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있잖아, 넷. 내가 도망치면, 넌 여기에 혼자 남겠지? 그건 좀 슬픈 일이네. 그러니까 너도 수녀원을 나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길 바라. 알았어?”
‘롯, 슬프면 그냥 나랑 같이 있으면 되잖아. 굳이 여기서 도망가야 할 필요가 있어?’
‘그거야 난 널 좋아하지만, 여긴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이거든.'그쯤 되면 알고 싶어졌다.
대체 록사나가 말하는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건지.
그녀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건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록사나는 수녀원의 종탑 위에 있었다. 그 애는 무심한 눈으로 발아래를 쳐다보며 내게 말했다.
‘넷, 나 이제 정말로 그만하려고. 그동안 고마웠어. 부디 잘 지내. 네가 그리울 거야.'
‘뭐라는 거야. 롯, 장난 그만치고 거기서 내려와. 나 이번에는 진짜 화낸다. 장난도 정도껏……….”
‘차라리 장난이었음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정말 안녕.'
'롯!'
내가 붙잡기도 전에 록사나는 수녀원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스스로 밑으로 몸을 던졌다. 떨어지는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해 보였다. 마지막조차도 그 애의 얼굴은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평온하기 짝이 없어서 나는 그 모든 게 믿기지가 않았다.
'여긴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이야.'
나는 여전히 록사나가 말하는 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그녀가 죽고 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
긴 외출을 끝내고 늦은 저녁, 공작저의 방으로 돌아온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코를 박고 엎어졌다. 빌어먹을, 젠장…………. 아까부터 입 안에서 의미 없이 욕만 맴돌았다. 오늘 내내 가장 안쪽 주머니에 들어 있는 록사나의 편지에 온통 신경이 몰렸다.
때문에 백부님과의 만남에서도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하다가 꾸중을 들었고, 공작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뜯지 않은 록사나의 편지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나를 제프리가 몹시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음이 심란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나쁜 년'
하여간 사람 속 뒤집어놓는 데엔, 롯, 걔만 한 사람이 없다니까.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가 이내 상체를 일으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록사나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내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는 오래된 편지는 10년 이상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했다. 마음이 다시금 무거워졌다.
‘나한테는 편지 썼다는 말도 안 해줬으면서……………’
록사나가 그렇게 스스로 몸을 던졌을 때도, 그 애는 내게 편지의 ‘편'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라는 말만 하고서 제멋대로 죽어버렸을 뿐이다.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심지어 그녀의 몸은 놀랍게도 그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도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정말 그 애의 영혼만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데려갔다고 믿었다.
‘신은 무슨, 얼어 죽을 신.’
졸지에 신에게 친구를 빼앗긴 나는 삐딱하게 입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윽고 자포자기하듯 온몸을 늘어트렸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롯.’
너 진짜 짜증 나.
편지를 허공에 들어 보이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얇은 봉투 너머로 안쪽의 편지지가 비쳐졌다. 록사나는 저기에 무어라 썼을까.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 이내 팔이 아파 손을 내려놓았다.
아, 모르겠다. 편지를 잡은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방문 밖으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자넷, 저예요. 테사. 우리 잠시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작고 가느다란, 익숙한 목소리에 벌떡 상체를 일으켜 문 앞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테사가 서 있었다.
“테사, 내 방까지 어쩐 일이에요?”
“음, 제프리 경한테서 듣기로는 자넷이 저녁도 안 먹고 방으로돌아갔다고 들어서요. 점심도 못 먹어서 빈속이라 걱정하던데…………. 입맛이 없는 거라면 레몬타르트는 어때요…………?”
테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레몬타르트가 들어 있을 상자를 내게흔들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테사는 이제 절 너무 잘 아네요.”
5년이란 시간 속에 어엿한 두 아이의 엄마이자 공작부인이 된테사에게서는 더 이상 유테르트 후작가에 있을 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움츠리고 사느라 구부러졌던 그녀의 허리와 어깨는 곧게 펴진상태였고, 한때 불안과 우울에 젖어 있던 눈꼬리와 입매는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테사는 이제 봄날의 따스한 햇빛 같은 사람이었다.
“무적의 레몬타르트를 가져왔으니 방에 안 들이고는 못 배기겠네요. 들어와요, 테사.”
“그럼 실례할게요.”
테사가 자리에 앉아서 레몬타르트를 꺼내는 동안 나는 작은 주전자에 물을 채워 넣고 난로에 불을 붙여 그 위에 올려놓았다. 하녀를 불러 차를 내오라 하면 금방이겠지만 밤으로 접어든 이 시각에 구태여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테사 또한 그녀의 전속하녀인 릴라를 두고 혼자 온 걸 보니 같은 마음일 터였다.
우리는 예전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테사가 결혼을 한다니. 아니, 결혼은 이미 했지만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이상해요.”
“그건 저도 그래요.”
“신혼 여행지는 어디로 가는지 알아냈어요?"
“아니요. 헬이 통 말해 주지 않네요. 거기에 도착하기 전까진 비밀로 하고 싶은가 봐요.”
테사가 입을 살짝 비죽이며 답했다. 나는 그 말에 킥킥 웃었다.
“세상에,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으면 그럴까요. 공작 각하께서 금으로 별장이라도 지은 게 아닐까요?"
“놀리지 말아요, 자넷.”
“보기 좋아서 그래요. 두 분을 보면 이렇게 또 잘 어울리는 한쌍이 없구나 싶어서요."
…고마워요.”
내 말에 테사가 수줍게 웃으며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내 나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말이죠, 자넷………. 제가 자넷을 찾아온 건 걱정돼서였어요. ……괜찮은 거 맞죠? 혹시 고민이나 문제가 있다면 내게 언제든지 말해 줘도 좋아요. 저도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자넷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쁠 거예요.”
따뜻한 위로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상냥한 공작부인. 테사가 있어서 든든
하네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자넷에게 늘 고마워요. 그때 자넷이 없었다면 제가 여기까지 오긴 힘들었을 거예요. 마니도 그렇고…………”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에요? 공작님이 들으시면 속상하시겠어요.”
"하지만 사실인 걸요. 속상해도 어쩔 수 없죠.”
이제는 내 농담도 태연스럽게 받아치는 테사를 보며 확실히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록사나가 죽은 지도 벌써 10년이나 흘렀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울던 철부지 영애가 아니었다. 처음은 록사나의 바람이었을지 몰라도 스스로 수녀원을 나와 내 삶을 살기로 결심한 여자가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결국 난 록사나가 내게 남긴 편지를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사실은요, 테사. 가장 친했던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편지가 왔어요. 근데 그걸 열어볼 용기가 선뜻 나지 않더라고요. 그 애와는 끝이 별로 안 좋았거든요.”
“혹시 예전에 말해 주었던 수녀원에서 만난 친구 얘기인가요?”
테사의 말에 나는 반색하고 말았다. 유테르트 후작가에 있을 때 딱 한 번 말했던 건데 그걸 아직도 테사가 기억하고 있었을 줄이야.
“세상에, 그걸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요. 자넷이 해준 얘기는 다 기억이 나요."
“이거 진짜 공작님이 들으시면 질투하시겠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테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테사, 한번 들어볼래요? 그 친구 이야기.”
“네, 해주세요!”
“음, 그러니까………… 거의 15년도 전의 이야기에요. 그 친구와 나는 수녀원에서 처음 만났죠. 나는 당시에……….”
그 누구에게도 좀처럼 말하지 않았던 록사나와의 추억을 테사에게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자정이 넘어서 샤인 경이 테사를 데리러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머지는 다음에 해줄게요. 오늘은 너무 늦었네요. 가서 자고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안 자도……………”
“그러다간 공작님께서 절 당장 공작가에서 내쫓을 것 같네요.”아까부터 샤인 경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아내를 밤 늦게까지 붙잡아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눈빛으로 사람 죽이게 생기겠네. 하여간 테사에 관한 일이라면 사람이 무서워진다니까.
테사를 설득해 샤인 경과 함께 보내는 것에 성공한 나는 방 안에 홀로 남아 록사나의 편지를 천천히 열어보았다.
그리고 편지 내용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록사나의 편지는 단 두 줄이었다.
<난 잘 지내는데, 넌 어때.
ps.거긴 여전히 말도 안 되게 뒤죽박죽이려나?>
“하…………. 진짜 또라이 아니랄까 봐…… 편지에도 이상한 말 적어놓고 갔네.”
편지를 난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종이 위로 언젠간 록사나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넷, 자유롭게 살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정말 이상하고도 웃긴 록사나 수녀님.
“나도 잘 지내, 보다시피."
그리고 네 소원 내가 들어줬어.그러니까 우린 이제 서로에게 진 빚은 더 이상 없는 거다?편지가 있던 자리에는 어느덧 재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불쏘시개로 그것을 괜히 쿡쿡 찌르며 생각했다.아무래도 내가 록사나를 이해하는 것은 평생 그른 것 같다.
외전. last story
공작부부의 결혼식은 왕의 결혼식에 버금갈 정도로 성대하게치러졌다.
모두가 축복해 주는 가운데 테사가 아리따운 새하얀 신부로 헤르트 앞에 활짝 웃으며 나타난 것에 비해, 헤르트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리는 것으로 주변을 모두 경악하게 만들었지만,어쨌든 결혼식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이후 예정되었던 대로 두 사람은 쌍둥이를 자넷에게 맡기고 칼리아스 공작령으로 한 달간 신혼여행을 떠났다. 공작령은 왕도에서 3일은 내리 달려야 도착하는 왕국 내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다.대체적으로 기온이 낮고 농사짓기엔 척박한 땅이지만, 다른 나라와 닿지 않은 독립적인 지형으로 인하여 몇 세기 동안 침략당한적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