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경은 이제 큰일 났습니다.'
문득 찝찝하기 짝이 없었던 경고 하나가 떠올랐다. 평소보다 늦게 도착해서 정신없이 방으로 향하던 찰나 랑그가 제게 했던 말이었다. 자세하게 듣지 못한 채로 방 안으로 등 떠밀리다시피 들어와 기분이 몹시 찝찝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저를 반겨주는 테사를 보고 잠시 잊고 있었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로 문제가 있었던 건가.
표정이 좋지 못한 테사를 보니 헤르트는 한편으로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더라? 그는 최대한 머릿속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딱히 짐작 가는 것은 없었다. 테사가 깨어나고서 헤르트는 제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맞추다시피 지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뭐? 그런 거 아니야…………!”
테사가 급히 헤르트의 오해를 가로막았다. 그제야 헤르트는 떨렸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면…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뭔데?”
“그건…………”
“그건……?”
"그동안 솔직하지 못한 거, 너한테 숨겼던 것들 모두…………미안해. 이걸 꼭 말하고 싶었어.”
테사는 고개를 틀어 저를 잡은 커다란 손을 바라봤다. 따뜻한 온기로 가득한 그 손은 언제나 저를 잡아주었던 손이었다. 저 손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손을 더 이상 놓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볼 셈이었다.
원래라면 진즉에 말했어야 했던 이야기들.
테사는 천천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그때 말이야…………. 일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나 너무 기뻤어. 처음으로 내가 너한테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내가 남작영애의 하녀가 되면 너를 기사단에 넣어준다고 그랬거든. 한편으로는 널 깜짝 놀래켜주고 싶었어.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나 봐. 매번 너한테 도움만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테사.”
“그래서 숨겼어. 그러면 안 됐는데…………. 솔직하게 너한테 말하고 조언을 구했어야 했는데. 근데 안 그랬어. 내 욕심 하나 때문에, 심지어 밤에 네 방에 몰래 들어가서 네 지장도 찍었는걸. 난…………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한테도 이제 잘 살아갈 기회가 온 거라고. ………진짜 멍청하지.”
그날을 몇 번이고 후회했는지 모른다. 헤르트에게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테사는 불현듯 눈가가 찡해 오자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이번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나는 그걸 주워담을 수도, 새로운 물을 채워놓을 수도 없었어. 사실은 무서웠던 것 같아. 나 때문에 벌어진 일들을 받아들이는 게… 그래서 현실을 자꾸만 외면하려고 했어. 이건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 고......."
도피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이제 와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테사는 최대한 씩씩하게 말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난이제 괜찮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이제 더는 후회하지 않기로, 스스로 헤쳐나가기로 결심했노라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헤르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너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랬어. 나는 솔직해지는 게 너무 무서웠어. 이미 모든 게 변해버렸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어. 그냥……… 그대로 잊어버리고 싶었어.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너한테 또 상처 주고 말았어.”
테사가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짙은 푸른빛의 눈동자가 파도치듯 일렁거렸다.
“미안해, 헬. 이 얘기를 가장 처음에 했어야 했는데……너무 늦어버려서. …………용기가 필요했어. 과거를 똑바로 마주 볼 용기부터, 네게 모든 걸 털어놓을 용기까지. ………그리고 이제 그 준비가 모두 된 것 같아.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나한테 기회를 줄래? 앞으로는 너와는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해지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헤르트가 불쑥 테사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테사는 헤르트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헬?"
“넌…………. 테사, 넌 언제나 내게 전부였어."
무언가를 꾹꾹 억누르는 듯한 사내의 목소리는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했다.
“한 번도 네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적이 없어.넌………… 내게 있어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 전부였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은 테사였다. 그녀가 있었기에 지금의 헤르트가 있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테사가 그의 인생에서 도움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거진 헤르트의 인생은 테사가 구원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헤르트는 테사의 고백을 듣는 순간부터 심장이 아려 왔다. 생각보다 자신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는 건 아닌가 싶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테사와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는 이야기는 꽤나 달랐기에.
시야가 어물어물 흐려진다. 헤르트는 그날처럼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헤르트는 테사와 다시 한번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가에도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게 보였다. 헤르트는 손을 뻗어 테사의 작은 뺨을 감싸 안았다.
“기회는…… 네가 나한테 주고 있다는 거야."
“헬…………”
지금도."
헤르트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제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주었던 그 밝은 소녀는 언제나 그의 앞에 있었다는 걸. 그 소녀를 보지 못했던 건 분노에 눈이 멀었던 자신이었다는 것도.
결국 이번에도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테사임을.
그는 이제 알았다.
“나야말로 미안해. 내가……… 널 기다리지 못했어. 용기가 없었던 사람은 오히려 나였어……………”
말했잖아, 난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는 이렇게 매번 나아가고 있는데, 난 네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매번 그대로잖아.
“테사, 넌………… 누구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야. 나보다도, 훨씬.” 뜨거운 물줄기가 기어코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테사의 눈물 또한 터지고 말았다. 그녀는 제 소매로 헤르트의 눈물을 닦아주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왜 우는데…....... 네가 우니까………….”
나도 울게 되잖아. 오늘만큼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두 사람은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울다가 붉어진 서로의 눈가를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산책을 하다가 둘 다 울음이 터져버린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어처구니없었다.
테사가 헤르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약속하자. 언제나 서로에게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해지기로………….”
"약속할게."
헤르트가 제 새끼손가락을 걸며 단호히 대답했다. 약속이 성사되자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러다 테사가 돌연 배를 감싸 안으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
“왜 그래?”
헤르트가 곧장 사색이 되어 테사를 살폈다.
“배가………”
그 순간 한 번 더 배에서 작은 울림이 일어났다. 무언가가 발길질하는 것 같은…………. 테사는 머지않아 놀란 얼굴로 헤르트를 바라봤다.
"헬, 첫 태동이야!"
그녀는 그의 손을 급히 가져와 제 배에 가져다 대었다. 아이가 아빠의 존재를 느낀 듯 연이어 발길질을 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생생한 감촉에 헤르트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게……… 태동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격한 움직임과 더불어 오묘한 감정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 애도 기쁜……. 헬?”
테사는 무심코 헤르트의 얼굴을 보았다가 놀라고 말았다. 그가 또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이의 첫 태동에 감동받은 걸까. 제 배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넋이 나가 있는 그를 보며 테사 또한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근데, 헬………. 나 하고 싶은 얘기 하나 더 있는데… 눈물이 나도 말해야 할 건 해야지.
혹여 잊고 넘어갈까 봐 테사가 눈에 힘을 주며 급히 말을 내뱉었다.
“선물 좀 그만 줘.”
“………어?”
“너무 과하고………… 부담스러워. 그래서 말인데 오늘 준 선물은 웬만하면 다시 가져갔음 좋겠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왜 갑자기 날 땅 부자로·· 만드는 거냐구…………”
헤르트는 순간 테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다. 오늘 준선물? 땅 부자…………? 곧이어 헤르트는 자신이 얼마 전에 제 몫의 재산 일부분을 테사에게 양도하는 서류에 서명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승인이 되는 대로 랑그가 직접 와서 안내해 주기로 했던 것까지 생각났다.
‘경은 이제 큰일 났습니다.'
다시 한번 랑그가 제게 던졌던 경고가 떠올랐다. 설마 그것 때문에? 하지만 왜? 헤르트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른 테사의 반응에 순간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분명 좋아할거라고 다들 그랬는데.
첫날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준비한 선물들을 테사가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 헤르트는 그나마 테사와 같은 성별인 보르웬 후작에게 여자가 선물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답변은, 잃어버리면 못 쓰는 물건 말고 차라리 움직이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땅을 선물하라는 것이었다.
'그딴 시시한 것들을 선물을 주니까 별로 안 좋아하지.'
혹시나 싶어 그의 부하 기사인 모젠에게도 땅을 선물받는다면좋아할 것 같냐 물었더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답했다.
헤르트는 그 길로 바로 양도가 가능한 재산부터 테사의 명의로이전 신청을 했다. 랑그는 그런 헤르트를 너무 이른 것 같다며 말렸으나 기뻐할 테사의 모습을 상상한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되도록이면 나도 그냥 받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나한테 주는 선물들은 너무 과해 정말로 주고 싶다면 하루에 하나만. 그것도 꽃다발 같은 선물이면 난 충분해, 헬.”.......
“하지만……………”
헤르트는 아직 테사에게 주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앞으로 그녀에게 넘겨주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였다. 다만 왕의 허락이 필요한 이상 한 번에 줄 수가 없어 지금처럼 나눠주었을 뿐이다.
테사에게 주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제 것이 곧테사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