로 다가가 그 바깥을 언뜻 살펴보았다.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대부분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공작가의 성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양 떼 목장으로 추정되는게 보였다.

“헬, 저기에 있는 건 양 떼 목장이야?”

“맞아. 나중에 목장에도 구경하러 갈까?”

“좋아!”

테사가 신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 양 떼 목장에 가면 양몰이하는 목장견도 볼 수 있는 걸까. 무척 똑똑하다고 그러던데.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테사의 어깨가 조금 늘어졌다. 이를 바로 눈치챈 헤르트가 뒤에서 그녀를 안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우리 쌍둥이들이 생각나서. 엄마 아빠 없다고 울고 있지는 않겠지? 밥은 잘 먹었을까.”

쌍둥이가 태어나고서 테사는 하루도 쌍둥이들과 떨어져 지낸적이 없었다. 젖어미와 유모들이 상시 대기 중에 있긴 했지만 그녀는 최대한 쌍둥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괜찮을 거야. 누구 아들딸인데.”

“그래도. 이렇게 떨어진 건 처음이잖아…………”

사실 처음에 쌍둥이들을 두고 간다는 말에 테사는 이 신혼여행을 반대했었다. 아직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쌍둥이들과 한 달 동안이나 떨어져 지낸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헤르트는 슬슬 쌍둥이들도 부모와 떨어져 보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나중에 부모가 자리를 비울수밖에 없을 때 쌍둥이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이 아니면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며 그는 완강하게 말했다.

하기사 그의 말대로 쌍둥이가 태어난 이래 헤르트와 테사는 단둘이 종일 같이 있어본 적이 손에 꼽았다. 공작과 공작부인으로서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기도 했지만, 쌍둥이들이 테사에게서 통떨어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결혼식 준비도 겹치면서 그들 부부는 마음 놓고 잠자리를 한 지도 꽤 된 상태였다.

그래서 테사는 이번만큼은 헤르트의 의견을 수렴해 신혼여행을 오게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쌍둥이 걱정은 그만하고 나한테도 신경 좀 써줘. 아무리 내 자식들이라지만 나 좀 질투가 나려는데.”

헤르트가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이자 테사는 간지럽다며 작게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헬․ 약속은 약속이니까…………. 여기에 머무는 동안은 온전히 너한테만 신경 쓸게.”

“딴말하지 마.”

......“진짜라니까 내가 언제…잠깐, 헬!"

은근슬쩍 치마 속을 파고드는 손길에 테사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 안에 두 사람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익숙한 공작저가 아닌 낯선 방 안이라 괜히 민망했다.

“아, 아직 아침이야."

“못 참겠어.”

"피곤하지도 않아? 우리 도착한 지 얼만 안 됐잖아. 조금만 쉬고………….”

“마차 안에서도 끝까지 못하게 했잖아.”

“그거야, 당연히 밖에 사람이…………!”

헤르트를 타박하려다가 테사는 떠오르는 기억에 얼굴을 붉혔다. 그와 동시에 제 아랫배가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쯤이면자신도 문제였다. 헤르트를 말려야 하는데, 그가 건드리기만 해도아래가 젖기 시작하니 안 된다는 제 말에 신빙성이 없지 않은가.

“하아………. 그럼, 한 번만…………. 딱 한 번만 하는 거야. 나 피곤하단 말이야.

“그래, 알았어. 한 번만

“진짜 저번처럼 그리 말해 놓고 계속하면.”

“약속할게, 테사 내 전부를 걸고서라도."

그렇게 테사는 헤르트에게 이끌려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

공작령에서 보내는 공작부부의 하루는 무난하고도 평온하게 흘러갔다.

느지막이 일어나 함께 식사를 하고, 헤르트가 그간 밀린 공작령의 일들을 대충 처리하는 동안 테사는 성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거나 낮잠을 잤다.

그 후 헤르트의 일이 대충 마무리가 되면 같이 말을 타고 근처 목장이나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다가 식사 시간에 맞춰 성으로 돌아왔다.

식사 후엔 노부부와 간단히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들은 일찍 침실로 들어가 다음날 아침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평범하고 비슷한 하루를 보내며 공작령에 온 지도 2주가 되어가던 참이었다. 테사는 갑자기 짐을 싸자는 헤르트의 말에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어딜 간다고?”

“여기랑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그니까 거기가………… 어딘데?”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알쏭달쏭한 헤르트의 말에 재차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헤르트는 제게만큼은 허투루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테사는 간단히 짐을 싸며 대꾸했다.

“헬, 너 우리 신혼여행으로 공작령에 간다는 것도 처음에 말 안해준 거 알아?”

“그건, 조금 시간이 필요해서 그랬어."

“시간이 필요하다니………. 역시 수상해. 그래도 헬, 너니까…… 믿어볼게."

두 사람은 최소한의 짐만 싸서 현관으로 내려왔다. 현관 앞에는 말 한 마리만 대기 중이었다. 제노바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밑으로 내려온 공작부부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준비는 모두 끝내놓았습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요?"

“충분해.”

헤르트는 말에 짐을 매달고 테사를 안아 안장 위에 올려주었다. 그 때 제노바 백작이 조용히 물었다.

“혹여 며칠 후에 돌아오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일주일은 머물다 올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때에 맞춰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제노바 백작의 배웅을 받으며 자신도 말 위에 올라탄 헤르트는한 팔로 테사를 단단히 안고서 말을 출발시켰다. 머지않아 공작부부는 성에서 벗어나 어디론가로 향했다.

테사와 헤르트가 시중을 들 사용인들도 없이 단둘이서만 간 곳은 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작은 집이었다. 테사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집을 보며 설마 하는 얼굴로 헤르트를 돌아봤다. 헤르트가 테사를 말 밑으로 내려주며 답했다.

“원했었잖아.”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고아원을 나가게 되면 작은 집에서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말.그 시절 헤르트에게 심심치 않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테사는 울컥하고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헤르트에게 이런 선물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작부인이 된 이후 자신조차도 거의 잊고 있었던 소망이었다.

결국 테사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자 이를 본 헤르트가당황하여 그녀 앞에 허둥지둥했다.

“왜 울어, 혹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집이 너무 이상한가?"“그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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