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평소라면 공작가의 담당하녀가 옷시중을 들어주었겠지만 오늘은 내 예정된 휴일이었고, 어젯밤 하녀에게 오늘 시중은 괜찮다고 말해 둔 참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만큼은 느지막이 일어나 온종일 방 안에서 지낼 생각이었으니까.
‘그야 반 달 만에 쉬는 날이란 말이야…………’
2년 전, 긴 여행을 마치고 테사를 만날 생각으로 잠시 공작가에 들렸던 나는, 쌍둥이 공자 공녀의 총괄 보모가 되어주지 않겠냐는 테사의 제안에 얼떨결에 칼리아스 공작가에 눌러앉게 되었다.
처음엔 이런 나를 공작이 된 샤인 경이 탐탁지 않아 했으나 그는 므슈 왕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애처가로 소문이 난 사내였다. 즉 테사의 부탁이라면 꼼짝을 못 한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나는 오늘날까지 공자 공녀의 총괄 보모로 공작가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밑에서 일하는 제프리와도 자주 만나게 되는건 당연했고, 여러 해 심심치 않게 부딪히면서 이제는 서로에게 자질구레한 부탁을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빨리, 제프리! 우리가 더 늦길 바라는 건 아니지?"
“역시 제가 한 말은 귓등으로 듣는 척도 안 하는군요.”
“뭐래, 듣고 있어. 듣고 있으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아냐. 아무튼 얼른 와서 도와줘. 여기에 너 말고 보탤 손이 어디 있어?”
끈질긴 재촉에 제프리는 할 수 없이 가림막 안쪽으로 들어와 등의 단추를 채워주었다. 더 나아가 그는 허리춤의 리본을 깔끔하게 묶어주기까지 했다.
그사이에 나는 능숙하게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적당한 핀을 찾아 고정하는 것으로 심하게 곱슬거리는 머리를 빠르게 정리했다. 내 하녀였던 진이 다른 임무를 맡게 되면서 이후 아침마다 혼자서 머리카락을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자연스럽게 터득한 기술이었다.
그냥 잘라버릴까? 2년째 똑같은 머리 모양에 슬슬 지겨워져 앞머리를 만지며 생각했다. 귀밑까지만 잘라내도 편할 것 같은데. 거울 너머로 보이는 제프리에게 물었다.
“제프리, 나 머리 자를까?”
“여유 부리는 소리 하지 말고 그 술 냄새 좀 어떻게 해보세요. 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와인 두세 병인가…………”
이럴 줄 알았음 적당히 마실 걸. 술냄새를 감춰줄 향수를 골라 몸에 전체적으로 뿌렸다. 산국화의 향이 나는 향수는 최근에 케니스가 추천해서 사놓은 거였다. 매일같이 약초냄새 나는 약방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만날 때마다 산뜻한 향을 풍기길래 물어봤더니 이걸 알려주지 뭔가.
“어때? 지금도 나?"
“아까보다 괜찮아진 것 같네요.”
“그래? 그럼 이제 가자!"
어쨌든 대강 외출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옷과 어울리는 신발을 신고서 숄과 양산을 챙겨 방 밖으로 나왔다. 제프리도 그런 나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어머, 벨로뎀 님. 어딜 가세요? 오늘 종일 방에서 쉰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1분이라도 서둘러야 한다는 조바심에 계단을 두 개씩 내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때마침 반대편에서 계단을 오르고 있던 하녀, 릴라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좋은 점심이에요, 릴라! 사실 제가 오늘 약속이 있단 걸 깜박해서요. 아무래도 늦게 돌아올 것 같아요. 미안하지만 릴라가 나 대신 공작부인께 전해줄래요?"
“아, 그러시구나. 걱정 마세요, 전해드릴게요.”
“고마워요, 올 때 맛있는 거 사가지고 올게요!"
“네에!”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은 탓에 대화가 끝날 즈음엔 나와 릴라는 서로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꽤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우리를 신경쓰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이 저택에 있는 모두가 자신이 맡은 일을 해결하느라 바빴다.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제프리에게 별안간 말을 걸었다.
“다들 바빠 보이지?"
“그거야 곧 결혼식이잖습니까.”
요새 공작가는 부산스럽기 짝이 없었다. 제프리의 말대로 한달 후면 이곳에서 공작부부의 성대한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다들 정말 열심이라니까.”
“어떤 자리인데요.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
"하긴.”
세간을 흔들었던 공작부부가 5년 만에 정식으로 올리는 결혼식인 만큼, 식장에는 왕국 내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모일 예정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 어떤 것 하나 허투루 준비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때문에 저택 내 모두가 정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내가 괜히 어제 과음을 한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식을 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공작부부의 결혼식이 5년이나 늦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오래된 학대로 인하여 정신과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었던 테사는 긴 잠에서 깨어나고서도 한동안은 계속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더군다나 쌍둥이까지 임신한 그녀였기에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그 때문에 결혼식이 잠정유보가 된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 결혼식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결혼식 후 몇 주간 신혼 여행지로 여행을 떠날 공작부부를 대신해 저택에 남아 공자와 공녀를 돌봐야 하는 내 처지는 반갑지 않지만.
"가장 행복한 결혼식이 될 것 같아.”
“신부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결혼식을 기대하는 사람은 처음보네요.”
“결혼식 빨리 했음 좋겠다
“왜, 그럼 안 돼?”
내가 기대된다는데. 뒤를 돌아보자 제프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 될 건 없죠. 축하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면 좋은 거니까. 그보다 앞이나 제대로 보세요. 그러다 넘어집니다."
“넘어지면 네 탓이야."
“말을 맙시다."
저택 내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나오자 제프리가 미리 준비해놨을 마차가 보였다. 우리는 거의 날아가다시피 마차에 허겁지겁올라탔고, 마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출발했다. 멀어지는 공작저를 보며, 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늘어져서는 한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일어나 있었음 얼마나 좋습니까. 약속 하나 제대로 기억 못 하고. 대체 어디까지 추해지실 건데요.”
그 때 잠시 잊고 있었던 제프리의 잔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나는 듣기 싫다는 시늉을 하며 귀를 막았다.
“참나, 나도 까먹고 싶어서 까먹은 게 아니라고 했잖아. 한 번만 봐줘."
“됐고요, 그것보다 전해드릴 게 있습니다.”
제프리가 품속에 손을 넣더니 이내 작은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언뜻 보기에도 꽤 오래 방치된 것 같은 낡은 외관에 나는 선뜻 받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뭔데?”
“델도로움 수녀원에 갔다가 전 유테르트 후작부인을 만났습니다. 이걸 발견했다면서 당신께 전해달라던데요."
델도로움 수녀원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엘이?"
유테르트 후작가가 멸문한 후 엘레나는 예전에 내가 살았던 델도로움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종종 내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전하곤 했는데 수녀원 생활이 그녀에게는 잘 맞는 듯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뭐 합니까? 안 받고."
“알았어…………. 받으면 되잖아.”
얼떨결에 편지를 받은 나는 이내 봉투 뒤편에 적힌 글씨체를 보고 적잖이 당황하고야 말았다. 이런 내 반응을 발견한 제프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요?”
"그냥, 너무 예상치 못한 편지라서."손끝으로 수신인 자리에 적혀 있는 내 이름을 매만졌다.
<자넷에게. 너의 하나뿐인 친구로부터.>
록사나의 필체였다.
***
록사나와 내가 처음 만난 건 정확히 열두 살. 그해 유행했던 역병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반강제적으로 수녀원에 보내져 평생을 수녀로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우울해 하던 날이었다. 그런 내 앞에 록사나는 다짜고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나타났었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쟨 뭔데 내 머리를 후려갈기는 걸까.
당연히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으므로 우울함도 잊고 록사나에게 달려들어 그 애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 뒤는 뭐,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우리는 서로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진심을 다해 싸웠고, 싸움이 끝날 땐 친구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그 나이 대의 여자애들은 한 번씩 주먹다짐을 해가며 친구가 되는 법이니까.
당시 내 또래의 수녀가 록사나밖에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중에 가서야 왜 내 머리를 때렸는지 물을 수 있게 되었는데, 우울함엔 싸움이 최고라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난 뒤로 더 이상 그녀에게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크게 효과를 보기도 했었고.
아무튼 그게 나와 록사나의 첫 만남이었다.
'난 이곳이 싫어. 말도 안 되는 곳이야. 완전 뒤죽박죽이라고.''뭐가?'
‘모든 게. 문화며, 인종이며, 종교며 싹 다! 아주 짬뽕이야!'
록사나는 때때로 알 수 없는 말과 단어를 내뱉으며 열을 냈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록사나가 이상한 애라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진짜 이상한애였다.
사실 언제 한 번은 록사나에 대해 원장 수녀님에게 물은 적이있었다. 쟤는 왜 저래요? 그 물음에 원장 수녀님은 록사나가 신에게 선택받은 아이라 그렇다고 했다. 신에게 너무나도 사랑받은나머지 머리가 조금 이상해졌다고.
아, 머리를 다쳤구나.
안쓰러운 록사나. 하지만 웃긴 애니까 괜찮아.
록사나가 이상한 말을 해도 좋았다. 걔와 함께 있으면 매일 사건 사고가 터져서 우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난 그 애 옆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이게 친구가 되기 좋은조건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나는 도망칠 거야.”
어느 날 록사나가 말했다.
'어디로?'
'이곳에서.'
수녀원을 빠져나가겠다는 얘기일까?
‘그럼 같이 가. 너랑 같이 나가면 적어도 굶어 죽진 않을 것 같아.’
‘안 돼. 너는 못 가. 너랑 나랑은 다르니까.”
뭐야, 뭐가 다른데.’
'넌 여기 사람이잖아.'
그게 무슨 뜻이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나를 바라보는 록사나의 눈빛이 평소와는 상당히 달랐다. 다만그녀는 또다시 평소처럼 이상한 말을 했다.
‘여긴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이야.’
‘또 그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