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116화 (116/138)

116화

환한 빛으로 가득한 공간에 정해진 길이라곤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테사는 이윽고 어느 곳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가 항구의 등대처럼 그녀를 이끌어주고 있었다.

‘테사.’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테사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응, 헬. 나 여기 있어. 지금 너에게로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테사는 더는 겁내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만 쭉 가면 헤르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그녀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빨리 가야 해.

헤르트가 날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마침내 테사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찾아 그것을 꽉 붙잡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테사는 눈물을 터트리며 다시는, 이 손을 놓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제야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7년간 매일매일 그리던 그 얼굴.

“테사.”

테사는 우는 얼굴로 활짝 웃어 보였다.

안녕, 헬.

***

헤르트는 아주 짧은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테사와 함께 들판을 뛰놀던 꿈. 그 꿈속에는 들꽃으로 엮어 만든 화관을 머리에 쓰고 환하게 웃는 테사가 있었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진저빛의 붉은 머리카락이 나붓나붓 흔들리고, 그녀의 낭창한 팔다리는 나비처럼 통통거린다. 작은 웃음소리마저 악기처럼 청아하다.

‘헬.’

작은 입이 조곤조곤 제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헤르트는 그녀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끔 우리도 씨앗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도 씨앗처럼…….’

꿈이 서서히 흐려진다. 덩달아 테사의 말도 옅어지기 시작한다. 헤르트는 사라져 가는 테사를 바라봤다. 테사는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인내하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꽃을 피우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 순간 헤르트는 제 손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을 느꼈다. 그 손만큼은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헤르트는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잠시 테사의 곁에서 잠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느꼈다, 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작은 손도.

헤르트는 저도 모르게 굳어, 누워 있는 테사를 바라봤다.

늘 감겨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테사.”

그 말 한마디에 테사가 웃는다. 그 언제보다 활짝.

헤르트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널 기다렸어.

네가 눈 뜨기를…….

“……헬.”

불현듯 갈라진 음성이 대답하듯 그를 부른다. 꼭 지금 말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처럼, 테사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 목이 심하게 말라 있음에도 계속 입을 벙긋거렸다. 때문에 목소리가 이리저리 깨져나갔다.

“미, 안……해…….”

“테사, 말하지 마, 지금은 그냥…….”

“아냐, 말……해야, 해…….”

“테사…….”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테사는 헤르트를 따라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조금씩 말을 이어나갔다. 제 마음을, 진심을 모조리 전하고 싶었다. 그를 너무나도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기에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미안해……. 널 혼자 두고…… 내 멋대로…… 널 잊어서. 나는…… 무서워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서…….”

네 사랑에 기간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날 금방 잊고 버릴 거라고. 네게 잊혀질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웠어. 하지만 이제는 알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멍청했는지. 얼마나 미련했는지.

언제나 마음속으로만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을 드디어 말하게 된 테사가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이토록 쉬웠던 것을 왜 그간 말하지 못했을까. 가슴이 아리면서도 후련했다.

이윽고 테사는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을 입 밖으로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헤르트를 다시 만났을 때 가장 처음으로 해야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었다.

“있잖아, 헬……. 난, 널…… 배신하지 않았어…….”

그 말에 헤르트가 고개를 숙인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한없이 작았던 그날의 아이처럼. 그의 눈가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그들이 맞잡은 두 손 위로 뚝뚝 떨어졌다.

“많이 늦었지만, 말하고 싶었어……. 더 늦기 전에…….”

“……알아. 나도. 나도…… 알고 있어, 테사…….”

결국 헤르트가 울음이 반쯤 섞인 말로 힘겹게 대답했다.

“……나야말로 미안해, 테사.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를…….”

“……헬.”

테사는 우는 헤르트의 뺨을 감싸려 손을 뻗었다. 축축한 뺨을 감싸자 여전히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그를 향해 기꺼이 웃어주었다.

그가 제게 제 잘못이 아니라고 했듯이, 그녀도 그에게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저 먼 길을 빙 돌아온 것뿐이라고.

“우리 이제…… 행복해지자.”

이제부터 행복해지면 되는 거라고.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니까.

“응…….”

사내는 다시 한번 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숙했던 나날들이었다.

부족하고 미숙했기에 많은 고난이 닥쳐 왔지만 그로 인해 더욱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테사는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씩 나아가겠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겠노라고, 결심했다.

사랑하는 그와 함께.

배 속에 있는 이 작은 아이와도.

“……사랑해, 헬.”

긴 여정 끝에 두 사람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여정을 떠날 예정이었다.

<10. 에필로그 1>

지도사 선생님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테사는 아이들이 한곳에 몰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동한 테사는 종종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둥글게 모여서 어느 한 곳을 슬쩍 쳐다보며 활발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테사를 발견하고는 냉큼 옆에 붙어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테사, 저기! 저기 앉아 있는 남자애 보여?”

“응? 저기, 금발 남자애?”

“그래. 이번에 들어온 애래.”

“근데, 그게 왜?”

테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친구, 조니를 돌아보자 조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넌 정말 소문에 느리다니까. 아까 대체 어딜 갔던 거야? 소녀는 투덜거리면서도 이내 목을 가다듬고 테사에게 이번에 피츠럴드 고아원에 온 남자애에 대하여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전 고아원에서도 애들 패고 다녔대! 아까 찰스가 말을 걸었는데 말 걸지 말고 꺼지라고 했다잖아! 그래서 다들 쟤 경계 중이야.”

“흐응……. 그렇구나.”

“뭐야, 그 반응은?”

“그게……. 알고 보면 좋은 친구일 수도 있잖아. 다들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무서워도 하고, 싫어도 하고, 경계도 하는 걸! 지도사 선생님들도 새로 온 친구들한테는 천천히 다가가라고 말씀하셨잖아.”

테사의 쾌활한 대답에 조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넌 매번 긍정적이라 좋겠다.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재차 목을 가다듬었다.

“저기 쟤한테 난 상처 안 보여? 저렇게 상처를 달고 다니는 애들 성격이 포악하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야. 테사, 너도 조심해! 알았지?”

조니의 말이 다 끝나갈 쯤이었다. 한곳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발견한 지도사 선생님이 그들을 향해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진다.

다시금 공터에는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테사는 여전히 혼자인 남자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아이는 왜인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다가오지 말라고 거칠게 소리치고는 있지만 사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세우고 있음을 테사는 알 수 있었다. 한때 그녀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이 넓은 공터에 홀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남자애가 몹시 신경이 쓰였다.

“테사, 뭐 해? 와서 같이 놀자!”

별안간 아이들이 멀뚱멀뚱 서 있는 테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이리 와 같이 놀자고 불렀다. 그러나 테사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서 남자애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뒤에서 조니가 ‘거봐, 내가 뭐랬어?’라고 말하는 것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도사 선생님들이 다들 친하게 지내라고 했으니까……!’

남자애는 둥근 바위 위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애의 몸은 온통 상처와 멍투성이었다. 전에 있던 곳에서 쌈박질을 밥 먹듯이 했다던데, 그게 사실일까? 테사는 부러 인기척을 내어 그 아이에게 인사했다.

“안녕?”

예상했던 대로 남자애는 테사의 인사를 무시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 아이는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하더니 바위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테사 또한 놀라 급히 소년에게 다가갔다.

“저기……. 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저리 가! 누가 관심 따위…….”

“미안해. 네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그래도 널 돕게 해주면 안 될까?”

소년의 다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위 위에서 굴러떨어지면서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소년도 쉽게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테사는 더욱 조심스럽게 남자애에게 다가갔다. 경계심 어린 눈초리가 피부를 찌르듯이 따끔따끔했다. 테사는 그런 소년의 경계를 풀어주려 밝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빌려줄게.”

“…….”

“자, 어서.”

결국 소년은 테사가 내민 손을 잡았다. 테사는 있는 힘껏 힘을 주어 그 아이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손을 맞잡은 채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내 이름은 테사야. 너는?”

“……헤르트.”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0